• 6·27 전보 날조 사건'으로 판명!
    KBS, 날조 시인하였으면 정정, 사과, 문책해야

    김대중 노무현은 聖域이고 이승만 박정희는 동네북인가?
    사실에 죽고 사는 언론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을 때는 깔끔하게 정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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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趙甲濟   

어제 밤 아홉 시 뉴스에서 KBS는, 李承晩(이승만) 정부가 김일성의 남침 이틀 후인 6월27일에 일본에 망명 요청을 했다는 6월24일자 보도가 날조된 오보였음을 사실상 시인하였다.

문제는 사안의 성격상 정정과 사과로 처리하여야 하는데 모호하게 넘어가려 한 점이다. 

KBS는 이렇게 해명하였다. 'KBS가 보도한 야마구치현 기록은 망명정부 요청이 전쟁 초기 상황으로 묘사돼 있을뿐 보도에서 나온 6월 27일이란 날짜는 없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 해명이 무슨 뜻을 갖는지를 일반 시청자는 알 수가 없을 것이다.
KBS는 정직하게 이렇게 정정, 사과하였어야 했다. 

[KBS는 지난 6월24일 <“이승만 정부, 일본 망명 요청설” 사실이었다!>는 제목의 보도를 하였습니다. 저희는 <당시 `다나카 타쓰오' 야마구치현 지사는 한국전쟁 발생 이틀 뒤인 6월 27일, 외무성을 통해 '한국 정부가 6만 명의 망명정권을 야마구치현에 세우고 싶어한다'는 전보를 받았다고 적혀 있습니다>라고 전했지만 확인결과 6월27일이란 날짜는 자료에는 없는 것을 보도 관계자가 끼워넣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핵심적인 사실이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으므로 기사 全文을 취소하고 시청자와 이승만 前 대통령 가족분들에게 사과를 드립니다. 앞으로 자체적인 진상 조사를 통하여 책임자를 가려내 엄중 문책하고 재발 방지책을 세울 것임을 다짐합니다.]

KBS는 일본 외무성 전보의 實在와 내용도 확인하지 않고, 한국 및 미국 정부 자료는 무시하고, 신빙성이 약한 일본 자료에다가 6월27일이란 날짜를 삽입(화면), 이승만 대통령이 공산침략군과 死鬪(사투)하는 국군의 등 뒤에서 일본으로 도망가는 계획을 추진하였다고 단정적 보도를 내보냈다.

오보와 날조는 다르다.
오보는 실수로 하는 것이고, 날조는 고의로 하므로 범죄가 성립된다.
 KBS는 일단 6월24일자 보도의 핵심 사안이 날조임을 인정하였으므로
 反論(반론) 게재 정도로 넘어갈 수 없게 되었다.
 KBS는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고 있어 가장 엄격한 언론윤리가 적용되어야 한다.
이 정도의 중대한 범죄적 행위에 대하여는 사장, 보도책임자, 그리고 기자가 사표를 내는 것이
외국 공영방송의 경우 관례이다.  

1. 이승만이 일본에 망명을 타진하였다는 한국과 미국의 정부 문서가 없을 뿐 아니라
  시종 決死抗戰(결사항전)의 자세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수많은 공식 문서가 두 나라에 있다. 
2. KBS는 일본 측의 미확인 자료를 사실이라고 우기는 데 그치지 않고 '6·27 외무성 전보'라는 것    을 조작, 이승만을 비겁한 도망자로 매도하였다.  
3. KBS는 날조된 허위를 사실이라고 단정하여 보도하였다. 
4. 한국전 발발 65주년에 맞추어 악의적 보도를 집중적으로 내어보냄으로써
   위대한 전쟁 지도자와 국군, 더 나아가서 국가를 모독하였다. 
5. KBS가 이승만을 날조된 자료로 모함하는 데 인용한 증인은 야마구치 현의 당시 지사 다나카 다쓰오(田中龍夫)였다. 그는 만주사변을 일으킨 군국주의 정치인 다나카 키이치(田中義一)의 아들이고 유명한 反이승만 성향자였다. 더구나 이승만 정부가 망명을 타진하였다는 야마구치는 이등박문 등 명치유신과 한반도 침략 인맥의 본산이다. 
6. KBS가 날짜를 조작, 이승만 대통령이 남침 이틀 뒤 이런 야마구치를 망명장소로 타진한 것처럼 꾸민 것은, 건국 대통령을 反민족적 친일분자로 매도하려는 저의가 있었다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7. KBS에 있어서 김대중 노무현은 聖域(성역)이고 이승만 박정희는 동네북인가?

KBS가 살 길은 보도 책임자의 문책, 사장의 사과, 진정성 있는 정정 보도이지 반론을 소개하고 유감을 표시하는 것으로 끝낼 사안이 아니다. 사실에 죽고 사는 언론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을 때는 깔끔하게 정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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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의 어제 밤 해명 기사 내용

<앵커 멘트>

지난달 24일 KBS가 보도한 이승만 정부의 일본 망명 정부 요청설과 관련해 이승만 대통령 기념사업회 측은 정부 공식 기록이 아니라며 보도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습니다.

KBS는 앞서 충분한 반론 기회를 주지 못한 것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송창언 기자의 보도입니다.

<리포트>

지난 달 24일 KBS가 보도한 일본 야마구치현 현사와 미 군정 기록입니다.

6.25 전쟁이 일어난 뒤 일본 망명정부 요청설이 사실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문서라고 보도했습니다.

이에 대해 이승만기념사업회는 정부 공식 기록이 아닌 야마구치현 자료만을 근거로 망명정부 요청설을 제기한 것은 왜곡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미 군정 기록도 일본 정부가 자체적으로 난민수용에 대비한 것일 수 있지만 우리 정부의 요청이 있었다고 볼 수 없다고 반박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정부의 제주 이전도 반대했는데 일본 망명 정부를 타진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녹취> 이인수(이승만기념사업회 상임고문) : '항상 6.25 사변 중에서도 권총을 옆에다 놓으시고 주무셨어요. 결국 싸우고 죽는다 이것이지.'

기념사업회측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누구보다 일본군을 더 미워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이인수(이승만기념사업회 상임고문) : '이땅에 일본인들이 오게 되면 공산당에 겨누었던 총을 그놈들한테 먼저 겨누겠다고 그러셨거든요.'

KBS가 보도한 야마구치현 기록은 망명정부 요청이 전쟁 초기 상황으로 묘사돼 있을뿐 보도에서 나온 6월 27일이란 날짜는 없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KBS 뉴스 송창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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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戰 65주년 맞아 KBS가 내어놓은 악랄한 誤報
이등박문을 배출한 야마구치 현의 미확인 자료를 근거로 이승만이 망명 요청하였다고 단정! 사장과 보도관계자 문책해야.
趙甲濟

反국가적, 反저널리즘적 왜곡의 본산이 되어버린 KBS가 일본의 일개 縣(현)의 검증도 안 된 자료에 근거, 李承晩 건국 대통령을 비방하는 엄청난 오보를 하였다. 그것도 6·25 남침 전쟁 65주년을 맞아서. 親北反美 성향의 좌경 선동 매체들이 오늘 KBS의 이 오보를 열심히 퍼나르고 있다. 

KBS는 어제 <“이승만 정부, 일본 망명 요청설” 사실이었다!>고 단정하는 보도를 내보냈다. 이를 뒷받침한다고 내어놓은 자료가 한국과 미국과 일본 정부의 공식문서도 아니고 당시 主權도 없던 일본의 일개 현 자료이다. 

<야마구치현의 역사를 기록한 `야마구치 현사'에서 1950년의 기록을 살펴봤습니다. 당시 '다나카 타쓰오' 야마구치현 지사는 한국전쟁 발생 이틀 뒤인 6월 27일, 외무성을 통해 '한국 정부가 6만 명의 망명정권을 야마구치현에 세우고 싶어한다'는 전보를 받았다고 적혀있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확인하는 과정에서 교토의 한 대학에 있는 '재일교포 3세'인 교수님이 한국전쟁 당시 이 문제와 관련한 미국 공문서보관소의 '미 군정 문서' 마이크로 필름을 소장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교토로 달려갔습니다. 이 문서는 한국전쟁 발생 열흘쯤 뒤인 1950년 7월7일의 기록이었습니다. 야마구치현의 '다나카' 지사는 일본 츄고쿠 지역 5개 현 지사 회의에 참석한 자리에서 '한국인 5만 명 수용 계획'을 발표합니다.>

KBS가 李承晩 대통령이 정부의 망명을 요청하였다고 단정한 근거는 위의 두 자료뿐이다. 일본 외무성의 자료도 아니고 '외무성이 카더라'는 자료이다. 외무성의 그런 전보가 實在(실재)하는지, 있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이 사실인지를 확인도 하지 않고 李 대통령을 폄하하는 근거로 제시하였다. 

당시 일본은 주권이 없었다. 맥아더의 軍政(군정) 통치를 받고 있었다. '외교의 귀신'인 李承晩 대통령이, 더구나 맥아더와 절친한 사람이, 또 미군 측이 일본군을 한국전에 투입하여 도와주려고 했을 때, '그러면 우리는 총부리를 일본군에 돌리겠다'고 했던 위대한 독립운동 투사가 일본에 망명을 요청한다?

KBS가 이승만의 일본 망명 요청을 사실로 단정하려면 미국과 일본과 한국의 공문서를 찾아야 한다. 韓國戰 관련 공문서는 거의 공개되었다. 수십 명, 수백 명의 韓國戰 전문가들이 수많은 논문과 책을 썼지만 그런 자료는 찾지 못하였다. 

망명 정부 수립은 李承晩 대통령이 맥아더 극동군사령관에게 공식 요청을 하고, 맥아더가 일본 외무성에 지시를 내려야 할 사안이다. 그런 의사결정 과정에 대한 취재도 자료도 없이 일개 현, 그것도 이등박문 등 한국 침략의 인맥을 배출한 현의 자료를 근거로 건국 대통령을 욕보인 KBS의 사장과 보도관계자들을 문책해야 할 것이다. 언론인 자격도, 대한민국 국민 자격도 없다. 

이 기사의 오보 여부는 더 따질 필요도 없다. 제시한 자료의 신뢰성이 보장되지 않는 데다가 기자가 국가적 차원의 의사결정 과정에 대한 취재를 하지 않은 채, 즉 사실을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외국의 한 지방 자료를 근거로 자기 나라 대통령을 욕보이는 방향으로 단정을 하였기에 기사문장론적으로 이미 오보인 것이다. 미국이, 유사시의 대비책 수준에서 한국이 공산화된 후 이승만 정부를 제주도 등으로 옮기는 시나리오를 검토한 적은 있으나 李承晩 정부가 일본에 망명을 요청하였다는 KBS의 주장은 공상소설로서도 맞지 않는 터무니 없는 오보이다. 

하필이면 한반도 침략 인맥의 본거지인 야마구치 縣의 자료를 침소봉대하는가? 최소한 한국 외교부의 논평을 구해야 하는 것 아닌가? KBS는 야마구치 현의 자료를 대한민국 정부보다 더 존중하는가? 反共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기초를 놓은 李承晩을 비방하기 위해서는 언론의 윤리도, 민족적 자존심도 내팽개치는 KBS의 저의는 무엇인가? KBS는 '국민의 방송'인가, 아니면 진짜 친일파인가? 

KBS는 오보를 근거로 하여 이승만을 욕하는 논평으로 기사를 마무리한다. 
<한국전쟁 발생 직전, 이승만 정부가 한반도와 주변 정세에 얼마나 어두웠는지, 한국전쟁 발생 직후 이승만 정부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야마구치 현의 대처를 칭찬한다.
<패전의 상처를 극복하지도 못한 일본의 한 지방정부인 야마구치현이 이렇게 한국 관련 문제에 정통하고 발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정보실'이라는 별도 기구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위대한 건국 전쟁 지도자를 폄하하기 위하여 일본을 美化하는 것이다. 

낙동강 방어전이 절정에 달하였던 1950년 8월14일자 프란체스카 日記를 소개한다. 
<무초 대사는 “대구가 적군의 공격권 안에 들어갔다”면서 “정부를 제주도로 옮길 것”을 건의했다. 그의 주장은 제주도가 적의 공격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최악의 경우 남한 육지의 전부가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갈 경우 ‘망명정부(亡命政府)’를 지속시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무초가 한참 열을 올려 이야기하고 있을 때 대통령이 슬그머니 허리춤에서 모젤 권총을 꺼내들었다. 순간 무초는 입이 얼어 버렸고 얼굴색이 하얗게 질렸다. 나도 깜짝 놀랐다. 미국에서 살 때 고속도로 순찰 오토바이를 따돌리고 과속으로 달릴 때 가슴이 떨린 이후 이렇게 놀란 적이 없었다.

대통령은 권총을 아래 위로 흔들면서 “공산당이 내 앞까지 오면 이 총으로 내 처를 쏘고 적을 죽이고 나머지 한 알로 나를 쏠 것이오. 우리는 정부를 한반도 밖으로 옮길 생각이 없소. 모두 총궐기하여 싸울 것이오. 결코 도망가지 않겠소”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대통령이 권총으로 무슨 일을 벌일 것은 아니었지만 긴장한 무초 대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돌아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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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보도문

[디·퍼 / 단독] “이승만 정부, 일본 망명 요청설” 사실이었다!
  •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前 대통령의 행동에 대해 역사적 논란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일본 망명 요청설'인데요,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정부는 실제로 일본에 망명 요청을 했을까? 

    ■ 이승만 前 대통령 ‘일본 망명 요청설’
    한국전쟁 발생 직후 불과 사흘 만에 서울이 점령당하는 등 다급한 상황이라, 당시 한국 정부의 공식 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실 확인을 위해 `망명 지역'으로 거론됐던 일본 야마구치 현청의 도서관을 찾았습니다.
    야마구치현의 역사를 기록한 `야마구치 현사'에서 1950년의 기록을 살펴봤습니다.

    당시 `다나카 타쓰오' 야마구치현 지사는 한국전쟁 발생 이틀 뒤인 6월 27일, 외무성을 통해 '한국 정부가 6만 명의 망명정권을 야마구치현에 세우고 싶어한다'는 전보를 받았다고 적혀있습니다.

    이에 대해, `다나카' 지사는 현재 지역 주민들에게도 배급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고 있는 등 식량 문제가 심각하다며, `한국인 망명' 수용에 반대 의사를 밝혔습니다.

    ■ 일 “한국인 5만 명 수용” 계획

    `한국인 망명'에 대한 조금 더 정확한 공식 기록은 없을까?

    여러 사람에게 확인하는 과정에서 교토의 한 대학에 있는 `재일교포 3세'인 교수님이 한국전쟁 당시 이 문제와 관련한 미국 공문서보관소의 `미 군정 문서' 마이크로 필름을 소장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교토로 달려갔습니다.

    이 문서는 한국전쟁 발생 열흘쯤 뒤인 1950년 7월7일의 기록이었습니다.
    야마구치현의 `다나카' 지사는 일본 츄고쿠 지역 5개 현 지사 회의에 참석한 자리에서 `한국인 5만 명 수용 계획'을 발표합니다.
    `다나카' 지사는 영문으로 된 `비상 조치 계획'이란 제목의 이 보고서에서 야마구치현 아부 등 4개 자치단체에 20개의 피난 캠프와 마을을 만들고 임시 막사 1곳에 200명씩, 모두 250개 막사에 5만 명을 수용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 보고서에는 병실 등 의료시설과 위생시설, 식량지원 등의 내용도 포함돼 있습니다.
    야마구치현은 이 영문 보고서를 당시 미 군정에 제출하고, 예산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 일본은 ‘조선정보실’…이승만 정부는 ‘깜깜이’

    당시 식량부족으로 배급을 받는 등 패전의 상처를 극복하지도 못한 일본의 한 지방정부인 야마구치현이 이렇게 한국 관련 문제에 정통하고 발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정보실'이라는 별도 기구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조선정보실'에서는 일제 강점기때 조선총독부나 경찰로 한국에서 근무했던 한국말이 유창한 일본인을 특별 채용했는데, 한국의 라디오방송 등을 매일 청취하고, 야마구치 지역의 재일한국인들을 만나 한국 관련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이들은 이 정보를 모아 `조선정보'라는 문건을 만들어 일본 총리와 내각 각료들에게 수시로 보고를 했습니다.

    한국전쟁 발생 이틀 전인 6월 23일에도 야마구치현 지사가 `북한이 남침할 위험성이 매우 높다며 대책이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일본 총리에게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야마구치현의 `다나카' 지사는 한국이 북한과 중국,소련 등 공산주의 세력의 `1차 저지선'이고, 야마구치현은 일본 본토의 `방파제'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고 한반도 정세 변화를 꼼꼼하게 확인했습니다. 

    이 `한국인 피난 캠프' 계획이 어느 정도까지 진행됐는지 다른 문서를 더 찾아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승만 정부의 `일본 망명'도 인천상륙작전 등으로 전쟁의 양상이 완전히 바뀌면서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국전쟁 발생 직전, 이승만 정부가 한반도와 주변 정세에 얼마나 어두웠는지, 한국전쟁 발생 직후 이승만 정부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