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BS “이승만, ‘6월27일 일본 망명 타진’” 기사의 날짜 조작 의혹

    뉴스 소스인 당시 야마구치縣 지사의 증언대로라면,
    '외무성 전보'는 6월27일일 수가 없고 8월이어야.
    이승만을 비겁한 도망자로 몰기 위하여 날짜 조작?
    6월27일에 이승만은 장면 대사 통해 트루먼 대통령에게 결사항전과 무기 지원 호소
    .

    趙成豪(조갑제닷컴)   

    <조갑제닷컴>은 ‘이승만 정부가 6·25전쟁 직후 日 정부에 망명을 요청했다’는
    KBS 뉴스(6월24일)를 검증해보았다.

    KBS 뉴스는, <[단독] “이승만 정부, 한국전쟁 발발 직후 日 망명 타진>이란 기사를
    지난 6월24일~28일 간 여섯 번, 제목만 바꿔 뉴스에 내보냈다(KBS 홈페이지 기준). 

    《야마구치 縣史》 인용하면서 쓴 '6월27일'

    보도의 요지는, ‘6·25전쟁 직후 다나카 타쓰오(田中龍夫) 당시 야마구치縣 지사가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1950년 6월27일에, 한국 정부가 6만 명의 망명정권을 야마구치縣에 세우고 싶어한다’는 電報(전보)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 기사를 전하며 KBS 박재우 기자(現 도쿄 특파원)는 ‘한국전쟁 발발 직전, 이승만 정부가 한반도와 주변 정세에 매우 어두웠다’는 요지의 비판 멘트도 덧붙였다.

    KBS 뉴스는, 일본 《야마구치 縣史(현사)》에 수록된 내용을 근거로 내세웠다.
     KBS는 보도화면에서 《야마구치 縣史》의 관련 紙面(지면)을 캡처한 뒤 확대, ‘6월27일’이란 날짜를 붙였다(하단의 사진 참조).
  • 사진설명: KBS 뉴스 화면 캡처. 日 외무성이 야마구치현 지사에게 전보를 보낸 날짜라며 
    1950. 6. 27이라고 삽입했다.

    이 같은 보도가 나가자, KBS에 대한 비판 여론이 일었다.
    ‘일본의 일개 縣이 내놓은 자료가 과연 신빙성이 있느냐’,
    ‘한국과 미국 측의 공신력 있는 외교문서에선 (日 망명 타진 사실이) 발견되지 않았다’,
     ‘당시 美 군정 下에 있던 일본은 主權(주권)이 없는 상태였는데, 어떻게 이를 사실로 단정할 수
    있느냐’, ‘위대한 독립투사 이승만 대통령은 자위대가 투입되면 총부리를 돌리겠다고 한 사람인데, 국군이 인민군의 南侵(남침)을 저지, 死鬪하고 있는 순간에 일본에 망명을 타진했다는 것은
    공상소설 수준도 안된다’, ‘이런 방송 하라고 KBS에 시청료 내나’라는 반응이 이어졌다.

    《야마구치 縣史》엔 날짜 안 나와

    <조갑제닷컴>은, 야마구치현 知事(지사)가 日 외무성으로부터 電報(전보)를 받았다는 6월27일이란 날짜에 주목, 이 핵심적 내용이 사일인지 확인해보았다.

    먼저 KBS 뉴스 보도 내용이다.
    <당시 다나카 타쓰오 야마구치현 지사는 한국전쟁 발생 이틀 뒤인 6월27일, 외무성을 통해
    “한국 정부가 6만 명의 망명정권을 야마구치현에 세우고 싶어한다”는 전보를 받았다고 적혀 있습니다.> (6월24일字 최초 보도 中) 

    날짜가 중요한 이유는, 이승만 정부가 국토를 死守(사수)하겠단 의지 없이 전쟁 발발 불과 이틀
    만에 곧바로 亡命정부 수립을, 그것도 일본에 요청했다는 보도에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KBS 뉴스는 6월25일字 보도에선 아예 “이승만 정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일본 망명 타진”이란 제목으로 이를 사실로 단정하기도 했다.

    KBS 뉴스가 인용한 《야마구치 縣史 史料篇 現代 2》 25페이지에 실린 관련 대목을 찾을 수 있었다. 2010년 5월, 鄭祐宗(정우종·당시 오사카 대학교 대학원 문학연구과 박사後 과정)이 쓴 <식민지 지배체제와 분단체제의 모순의 전개>란 논문에서 발견한 것인데, 그는 이 논문 7페이지에서
    위의 책(《야마구치 縣史》)을 인용했다. 그런데 KBS 뉴스 보도와 달리 날짜가 明記(명기)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문제의 외무성 전보는 정황상 6월27일일 수가 없다.

    <…釜山の北のね,洛東江の川の所まで北朝鮮軍 ママが来てね。それで,このまま行ったならば,釜山は第二のダンケルクになると。そういった時にどうするかという問題ですが,外務省の方から電報が入ってね,韓国政府は六万人の亡命政権を山口県に作るということを希望しとると。(※ 굵게 처리한 부분이 KBS 뉴스가 인용한 대목. 위의 사진 참조)
    …북한군이 부산의 북쪽, 낙동강까지 진격해 들어왔어요. 이대로 가면 부산이 ‘제2의 덩케르크’(注: 프랑스의 해안 도시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르덴 숲 지대를 돌파한 독일군에 포위당한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영국으로 탈출한 곳)가 될 수 있는데,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문제인데, 외무성으로부터 電報(전보)가 들어와서 한국 정부가 6만 명의 망명정권을 야마구치縣에 만들길 희망하고 있다고 했어요.>

    다나카 야마구치縣 대사의 증언(대화체) 형태로 되어 있는 이 대목을 보았을 때, 日 외무성이 야마구치縣에 망명정권을 타진한 시기는 1950년 6월27일이 아니라 낙동강 방어전이 한창이던 8월로 보인다. 

    KBS 뉴스가 삽입한 ‘6월27일’은 사실인가?

    記者는 KBS가 사실로 단정한 ‘6월27일 망명타진'을 부정하는 복수의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일본 방위연구소 戰史연구센터 홈페이지에 게재된 쇼지 준이치로(庄司 潤一郎) 씨의 논문, <조선전쟁과 일본의 대응 -야마구치縣을 사례로->였다. 이 논문 45페이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① 戦局の方は、国連軍の劣勢が続き、北朝鮮軍は、6月28日にはソウルに入城、韓国政府は首都を大田、大邱さらに釜山に移転、8月下旬には洛東江を渡河した北朝鮮軍は、韓国の大半を制圧し、釜山の前面にまで達したのである。② その頃、外務省から、「韓国政府は、6万人の亡命政権を山口県に作るということを希望している」との電報が入り、それらの施設、宿舎等遺漏なきようにということであった。>

    ①번 문단을 요약하면, <북한군이 6월28일(注: 1950년) 서울에 入城(입성), 한국 정부는 수도를 대전을 거쳐 대구, 부산으로 이전했으며 8월 하순 경 북한군은 낙동강을 渡河(도하)해 부산 前面(전면)에 다다랐다>는 것이다.

    ②번 문단을 시작하면서 쓴 ‘その頃’은 우리말로 ‘그 즈음’이란 뜻이다. 이 단어 바로 뒤에《야마구치 縣史》에 실렸던, 당시 지사가 외무성으로부터 電報를 받았다는 내용(「韓国政府は、6万人の亡命政権を山口県に作るということを希望している」)이 나온다. 즉, 다나카 知事는 6월27일이 아닌 8월 하순 경 외무성으로부터 電報(전보)를 받았다는 이야기이다. 이 역시 KBS 뉴스는 전보가 보내진 상황을 설명하지 않고(그렇게 하면 6월27일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니까?) 6월27일이라는 날짜를 끼워넣어 이승만 대통령이 敵과 싸우지도 않고, 국민과 국군을 버리고 일본으로 도망가려 했다는 인상을 주려 한 게 아닌가 의심이 든다.

    무초 대사가 電文을 보낸 날짜가 '6월27일'

    사실 ‘이승만 정부의 日 망명설’은 1996년 4월, 이미 중앙 일간지가 보도한 바 있어 KBS의 단독 보도(혹은 특종) 주장은 과장이다. 같은 해 4월14일字 <경향신문>은 교도통신을 인용, ‘6·25때 한국 망명정부 日 야마구치縣에 구상’이란 題下(제하)의 기사를 내보냈었다.

  • 사진설명: <경향신문> 1996년 4월14일자. 다나카 지사가 日 외무성으로부터 망명정부 준비 지시를 받은 시점이 '9월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했을 무렵'이라고 나온다.

    당시 이 매체는 다나카 타스오 야마구치縣 지사의 회고록을 인용해, “북한군의 남침으로 부산 가까운 곳까지 점령당하고 유엔군이 9월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했을 무렵, 중앙(注: 日 외무성을 지칭하는 듯)으로부터 ‘한국 정부가 야마구치縣에 망명을 희망하고 있으니 긴급히 6만 명 분의 宿舍(숙사)와 기타 만반의 사항을 지시하라’는 준비가 있었다”고 전했다. 이 역시 KBS 뉴스가 보도한 ‘6월27일 망명 타진’을 부정하는 내용이다. 

    이런 舊聞(구문)을 특종인 것처럼 서둘러 보도한 데 대해 많은 애국인사들은,
    ‘김일성의 남침전쟁 발발 65주년에 즈음하여 위대한 전쟁 지도자 이승만을 욕보여
    한국 현대사를 부정적으로 가르치도록 하려는 음모’라고 본다.  

    <경향신문> 보도를 보면,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미국 외교관계》란 책을 인용해 주한 美 대사가 美 국무장관에게 타전한 내용을 소개한 부분이다. 당시 주한 美 대사는 무초였다.
    그가 한국의 망명정부 수립 계획과 관련해 美 국무부에 타전한 電文을 국무부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무초 대사가 국무부에 타전한 날짜는 1950년 6월27일(한국 시각)이었다.
    그 全文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Seoul, June 27, 1950-8 a.m. [Received June 26, 6:54 p.m.]
    967. Acting PriMin visited me 7 a.m. Confirmed President had left at 3 p.m. heading for Chinhae and Cabinet at 7 a.m. for south both travelling by special trains.
    Capt. Sihn says fight will be all over by this afternoon, in meantime has turned over full authority to chief Army Staff Chae Pyong Tuk and radioed people to remain indoors and calm when tanks arrive. He says he will stay in Seoul with Army command to end. He despaired of saving anything and inquired possibility President and Cabinet moving to Japan as “government in exile.” I made no commitment. 
    Repeated information CINCFE.

    국무총리 서리가 오전 7시에 나를 찾아와 대통령은 새벽 3시에 진해를 향해 그리고 내각은 7시에 남쪽 지방을 향해 특별 열차를 타고 떠났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신성모(注: 당시 국방장관)는 전투가 6월27일 오후 경에 종료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全權을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에게 위임했으며, 북한군 전차가 서울에 도착하는 경우 문을 닫고 집에 조용히 있으라고 국민들에게 방송했다고 말했다. 신성모는 육군 지휘부와 함께 최후까지 서울에 잔류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고자 하는 심정이었고, 신성모는 이승만 대통령과 내각을 일본에 망명정부로 세울 수 있는지 여부를 내게 타진했다. 이에 대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각에선 이 電文(전문)을 타전한 날짜 때문에 ‘6월27일로 와전된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 자료가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에 망명정부를 타진했다는 근거가 될 순 없다.
    國軍 통수권자인 이승만 대통령의 입장이 電文에 나와 있지 않으므로, 신성모가 개인적 차원에서 절박한 심정으로 무초 대사에게 망명정부 가능성을 타진한 것으로 봐야 한다.
    게다가 무초 대사는 신성모의 이 같은 제안에 침묵,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우리 정부가, 대통령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일본에 망명정부 수립을 요청한 공식 자료가
    美 국무부나 日 외무성 문서에서 발견되지 않은 이상, ‘이승만 정부가 일본에 망명정부 수립을
    계획했다’는 일본인의 주장을 사실로 단정한 것은 명백한 誤報(오보)이다. 

    張勉 대사, 트루먼 대통령에게 '결사항전' 의지 피력

    낙동강까지 국군과 미군이 밀렸을 때 美軍은 비상계획으로 한국 정부를 일본이 아니라 제주도로 옮기는 문제를 검토한 적은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계획도 반대했다. 아래는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日記이다. 낙동강 방어전이 절정에 달했던 1950년 8월14일에 쓴 것이다.
     
    <무초 대사는 “대구가 敵軍의 공격권 안에 들어갔다”면서 “정부를 제주도로 옮길 것”을 건의했다. 그의 주장은 제주도가 적의 공격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최악의 경우 남한 육지의 전부가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갈 경우 ‘亡命政府(망명정부)’를 지속시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무초가 한참 열을 올려 이야기하고 있을 때 대통령이 슬그머니 허리춤에서 모젤 권총을 꺼내들었다. 순간 무초는 입이 얼어 버렸고 얼굴색이 하얗게 질렸다. 나도 깜짝 놀랐다. 미국에서 살 때 고속도로 순찰 오토바이를 따돌리고 과속으로 달릴 때 가슴이 떨린 이후 이렇게 놀란 적이 없었다.   
    대통령은 권총을 아래 위로 흔들면서 “공산당이 내 앞까지 오면 이 총으로 내 처를 쏘고 적을 죽이고 나머지 한 알로 나를 쏠 것이오. 우리는 정부를 한반도 밖으로 옮길 생각이 없소. 모두 총궐기하여 싸울 것이오. 결코 도망가지 않겠소”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대통령이 권총으로 무슨 일을 벌일 것은 아니었지만 긴장한 무초 대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혼비백산하여 돌아갔다.>

    KBS의 6월27일 망명 타진 주장이 오보임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은 워싱턴 시간으로 1950년 6월26일(한국 시각 6월27일)에 있었던, 張勉(장면) 駐美대사의 트루먼 대통령 면담 기록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에 의해 미국 대통령을 만난 장면 대사는, 망명신청은커녕 결사항전의 의지를 전하고, 무기를 지원해줄 것을 간곡히 호소한다. 

    張 대사는 한국 국회의 抗戰(항전)의지와 지원 호소를 담은 결의문도 함께 전달했다.
    대사는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세 번이나 전화를 받았습니다. 한국군은 대포, 탱크, 전투기가
    부족하다면서 지원을 간청했으나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라고 했다.
    트루먼은 “맥아더 사령관에게 이미 무기와 탄약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면서
    “전투는 겨우 48시간이 경과했을 뿐이다. 다른 나라들은 더 어려운 상황에서 그들의 자유를 지켜내고 종국엔 승리하였다”고 위로하였다. 張 대사는 “군인들은 용감하지만 적절한 무기가 없다”고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으로 망명하고 싶었더라면, 장면 대사를 통해 바로 그 자리에서 트루먼 대통령에게 건의했어야 했다. 美 극동군 사령부가 다스리고 있던 일본이므로 일본 정부에 타진하기 전에 일본의 主權을 장악한 미국 대통령에게 말했어야 했다. 장면 대사는 결사항전의 의지를 피력하고, 미국의 도움을 절박하게 호소하고 있을 뿐이다.
    KBS는 이 최고급 정부 문서를, 야마구치 지사의 잡담 비슷한 이야기(그것도 외무성 電報의 날짜를 8월이 아닌 6월27일로 조작했다는 의혹이 강하다)로 부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지난 6월29일, 記者는 6월27일의 근거를 묻는 질문지(公文)를 KBS 박재우 기자에게 이메일로 보내 답변을 요청했으나 7월2일 오전 현재 아무 연락이 없는 상태다. ●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