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만 대통령이 피난을 떠나지 않았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북한, 이시영 부통령에게 공작원 보내 서울 잔류 권유...
    이승만의 피난 덕분에 대한민국이 살았다

    배진영 /월간 조선 차장

    이승만 대통령은 6·25 발발 이틀 후인 6월27일 새벽 네 시, 서울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다. 이 일은 두고두고 이승만 대통령을 비난하는 빌미가 되어왔다. '서울시민들에게 안심하라고 해 놓고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쳤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이승만 대통령은 조선 선조나, 세월호 선장 이준석에 비유하는 자들도 있다.

    최근에는 한술 더 떠서 '이승만이 일본으로 도망치려 했다'는 소리를 하는 자도 나왔다. KBS는 6·25를 하루 앞둔 지난 6월24일 <‘이승만 정부, 일본 망명 요청설’ 사실이었다!>는 보도를 내보냈다. 그런데 그 근거자료가 허탈하다. 달랑 야마구치현의 역사를 기록한 <야마구치 현사> 중 1950년의 기록과 한 교포3세 교수가 소장하고 있다는 ‘미 군정문서’두 가지다.

    <야마구치현사>는 당시 “다나카 타쓰오 야마구치현 지사는 한국전쟁 발생 이틀 뒤인 6월 27일, 외무성을 통해 '한국 정부가 6만 명의 망명정권을 야마구치현에 세우고 싶어한다'는 전보를 받았다”는 내용을, ‘미 군정문서’는 “야마구치현의 `다나카' 지사는 일본 츄고쿠 지역 5개 현 지사 회의에 참석한 자리에서 `한국인 5만 명 수용 계획'을 발표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승만 정부, 일본 망명설’의 근거라고 제시한 것이, 당시 일본을 통치했던 맥아더사령부(연합군최고사령부)나 일본 외무성의 문서가 아니라, 일개 지방정부의 문서라는 점도 미심쩍거니와, ‘미 군정문서’를 소장하고 있다는 사람을 “교토의 한 대학에 있는 `재일교포 3세'인 교수님”이라고만 밝힌 것도 수상쩍다. 그런 역사적 문서를 밝혀낸 분의 이름과 소속대학을 KBS는 왜 밝히지 못하는 걸까?

    하여튼 KBS 보도 내용은 인터넷 매체나 좌파 언론 등을 통해 계속 확산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을 임진왜란 때 도망친 선조나 세월호 이준석 선장에 비유하는 자들도 나오고 있다. 6·25를 앞두고 그런 보도를 내보낸 KBS의 저의가 심히 의심스럽다. KBS보도의 문제점 등에 대해서는 조갑제 전 월간조선 편집장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밝혔으므로 더 이상 재론하지 않겠다.

<이종찬 前 국정원장의 회고>

그럼 여기서 한번 생각해 보자. 이승만 대통령이 피난을 떠나지 않았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월간조선> 2010년 6월호 부록 <60년 전, 6.25는 이랬다>에 실린, 이종찬 전 국정원장의 회고를 보면 흥미로운 얘기가 나온다.

<전쟁 상황은 급속히 악화되었다. 삽시간에 의정부 방어선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우리 앞집에 사는 주민은 월남가족이었다. 이북 사정을 훤히 알고 있어서 벌써 보따리를 싸기 시작했다. 나는 막강한 국군이 패퇴하리라고 믿지 않으면서도 주변이 뒤숭숭함을 느꼈다. 27일 저녁 일가들은 모두 무교동 규열(圭悅) 숙부님 댁에 묵고 있는 부통령 할아버님 곁으로 모여들었다. 무슨 연락 받고 온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어떻게 되어 가는 것입니까?” 하는 정황을 파악하러 모인 것이다. 그날 궂은 비는 오고 황량한 밤이었다.

할아버님은 드디어 결심을 하신 듯 비장하게 한 말씀을 하셨다.

“내 평생 이 나라를 위하여 분투노력했을 뿐 나쁜 일 한 것 없다. 내 나름 부끄럽게 살지 않으려 애써 왔다고 자부한다. 현재 대통령의 행방은 모르겠고, 서울이 이제 위기에 처해 있는데 국민을 놔둔 채 나마저 일신상의 안위를 위해 피란을 하면 국민들이 이 정부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임란(壬辰倭亂) 때 백성들이 정부를 원망한 것을 생각하면 정신 차려야겠다. 그러니 나는 여기서 사수하겠다. 너희도 남겠으면 남고 또 난을 피하겠으면 가도 좋다.”

이 말씀을 끝으로 그 어른은 침소로 들어가셨다. 나는 아버님을 모시고 공덕동의 집으로 향했다. 비는 계속 오고, 집으로 오는 길에 보니 시민들은 계속해서 한강 쪽으로 가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생전 처음 나는 전쟁이란 이런 것인가 실감했다.

<‘공화국 정부’ 사람이 성재 할아버지 찾아>

다음 날인 6월 28일 아침, 길에 나가 보니 세상이 바뀌었다. 인공기가 휘날리고 탱크가 서대문 로터리에서 계속 몰려들고 있지 않은가? 나는 즉시 작은형님과 함께 무교동 숙부님 댁으로 갔다. 부통령 할아버님이 궁금해서였다. 그런데 집이 텅 비어 있었다. 10시쯤 되니 당숙 되시는 내외분이 오셨다. 역시 집이 비어 있는데 그분들도 놀라는 것이었다.

“아니 사수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조금 있으니 파나마 모자(원래 파나마 풀의 어린 잎 섬유를 소재로 하여 손으로 짜서 만든 모자. 가볍고 통기성이 좋은 여름 모자)를 쓴 신사 한 분이 찾아왔다.

“선생님 어디 가셨지요?”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다.

부엌 뒷방에 있던 아주머니가 부엌문을 열고 나오셨다.

“어젯밤에 다 떠나셨어요.”

아! 그런데 이 파나마 모자 쓰신 분이 하는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아니 내가 분명히 선생님은 계셔야 한다고 말씀드렸고 또 나와 약속을 했는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주 낭패한 그런 표정이었다. 당숙께서 그분에게 다가가 “저는 이 댁 일가인데 실례지만 어디서 오셨습니까?”

“저는 중국 상하이에서부터 성재장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존경해 왔습니다. 그래서 어제도 잠시 뵙고, 꼭 서울에 남으셔서 이 전쟁의 뒷수습을 하셔야 한다고 말씀드렸지요.”

“아! 그랬어요. 저희도 어젯밤에 꼭 사수하시겠다는 말씀 듣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어디로 가셨습니까?”

“모르지요. 우리도 궁금해서 왔습니다. 실례지만….”

파나마 모자는 대답도 않고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하여간 연락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공화국정부는 선생님과 대화를 하여야 합니다. 제가 다시 들르겠습니다.”

그리고 총총히 사라졌다. 눈치 빠른 형님이 금세 알아차렸다.

“저 사람은 북에서 온 사람이야. 아마 중국의 연안파에서 활동한 사람이 분명해.”

그제야 당숙님도 멍하다가 정신이 든 모양이다. “그래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경호실장, 수원의 친구가 내려오란다고 말해 省齋 피신시켜>

나는 이날 내가 본 광경을 상당히 오랫동안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9·28 수복 후에 다시 한 번 6월 27일 밤과 28일 아침에 벌어졌던 일들을 당시 수행했던 비서관들의 말을 정리하여 복기(復碁)해 봤다.

6월 27일 국회는 ‘서울 사수결의’를 했다. 정부는 아무런 전황(戰況)정보를 국회에 제공하지 않았다. 그래서 국회는 이런 우직한 결의를 한 것이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상황이 위급해짐을 가장 먼저 알고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고 남하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민심의 동요가 없도록 대비하기 위하여 ‘국민에게 보내는 담화’를 녹음으로 준비해 놓고 피신했다. 정보에 어두운 것은 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성재 할아버님은 서울시민을 놔두고 떠날 수 없다고 고집하면서 홀로 남아서라도 수도를 사수하겠다고 버틴 것이다.

6월 27일 밤 일가들을 보내고 침소에 들어가서 잠을 청했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고 창밖을 보니 마치 나라를 삼킬 듯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장대 같은 빗줄기만 보였고, 지금까지 살아 온 험난한 역정과 더 어려워질 나라의 앞날이 시름을 더해 주었다.

당시 부통령 경호실장으로 임태순(任泰淳) 경감이란 분이 있었는데 세상물정에 밝고 상당히 유능한 분이셨다. 여러 차례 할아버님께 남하를 권고했으나 막무가내였다. “내게 잘못 있다면 독립 운동한 잘못밖에 없는데 누가 온들 나에게 무엇이라 하겠느냐?” 단호하셨다.

비는 억수같이 내리고 천둥번개까지 동반한 암담한 밤이었다. 마침 천장이 부실해서 방 안으로 빗물이 새어 들어왔다. 걸레로 닦고, 대야를 갖다 놓는 등 소동이 났다. 이 틈을 이용하여 임태순 경감이 침소로 들어가 다시 할아버님을 깨웠다.

“비가 새고 한강 물이 불 것 같다고, 수원에 계신 홍 선생님께서 ‘잠시 오셔서 휴식을 취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전화를 하셨습니다. 지금 옮기시는 것이 좋겠습니다”고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물론 아드님과는 사전에 짜고 한 말이다.

<‘공화국 정부’ 사람은 북한의 사전 침투조>

홍 선생이란 수원에 사는 할아버님의 유일한 지기지우인데 그분은 고가(古家)를 수리하여 큰 집을 지니고 계시면서 평소에도 할아버님을 그 댁 사랑으로 모시고 더불어 한시(漢詩)를 나누시면서 교유(交遊)하던 분이었다. 할아버님은 이분과 시간을 보내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생각하셨다. 이런 임 총경의 꾀에 넘어가셨다. 할아버님도 비가 새서 모두가 뜬 눈으로 있는 것이 약간 불안하였는지 그러자며 당장 갈아입을 옷만 챙겨서 부랴부랴 떠나셨다. 그런데 할아버님이 한강을 건너자마자 인도교가 폭파되었다. 참으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찾아온 파나마 모자 쓴 분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으로, 과거 신흥무관학교도 나왔고, 의열단 활동도 했으며 한때 중경과 연안을 드나들며 임정(臨政)요인들과 조선 혁명당 간부들 사이에 연락업무를 해오던 사람인데 그 후 북한 정권 수립에 가담했고 6·25동란 직전 북에서 파견하여 사전 작업하기 위하여 침투활동 중인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 사람이 중국 망명시대에도 성재 할아버님을 만났던 인연으로 자기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대통령 부재 중에 부통령이라도 서울을 사수하여야 한다고 바람을 잡고 할아버님의 피란을 극구 방해했던 것이다. 그는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이후 할아버님을 앞세워 일을 벌이려 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아마 그 때문에 다음 날, 할아버님을 놓치게 되자 조바심을 냈던 것 같다.

나는 또 그 연장선에서 상상해 봤다. 만약 성재 할아버님이 순전히 애국적인 입장에서 서울을 사수하였다면 서울이 점령당한 후 파나마 모자 같은 북의 공작원이 틀림없이 모셔 갔을 것이다. 그리고 북을 대표하는 김일성이나 김두봉 - 특히 김두봉은 중국 혁명시대 동지였다 - 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부통령이 회담을 통하여 어떤 불리한 결정을 하게 되었다면 이 전쟁 상황은 어떻게 변질되어 발전되었을까? 틀림없이 북은 남쪽의 부통령이 항복했다고 선전했을 것이요, 그 순간 대한민국은 침몰되었거나 흡수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하여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임태순 경감이 할아버님만 살린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살린 것이다.>

<이승만이 피난하지 않았으면…>

이종찬 전 국정원장의 회고는, 군데군데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내비치고는 있지만,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示唆)해 준다.
“만약 성재 할아버님이 순전히 애국적인 입장에서 서울을 사수하였다면 서울이 점령당한 후 파나마 모자 같은 북의 공작원이 틀림없이 모셔 갔을 것이다. 그리고 북을 대표하는 김일성이나 김두봉 - 특히 김두봉은 중국 혁명시대 동지였다 - 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부통령이 회담을 통하여 어떤 불리한 결정을 하게 되었다면 이 전쟁 상황은 어떻게 변질되어 발전되었을까?
틀림없이 북은 남쪽의 부통령이 항복했다고 선전했을 것이요, 그 순간 대한민국은 침몰되었거나 흡수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등골이 오싹하게 만든다.

부통령이 적의 손에 들어갔어도 대한민국이 결딴났을 텐데,
만약 이승만 대통령이 적의 손에 사로잡혔을 경우에는 두 말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협박하거나 회유하여 대한민국의 국권을 포기하고 북한공산정권에 항복하도록 만들려 들었을 것이다. 아마 이승만 대통령은 죽기로 이를 거부했을 것이다.
그러면 북한은 이승만 대통령 명의로 국군과 국민들에게 “더 이상 저항을 포기하고, 통일을 이룩하자”는 내용의 거짓 성명을 내보냈을 것이다.

그때는 대한민국이 건국된 지 채 2년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정체성이 미처 형성되지 않았고,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에서 채 벗어나지 못했을 때였다. 월남민들을 제외하면 공산통치가 어떤 것인지 몰랐고, 지식인을 비롯해 많은 국민들이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을 때였다.

그런 상황에서 대통령의 항복성명이 나오면, 적에게 패퇴(敗退)하면서도 저항을 포기하지 않고 있던 국군은 힘이 빠져 총을 내려놓았을 것이고, 국민들도 북으로의 흡수통일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미국은 물론 유엔도 대한민국 정부가 저항을 포기하고 해체를 선언한 마당에 대한민국을 돕겠다고 군대를 파병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오래 전에 사라졌을 것이고, 우리는 지금 김씨왕조의 신민(臣民)으로 가난과 억압 속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자연인 이승만’의 피난이 아니라 國體보존을 위한 ‘정부의 이전’>

이승만 대통령은 단순히 자기 한 사람의 목숨을 건지려고 피난한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 정부’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헌법기관’인 대통령의 소재지를 안전한 곳으로 옮긴 것이다. ‘자연인 이승만’의 ‘피란’이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의 ‘이전’이었다. 일부 시행착오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군참전을 이끌어내고 전선을 찾아다니며 국군 장병을 격려하면서 ‘전시(戰時)대통령’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했다. 헌법에서 대통령에게 ‘국가를 보위’하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은, 대통령에게 소총수들처럼 총을 들고 나가서 적과 싸우다 죽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보전하라는 의미다. 그리고 그 결과로 대한민국을 보전했다. 대통령에게 이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는가?

<국군의 평양 입성 1주일 전에 도망친 김일성>

비록 대전으로, 대구로, 다시 부산으로 옮겼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망명’ 같은 것은 꿈도 꾸지 않았다. 이 대통령은 무초 주한미국대사가 “제주도로 가서 망명정부를 세우라”고 권고하자, 모젤 권총을 뽑아 흔들며 “우리는 정부를 한반도 밖으로 옮길 생각이 없다”고 해, 무초 대사를 혼비백산하게 만들기도 했다.

제주도에 망명정부를 세우라는 권고에도 그렇게 저항했던 이승만 대통령이, 평생 원수로 알았던 일본으로 도망가서 거기에 망명정부를 세우려 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다.

KBS의 보도가 나오자, 이승만 대통령을 임진왜란 당시의 선조나, 세월호의 이준석 선장에 비유하는 자들이 있다다. 이승만 대통령의 ‘도망’을 그렇게 비난하는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는 안 봐도 뻔하다. 이승만이 ‘도망’하는 바람에 적화통일의 기회를 놓친 것을 아쉬워하는 좌익들일 것이다. 그러면 그들에게 묻겠다. 김일성은 도망치지 않았느냐고? 김일성이 소련제 고급승용차 볼가를 타고 평양을 떠난 것은 국군이 평양에 입성하기 1주일 전인 10월12일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이 함락되기 하루 전인 6월27일 새벽 3시경 특별열차를 타고 서울을 떠났다. ‘특별열차’라니 대단해 보이지만, 좌석의 스프링이 튀어나와 있을 정도로 낡은 객차들을 급히 편성한 것이었다. 김일성은 청천강변에 이르러 자동차를 버리고 도망했는데, 이 차는 나중에 국군에게 노획되었다.

김일성은 자신이 평양을 떠나기 이미 열흘 전에 아들 김정일과 딸 김경희를 만주 창춘(長春)으로 피난을 보냈다. 김정일은 만주 길림학원에 입학, 1952년 말까지 2년 동안 초등학교 과정을 중국에서 공부했다.

<이승만을 선조에 비유하는 건 무식한 소리>

이승만 대통령을 임진왜란 때 한양을 버리고 파천(播遷)한 선조에 비유하는 자들도 있는데, 말은 바로 하자. 선조가 파천한 게 뭐가 잘못인가?

우리 역사에서 파천한 임금이 선조 하나가 아니었다. 고려 현종은 거란의 2차 침입 때에는 나주까지 피난했고, 공민왕은 홍건적이 쳐들어왔을 때 안동으로 피난했다. 그럼 대통령이나 임금이 적과 싸우다가 죽어서 나라가 망해야 옳겠나?

선조의 파천도 잘 한 일이다. 적의 수부(首府)를 점령하고 적의 우두머리를 사로잡거나 죽인 후 전쟁을 종결짓는 방식에 익숙해 있던 일본은 당황했다. 일본군은 선조를 따라 북상하면서 보급선이 길어졌고, 이순신의 수군이 해상보급선을 차단하면서 평양 이북으로 진격할 여력을 잃었다. 그 사이에 명군이 참전하고,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면서 전세가 역전되고 결국 나라를 보전할 수 있었다. 안 그랬으면 우리는 오늘날 일본국민으로 살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의주로 간 선조는 한때 명나라로 내부(內附)까지도 생각했었다. 내부는 요즘 말로 하면 망명이었다. 의주에 가서는 “요동으로 가야 한다”고 성화를 부렸다. 유성룡 등이 간곡히 간(諫)해서 선조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다.

제주도에 망명정부를 세우는 것조차 거부했던 이승만 대통령을, 이 땅을 떠나 요동으로 들어갈 것까지 생각했던 선조에 비유하는 것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모욕이다. 역사를 모르는 무식의 소치이다.

<2차대전 당시의 망명정부들>

설사 이승만이 제주도나 일본 야마구치에 망명정권을 수립했다고 치자.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것도 욕할 일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침략을 받은 네덜란드와 노르웨이는 왕실과 정부를 영국 런던으로 탈출시켰다. 이들은 런던에서 독일 침략자들에 대한 항전을 지휘했다. 왕실과 전쟁 전 민의에 의해 수립된 합법정부가 영국에 있는 한, 나치가 수립한 정권은 불법적인 괴뢰정권이 될 수밖에 없었다. 폴란드 역시 정부 및 군부의 요인들이 영국에 망명정권을 수립해 대독(對獨)항전을 이끌었다. 프랑스의 경우는 일개 임시 육군준장으로 국방차관이었던 샤를 드골이 영국에 망명정권을 수립했다. 이들 망명정권은 대독항전의 구심점이요, 국가정통성의 상징이었다.

정 사세가 여의치 못했을 경우에는 망명정권 수립도 국체(國體)를 보존하는 한 가지 방법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제주도나 일본 야마구치에 망명정권을 세웠을 경우, 그 결과는 낙관하기 어렵다. 네덜란드, 노르웨이, 프랑스, 폴란드의 경우, ‘외국’의 침략이었던 반면, 6.25의 경우는‘민족사의 정통성을 놓고 경쟁하는’ 동족의 침략이었기 때문이다. 한반도 전체를 차지한 자가 한민족(韓民族)을 대표하는 정권임을 자임할 수 있었을 것이고, 제주도나 외국으로 나간 망명정부는 점점 시들어가다가 존재가 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득 ‘이제 와서 이승만 대통령의 피난을 비난하고 ‘일본에 망명정부 수립’운운하는 자들의 속셈은 무엇일까?‘하는 의문이 든다.
그들의 속마음에는 6.25 때 이승만이 서울에 남아 있다가 공산군의 포로가 되어
적화통일이 되지 못한 것을 아쉬워 하는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