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경제원 [우남 이승만 제자리 찾기 프로젝트: 7가지 누명과 진실>
    *4번째 토론회---이승만은 미국의 앞잡이라는데?

  • 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사전)은 [우남 이승만 제자리 찾기 프로젝트 : 이승만에 드리워진 7가지 누명과 진실]이라는 주제로 연속토론회를 개최한다.
    제4차 토론회는 6월 24일 수요일 오후 2시 자유경제원
    5층 회의실에서
    “이승만은 미국의 앞잡이라는데?”라는 주제로 배진영 차장(월간조선)의 발제로 진행됐다.

    <발제문>

    미국과 싸운 평생..."미국이 '이승만의 앞잡이'였다"

    배진영 (裵振榮) 月刊朝鮮 차장

  • ▲ 배진영 월간조선 차장
    ▲ 배진영 월간조선 차장

    제의 제기 - 이승만에 대한 두 가지 부류의 비판

    ‘이승만에 드리워진 7가지 누명과 진실’에서 다루는 주제들을
    보면, 크게 두 부류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 이승만은 6·25가 발발하자 국민을 버리고 제일 먼저 도망갔다 ▲ 이승만은 부정선거로 당선되었다 ▲ 이승만은 독재자다 같은 비판들이다. 이러한 비판은 일찍부터 - 심지어는 이미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있던 시절부터 - 나왔던 것들이다. 주로 야당이나 비판적 성향의 언론, 지식인들로부터 나왔던 비판이다. 그리고 그 실체적 진실과 관계없이 여기에 공감하는 국민들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정서가 쌓이고 쌓였다가 4·19로 폭발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 이승만은 분단의 원흉이다 ▲ 이승만은 항일투쟁을 하지 않았다 ▲ 이승만은 미국의 앞잡이다 ▲ 이승만은 친일파를 비호했다와 같은 비판들이다. 이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소위 진보적 언론인으로 널리 알려진 송건호의 다음과 같은 비판이다.

    “이승만은 여러 일을 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가 범한 많은 과오 중에서도 민족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외세의 국가이익 추구에 편승하여 이 나라를 분단하는데 앞장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제시대 때 민족을 배반한 친일역적들을 싸고돌아 민족정기를 흐려 놓은 점과 12년의 통치기간에 이 나라를 자주 아닌 열강 예속으로 전락시켰다는 사실도 들어야 할 것이다. 이승만의 집권기간 동안 그로부터 직접 간접으로 혜택 받아 영화를 누린 층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나 오늘 한반도가 겪고 있는 민족의 수난은 다름 아닌 이승만의 지도노선에 일단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과문의 탓인지는 몰라도, 이러한 비판들은 1970년대 후반 이전에는 보기 힘든 비판들이었다. 이승만 대통령 집권기에는 물론이고, 그가 4·19로 권좌에서 밀려난 후에도 이런 류의 비판은 보기 힘들었다. 분단은 미소에 의한 것이었고, 이승만은 방법론상의 이론(異論)은 있었고 나중에 대통령이 된 후에 실정(失政)은 있었지만 평생을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한 분이라는 데 대해서는 누구도 이의가 없었다. 일제시대에 행세했던 경찰이나 관리들이 해방 후에도 행세하는 게 거슬리기는 했지만, 그걸 이승만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해도 대중화되지는 않았다. 이런 주장이 확산된 것은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나 반민족문제연구소(현 민족문제연구소)가 등장한 이후부터라고 볼 수 있다.

    전자(前者)의 비판들은 ‘대한민국 안에서’의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국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를 긍정하는 바탕 위에서, ‘왜 이승만은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를 제대로 하지 못했느냐?’ ‘왜 이승만은 통치자로서의 책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지 않았느냐’고 따지는 것들이다. 설사 그게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대한민국의 잘못된 부분, 부족한 부분을 바로잡아, 대한민국을 보다 건강한 나라로 만들자는 생각을 바탕으로 하는 것들이라고 이해할 여지가 있다.

    반면에 후자(後者)의 비판들은 ‘대한민국 밖’에서 제기되는 것들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밖에서 제기되는 것들이다. 이 질문들은 대한민국의 정체성(正體性),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들이다. 아니 궁극적으로는 대한민국의 정체성, 정통성을 부인하는 것들이다.  ‘대한민국은 태어나서는 안 될 나라’라는 주장을 하기 위한 것이고, 누구의 말처럼 ‘대한민국은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나라’라고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언젠가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 박사는 기자에게 “어머니(프란체스카 여사)는 이승만 박사의 일생은 미 국무부와의 싸움의 연속이었다‘고 하셨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말이 ‘미 국무부와의 투쟁’이지, 그건 ‘미국과의 투쟁’이었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미국이라는 국가의 의지를 대외적으로 표출하는 기관이 ‘미 국무부’이기 때문이다. 이 글의 결론을 미리 얘기하자면 이렇다.

    “이승만이 ‘뼛속까지 친미(親美)주의자’였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이승만은 ‘뼛속까지 한인(韓人)이었다. 그의 친미주의는 이 나라를 문명개화한 상등(上等)국가로 만들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리고 이승만이 미국이 앞잡이였던 게 아니라 미국이 ‘이승만의 앞잡이’였다.”

    1. 청년 이승만, 미국 선교사들을 통해 눈을 뜨다

    양녕대군의 말예(末裔)로 과거를 통해 입신출세하려는 꿈을 갖고 있다가 과거제가 폐지되는 바람에 좌절하고 있던 청년 이승만이 친구 신흥우의 권유로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가 세운 배재학당을 찾은 것은 1895년이었다.

    여기서 그는 언더우드·아펜젤러·게일·에비슨·헐버트 등 미국 선교사들과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 등을 통해 자유·민주·평등·인권·공화와 같은 서구 사상을 접하게 된다. 이승만은 처음에는 하와이에 들어갔던 선교사들이 결국은 하와이를 미국에 병탄(倂呑)시킨 사실을 알고, 선교사들에 대해 경계하는 마음을 가졌었다. 하지만 한성감옥에 투옥되어 있는 동안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그러한 생각에도 변화가 왔다. 

    이승만이 이들 선교사들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가 하는 것은 후일 이승만 자신의 술회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올리버 에비슨 선교사에 대해 대통령 이승만은 이렇게 술회했다.

    “에비슨 박사는 그가 이 땅에 전한 기독교 정신으로부터 오는 자유주의 사상의 상징으로써 본 대통령과 신실한 친구였으며, 또 본 대통령의 청년시기에 기독적 민주주의의 새 사상을 호흡케 하였다.” 

     1950년에 있었던 헨리 아펜젤러(아펜젤러1세)의 딸 앨리스 아펜젤러의 사회장 때 당시 이승만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 민주제도의 정신은 선교사측으로부터 먼저 그 역사와 의도를 알게 된 것이요, 거기에서 흡수한 민주주의 요소가 우리의 골수에 백여서(박혀서) 구한국시대나 왜정시대에 뼈 속에 잠정적으로 자란 것이므로 우리는 미국 선교사들에게 양방으로 빚을 지고 있다.” 

     미국에 대한 청년 이승만의 인식은 지극히 긍정적이었다. 이는 이승만이 지은 《독립정신》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 책의 17~20장에서 이승만은 ▲ 미국 백성들이 누리는 권리 ▲ 미국 독립의 역사 ▲ 미국 독립선언문 ▲ 미국의 남북전쟁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청년 이승만이 미국을 하나의 기독교적 이상국가(理想國家)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국가로 여기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다. 

  • ▲ 배진영 월간조선 차장

    그렇다고 청년 이승만이 서양문물을 맹종한 것은 아니다. 서재필은 배재학당에서 서양식 토론을 가르치고 권장했는데, 토론회가 진행되던 어느 날 서재필은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미국에서는 남이 연설할 때에 잘하면 손바닥을 마구 때려 박수라는 것을 하는 법이오. 여러분도 잘한다고 생각되거든 그렇게 해 보시오.”이 때에 이승만은 아무리 미국 것이 좋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까지 흉내 낼 필요가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서 일부러 “자, 그럼 우리 박수합시다”하고 큰소리로 말하면서 박수를 선도했다. 그러자 서재필은 “좋으면 혼자서 박수하지 남까지 꼭 같이 하자고 권할 것은 뭐야!”하고 핀잔을 했다. 그리하여 강당 안은 한바탕 웃음판이 되었다.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1), 나남, 2008, p185)

    이 일화는 청년 이승만이 서양의 신문물을 왕성하게 흡수하던 시절에도, 서양의 것이라고 무조건 맹종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주체성·자주성은 이후 이승만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된다.  

    2. 실패한 密使 외교, 트라우마로 남다 

    이승만은 민영환과 한규설의 밀명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1905년 8월4일 휴양지 오이스터 베이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났다. 이승만은 루스벨트에게 하와이 교민들의 청원서를 제시하고 조미수호조약에 따라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애써달라고 호소했다. 루스벨트는 “이 일은 대단히 중대하여 이 청원서를 내가 사사로이 받을 수 없다”면서 “만일 당신들이 이 문서를 귀국 공사관을 통해서 제출하신다면 나는 그것을 중국의 청원서와 함께 강화회의에 제출하겠다”고 말했다.

    유영익 교수는 “루스벨트의 답변은 의례적인 ‘레토릭’의 수준을 넘어선 ‘기만행위’였다”고 지적한다. (유영익, 《이승만의 삶과 꿈》, 1996, p40~44)

     그보다 얼마 전인 7월31일 루스벨트의 밀명을 받은 태프트 육군장관은 일본 수상 가츠라 다로를 만나 가츠라-태프트 밀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영국, 일본과 손을 잡고 극동에서 러시아세력을 견제한다는 것이 루스벨트의 속셈이었다.

  • ▲ 배진영 월간조선 차장


    가츠라-태프트 밀약은 19년 후인 1924년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이 때 미국의 배신행위에 대해 후일 이승만은 《일본의 가면을 벗긴다》에서 이렇게 비판했다.  “그 당시 미국이 의무상 취해야 할 방향은 명확했다. 미국은 일본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미국은 한국을 도와주어야 할 조약상의 의무가 있으며, 일본도 한국의 정치적 독립과 영토보전의 존중을 약속한 한국과의 조약을 준수해야 한다고 강조했어야만 했다. 미국이 이 의무상 똑바른 길을 가는 대산에 조미수호조약을 무시함으로써 일본이 한국과 체결한 조약도 파기하도록 방조했다. 이런 일을 자행함으로써 그 후 그들은 조약파기 시대의 문을 부지불식간에 열게 되어 그것이 현재 유럽과 아시아에서의 혼돈과 무질서의 직접적인 원인의 하나가 된 것이다.

    참으로 이것은 영광스런 미국 역사의 한 페이지를 오점으로 물들였다. 한국은 평화애호국가로서 국제조약의 신성함을 신뢰하다가 막대한 희생을 지불했다.” (이승만, 《일본의 가면을 벗긴다》, 비봉출판사, 2015, p260)

    결국은 실패로 끝난 청년 이승만의 밀사외교를 이렇게 언급하는 이유는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이 사건은 이승만은 결코 ‘미국의 앞잡이’가 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청년기에 미국 선교사들로부터 새로운 문명을 전수받고, 미국에 대해 커다란 동경을 품었었고, 미국의 호의에 기대서 조국의 독립을 보장받으려 했지만, 결국 잔인하게 배신당한 기억을 가진 이승만이 어떻게 ‘미국의 앞잡이’가 될 수 있겠는가? 

    이 때의 기억은 이승만에게 평생 트라우마로 남았다. 이승만은 대통령이 된 후, 우리 외교관들에게는 물론, 미국 외교관들에게도 시어도어 루스벨트 시절 미국의 배신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1949년 12월 이승만은 주미한국대사인 장면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국의 편향적인 친일정책의 부당성을 비판하면서, 미국은 태프트-가츠라 조약과 일본의 한국합병에서 보았듯이 또다시 일본을 위해 한국을 포기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유영익 엮음,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 (차상철, <외교가로서의 이승만 대통령>),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7, p165)

     이승만은 1953년 7월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해 방한한 월터 S.로버트슨 미 국무부 극동담당차관보에게도 이렇게 말했다.“미국에 대한 우리(한국)의 확고부동한 신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1910년 일본의 한국합병과 1945년 한반도의 양분에서 볼 수 있듯이, 과거 두 번씩이나 (미국에 의하여) 배신당했다. 지금 사태 진전은 또 다른 배신(sellout)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어떤 것을 시사하고 있다.” 

    둘째,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은 냉혹한 국제정치현실을 깨달았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후일 ‘외교의 신(神)’으로 불릴 정도로 능수능란한 외교가(外交家)로 성장하게 되었다. 

    차상철 충남대 교수는 “냉혹한 국제정치에서 외교의 행태와 실상을 이승만은 온 몸으로 체험했고, 나아가 그것은 ‘역사적’ 인물로 성장해 간 이승만에게 한시라도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교훈이 되었다. 1905년 ‘불쌍한 처지에 놓인 한국에 대한 미국의 배신행위를 이승만은 평생동안 결코 잊을 수 없었다”면서 “후일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서 이승만은 신생독립국가의 생존과 안전을 담보하기 위한 최선의 현실적인 처방책인 한미군사동맹의 체결을 위한 험난했던 대미협상과정에서, 반세기 전의 미국의 ’배신‘을 끊임없이 제기하면서, 법적 구속력이 있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집요하게 강요했고, 끝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데 성공했다”고 말한다. 

    3. 외교독립론 - 좌절의 연속

    이후 이승만은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불과 5년 만에 조지타운대학에서 학사, 하버드대학 및 프린스턴대학에서 석사를 그리고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승만은 5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미국 동부의 명문대학교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모두 취득한 보기 드문 수재로 미국 사회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고, 서양사(특히 미국사), 정치학, 외교학, 국제법 등 근대적 학문을 전공한 한국인 최초의 국제정치학자가 되었다. (유영익, 《건국대통령 이승만》, 2013,p27)

  • ▲ 배진영 월간조선 차장

    프린스턴대학에서 이승만은 우드로 윌슨 총장의 총애를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윌슨의 딸 앨리스의 결혼식 때, 윌슨의 청첩장을 받은 사람은 하와이에서 총독과 이승만 두 사람뿐이었다고 한다. 

    이승만 본인도 그렇고, 하와이를 비롯한 미주 교포들, 그리고 국내외의 여러 독립운동가들도, 이승만과 윌슨의 친분에 많은 기대를 걸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승만의 은사(恩師)’ 윌슨이 아무리 이승만에게 호의를 갖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미(美)합중국 대통령’ 윌슨은 다른 사람이었다. 게다가 당시 미국 내의 고립주의 분위기, 미국의 국제적 위상의 한계, 제1차세계대전 승전국의 일원으로서 일본제국의 위상 같은 제약들을 생각하면, 윌슨이 실제로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1919년 5월 워싱턴에서 ‘구미위원부'를 개설한 이승만은 한국에 임시정부가 수립됐으니 한국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달라는 내용의 서한을 미국의 윌슨대통령을 비롯한 각국 지도자들에게 보냈지만 성과를 얻지 못했다.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미 국무부에 여권발급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던 이승만은 은사인 윌슨 대통령에게 호소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승만은 1919년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 구미위원부 대표, 워싱턴군축회의(1921년 11월~1922년 2월) 및 국제연맹(1933년) 한국대표단 전권대사로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벌였다.  이승만의 독립운동방안을 흔히 ‘외교독립론’이라고 한다. 외교의 주체를 국가라고 할 때 이승만의 운동은 엄밀히 말해 외교라고 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주로 선전이나 여론의 환기에 주력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시민운동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외교독립론’이라는 용어가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므로 여기서도 그러한 용례를 따르기로 한다.

    이승만이 ‘외교독립론’을 주장한 것은 ▲ 개인적으로 무력과 폭력을 극히 혐오했다는 점에 더하여 당시 국제사회가 기존의 평화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선호하였고, ▲ 약소국의 힘으로 강대국에 상대가 되지 않았고, ▲ 독립 후에 집단안보체제에 의존해야만 하는 약소국으로서의 운명 때문이었다. (김학은, 《이승만과 마사리크》, 북앤피플, 2013, p45)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승만의 ‘외교독립론’,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친미외교독립론’은 단순히 독립운동상의 방법론을 넘어 건국 후의 비전과도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승만의 외교노선은 무장투쟁론이나 실력양성론 같은 독립운동의 방법론에 그쳤던 것이 아니라 독립 후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에 바탕을 둔 국가를 세운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있었다. 즉 그의 노선에는 이념이 용해되어 있었다. (유영익 엮음, 앞의 책, (고정휴,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대통령으로서의 이승만>),p23)

  • ▲ 워싱턴 군축회의(1921) 한국 대표단장 이승만(왼쪽)과 부대표 서재필.
    ▲ 워싱턴 군축회의(1921) 한국 대표단장 이승만(왼쪽)과 부대표 서재필.

     오늘날 이승만을 높이 평가하는 이들은 그의 ‘외교독립론’이야말로 그의 통찰력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극찬한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는 이미 지나간 역사를 다 아는 사람들의 시각일 수도 있다. 오히려 당대에는 “윌슨 대통령에게 독립 승인을 요구하여 교섭한다는데, 가만히 앉았다가 글 몇 줄로 독립을 찾겠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짓”이라는 안창호의 비판이 더 설득력이 있었을 수도 있다. 당시 이승만은 많이 외로웠을 것이다.

      실제로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1921년 워싱턴 군축회의가 개막되기 직전, 이승만 전권대사는 하딩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대표단의 회의 참가 허용과 한국의 독립을 위한 청원서를 보냈지만, 미국 정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다.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에서, 식민지 한국을 지배하고 있는 일본의 입장과 주장을 고려해야 하는 미국으로서는 ‘무반응’과 ‘무시’가 최선의 방책이었을 것이다. 

     워싱턴 회의 실패는 결국 이승만이 1925년 3월 임시의정원에서 탄핵을 당해 대통령직을 박탈당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이러한 상황은 미국이 태평양에서 일본과 우호협력을 추구하는 한 극복하기 어려웠다.
    상황이 조금이나마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였다. 캘리포니아 등지에서 일본 이민이 증가하면서 이에 대한 미국 내 반발도 거세지기 시작했고, 이는 미일 양국간의 갈등으로 번졌다. 워싱턴 군축회의에서 일본의 해군력을 제한했지만, 일본은 제1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식민지였다가 자신들의 위임통치 아래 놓이게 된 태평양 도서(島嶼)들을 바탕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일본이 만주를 침략한 것은 미국이 19세기 후반 이래 만주와 중국에서 추구해오던 ‘문호개방’원칙에 반하는 것이었다. 

    이봉창 의사가 히로히토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투척한 1932년 1월 8일 주일미국대사는 일본 외무대신에게 “미국 정부는 1928년의 부전조약(不戰條約)의 약속과 의무에 위반되는 일체의 사태, 조약, 협정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국무장관 헨리 스팀슨의 선언을 전달했다.  

     이에 앞서 이승만은 1931년 12월16일에 미 국무부를 방문하여 스팀슨 장관에게 보내는 석 장의 긴 편지를 전했다. 이 편지에서 이승만은 “일본은 만주를 점령함으로써 만주의 풍부한 자원을 손에 넣게 되어 더욱 강대해지고 더욱 침략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므로 세계문명의 적으로 간주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이 글에 대해 국무부 극동문제 담당관은 그의 메모에서 “이 편지는 한국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아직 활동하고 있는 증거이며 또 만주사변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보여 주고 있어서 읽을 가치가 있다”고 지적했다. 극동문제 담당관의 이러한 각서로 미루어 이승만의 편지는 1932년 1월7일에 발표된 스팀슨의 불인정선언(스팀슨독트린)의 작성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을 개연성이 없지 않다.

  • ▲ 국제연맹회의에 참관한 이승만을 인터뷰하여 '한국 독립' 주장을 보도한 제네바 언론.(1932)
    ▲ 국제연맹회의에 참관한 이승만을 인터뷰하여 '한국 독립' 주장을 보도한 제네바 언론.(1932)

     

     1932년 11월11일, 이승만은 <기회를 이용하자>라는 글에서 “한국의 독립기회는 언제나 미일의 충돌에 있다”고 역설했다.

     〈우리 광복사업에 절대한 기회는 언제든지 일미 충돌에 있다. 다른 나라들은 다 강토의 욕심을 가진 고로 그 야심이 일본이나 다름이 없으되, 오직 미국은 동양에서 상권과 덕의상 세력을 세우는 것이 더 유력할뿐더러 미국이 필리핀을 찾은 뒤로 손해를 많이 본 고로 민심이 원동에 강토를 점령하는 것을 절대로 반대하는 고로, 중국과 만주의 강토를 보호하야 타국이 점령치 못하게 하는 것이 연래로 미국의 일정한 원동정책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 덕의상 응원을 얻는 것이 곧 대세를 순응함이요.…〉

     이승만은 이어 이제 미국의 친일주의가 변하고 있고, 미일의 충돌이 날로 증대하게 될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전망했다.

  • ▲ 국제연맹회의에 참관한 이승만을 인터뷰하여 '한국 독립' 주장을 보도한 제네바 언론.(1932)

       〈지금은 미국의 친일주의가 변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일러전쟁 때에 미국이 러시아의 세력을 제일 의려(疑慮: 의심하여 염려함)했는고로 루스벨트 대통령이 일본을 후원하야 러시아를 방어하게 하고, 평화시의 중국과 만주독립을 보호하기 위하야 조선을 희생한 것이니, 조선을 일본에 주면 일본은 조그마한 나라이므로 다른 야심이 없어서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고 미국의 이익이 확장되는 것을 막을 자가 없으리라 한 것이다. 지금 와서는 일본의 육해군 세력이 러시아보다 앞서고 상업상과 정치상으로 중국과 만주를 다 병탄하려는 야심이 드러난 고로 미국의 대등적 강국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이라.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일미의 충돌이 날로 자랄 것은 면치 못할 사실이다.…〉 

     이승만이 1932년 12월 만주사변 문제를 다루기 위한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미 국무부에 여권을 신청을 신청했을 때, 미 국무부가 외교관 여권을 발급해 준 것은 이러한 정세변화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승만은 1918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려고 미 국무부에, 나중에는 윌슨 대통령에게 여권 발급을 호소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었다.

    1941년 6월 이승만은 일본의 침략야욕을 고발하면서 미일전쟁의 박두를 예언한 《일본의 가면을 벗긴다(Japan Inside Out)》를 펴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면서 미일전쟁, 즉 태평양전쟁이 시작됐다. 이승만은 ‘예언자’라는 칭송을 들었고,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일본의 가면을 벗긴다》출간이 태평양전쟁의 발발과 함께 미 군부의 호감을 하게 되고, 그 결과 형성된 미 군부와의 친밀한 관계는 단순히 백악관과 국무부를 중심으로 한 외교활동에서 벗어났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그 후 이승만이 한국에서 대통령이 되는 데도 큰 힘으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이한우, 《우남 이승만, 대한민국을 세우다》, 해냄, 2008, p281)

      이승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로부터 주미외교위원부(1925년 폐지된 구미위원부의 후신) 위원장에 임명되어 공식적인 대미(對美)외교를 재개했다. 당시 이승만에게 주어진 임무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승인과 군사적 지원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이 그토록 고대했던 ‘일미충돌’이 현실이 되었지만, 이 시기에도 이승만은 기대했던 외교적 성과를 거의 얻지 못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진주만기습 직후 미국은 중국 내 한국독립운동세력(임시정부와 광복군)에 약간의 기대를 걸어보았지만, 주중 미국기관이나 중국(중화민국 장제스 정부) 관계자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분열상, 실질적인 능력 부족 등을 이유로 부정적 견해를 피력했고, 미국 정부는 곧 관심을 거두어들였다. 

     또 다른 이유는 미국의 대소(對蘇)정책이었다. 미국은 독일, 일본 등 추축국과의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 소련의 힘을 절실히 원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미국은 소련과의 협조 아래 전후(戰後)세계질서를 재편성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런 생각은 해방 후 이승만의 건국외교 과정에서도 걸림돌이 된다). 더욱이 당시 미 ‘뉴딜정책’을 추진하던 미국 정부 내에는 공산주의에 우호적인 ‘리버럴’한 인물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앨저 히스였다. 이승만과 앨저 히스는 1942년 1월2일 정면으로 충돌했다.

     이날 이승만은 존 스태거스 및 제이 제롬 윌리엄스와 함께 국무부를 방문하여 앨저 히스와 스탠리 혼벡을 만났다. 히스는 코델 헐 국무부 장관의 특별보좌관이었고, 혼벡은 국동지역문제 책임자(극동국장)였다. 이승만은 미국이 나치 지배 하의 유럽에서 망명정부들에게 주고 있는 수준의 국가인정과 지원을 한국정부(임시정부)에게도 부여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히스는 이에 대해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했다. 미국정부는 이 박사가 실제로 한국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지의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한국의 지도자를 종전 후에 미국의 관리들이 실시할 선거를 통해 선출한다는 단서를 붙여 대한민국을 인정해 달라고 재차 요구했다. 이 제안에 히스가 난처한 듯 침묵을 지키자, 이승만은 그렇게 서둘러 인정해야 주어야 할 이유를 설명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무역의 출구로 한국의 부동항들을 확실히 확보하기 위해 50년이 넘도록 계속 그 방도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미국이 일본을 패배시킨 후 먼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으면 러시아가 한반도에 진출해 한국을 강점할 것이라고 이승만은 단언했다.   히스는 전시의 주요 동맹국의 하나인 나라(즉 소련)에 대한 공격을 조용하게 앉아 듣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듯이 이승만의 말을 가로막으려 소리쳤다. 한국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일본이 항복 후에나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 이승만의 말처럼 미국이 소련의 기본정책에 반하는 어떤 종류의 사전행동도 취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히 했다.

  • ▲ 루즈벨트 대통령의 측근이자 국무성 간부 알저 히스. 그는 소련의 간첩이었다.
    ▲ 루즈벨트 대통령의 측근이자 국무성 간부 알저 히스. 그는 소련의 간첩이었다.

    이승만은 국무부를 나서면서 히스가 러시아(소련)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의심은 하지 않았지만 한 젊은이, 그곳도 세계문제에 대해 아무 경험도 없는 애송이가 미국의 정책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에 대해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만, 《일본의 가면을 벗긴다》, 비봉출판사, 2015, p35-36) 

    이승만은 설마 히스가 소련을 위해 일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실제로 그는 소련의 간첩이었다. 전 공산주의자 휘태커 챔버스는 히스를 공산주의자라고 고발했고, 히스는 비미활동위원회에 회부되어 조사를 받았으며 위증죄로 처벌받았다. 거의 50년이 지난 후 소련의 비밀전문을 해독한 문서(베노나문서)가 공개되지 히스가 소련의 스파이였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이 입증되었다.(앤 코울터, 《반역》, 경덕출판사, 2008,p 43-69)

    미국은 표면적으로는 ‘임정’이 한국민의 대표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지만, 실제로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제안하여 스탈린과 처칠이 동의한 ‘한반도 신탁통치안’의 전후 실시방침을 미국이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임정에 대한 승인 획득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다. 

  • ▲ 루즈벨트 대통령의 측근이자 국무성 간부 알저 히스. 그는 소련의 간첩이었다.

    이승만의 전시(戰時) 외교가 모두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정보조정국(COI), 전략첩보국(OSS)와 함께 장석윤 등 재미동포들을 훈련시켜 일본과의 전쟁에 투입하는 방안을 추진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미국은 냅코작전 등을 진행했다. 

    또 이승만은  ‘미국의 소리(VOA)'방송을 통해 1942년 6월13일부터 7월까지 단파방송을 했다. 특유의 떨리는 목소리로 “나는 이승만입니다. 미국 워싱턴에서 해내, 해외에 산재한 우리 2300만 동포에게 말합니다”로 시작되는 이 방송은 국내의 동포들(비록 소수지만)에게는 해방의 날이 가까워졌음을 알리는 복음이었다. 이 방송은 또한 ’이승만 전설‘의 시작이었다. 정병준(이화여대 교수)은 “단파방송은 이승만의 명성을 제고시켰을 뿐만 아니라 지도자로서의 신비감, 민족해방의 희망과 우상으로 자리 잡게 했다”고 평가한다. 

    이승만이 국무부를 상대로 한 외교활동에서는 이렇다 할 성과를 보지 못한 반면, 정보기관이나 군부 계통과는 어느 정도 협력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국무부가 세계전략 차원에서 한국문제를 바라본 반면, 정보기관과 군부는 전쟁승리를 위해 가용한 자원을 총동원한다는 전술적이고 실용적인 차원에서 문제에 접근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독립운동 시기 이승만은 일부 친한적인 미국인들을 조직화하고 그들로부터 호의를 얻기 위해 노력했으며, 특히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어느 정도 미 정보기관이나 군부의 관심과 협력을 이끌어 내기는 했으나, 미국이라는 ‘국가’차원(특히 미 국무부)에서의 도움은 거의 받은 바 없고 내내 외면당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일제가 패망한 후에도 계속된다.

    4. 해방공간의 이승만과 미국

    누군가의 말처럼 해방은 도둑처럼 찾아왔다. 일제36년간 국권회복을 위해 투쟁해 온 선열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그 해방은 우리의 힘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국토와 민족의 분단이었다. 

    미국은 1945년 8월 9일 일본과의 불가침조약을 깨고 급속히 남하하는 소련군을 저지하기 위해 서둘러 38선을 그었다. 남한에는 한반도에 군사분계선이 그어지던 그 순간에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인 오키나와에 있었다는 ‘우연’ 때문에 미24군단이 진주하게 되었다. 이후 3년간 남한 땅의 통치자가 된 존 하지 중장은 ‘태평양의 패튼’소리를 듣던 야전군인이었다. 

    당연히 그에게는 이 땅을 어떻게 관리할 지에 대한 최소한의 사전지식도, 경륜도 없었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에게는 “조선 인민들이여! 조선은 이제 자유국가가 되었다....행복은 이제 당신들 손에 있다”라고 감언이설을 늘어놓을 수 있는 수완 - 그리고 그런 수완을 발휘할 수 있는 정치장교들 - 이라도 있었지만, 하지에게는 그것도 없었다. 이후 3년간 남한에서 거듭된 혼란과 시행착오는 상당부분 이에 기인하는 바가 컸다. 

    정치적 식견이 없는 하지가 할 수 있는 일은 군인답게 본국의 명령을 충실히 집행하는 것이었다. 신분은 군인이었지만, 그에게 명령을 내리는 기관은 국무부였다. 그리고 국무부에는 내내 이승만과 갈등을 빚어온 용공(容共)성향의 ‘리버럴’한 관료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이후 진행되는 이승만과 하지의 대립‧갈등은 실은 이승만과 미 국무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용공성향의 리버럴한 국무부 관료들간의 대립·갈등이었다.

    이승만은 1945년 10월 16일 귀국했다. 귀국과정에서도 곡절이 있었다. 이승만이 귀국하기 위해서는 국무부와 군부의 허가가 필요했다. 국무부 여권과에서도, 맥아더사령부에서도 그의 귀국을 허가했다. 하지만 뒤늦게 제동이 걸렸다. 미 합참이 그에게 발급한 여권에 기재된 ‘재미한국고등판무관(즉,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이라는 직함에 대해 국무부가 시비를 건 것이다. 이는 미 국무부의 임시정부 불승인 방침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미 국무부는 갖은 이유를 붙여 그의 한국행을 저지하려 했지만, 결국은 승인했다. 단,’개인자격‘으로의 귀국이었다.

  • ▲ 상해에서 귀국한 임정주석 김구(가운데)를 하지 미군사령관에게 소개하는 이승만. 김구는 영어를 못했다.
    ▲ 상해에서 귀국한 임정주석 김구(가운데)를 하지 미군사령관에게 소개하는 이승만. 김구는 영어를 못했다.

    하지는 이승만을 환영했다. 맥아더가 “이승만을 한국의 영웅으로 극진히 모시라”고 지시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남한의 안정을 위해서는 민중들 사이에서 ‘우리 대통령 이승만 박사’라고 추앙받고 있던 이승만의 권위를 빌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밀월관계는 곧 깨어지고 말았다. 신탁통치 문제 때문이었다. 새로 창설되는 유엔이 제대로 기능하려면 소련의 협력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라도 치르겠다는 것이 당시 미국의 입장이었다. 

    이승만과 김구를 중심으로 하는 우익진영은 신탁통치안에 대해 격렬히 반대했다. 하지만 미 군정 당국은 본국의 지침에 따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하는 등 신탁통치안을 실천에 옮기기 위한 절차를 밟아나갔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위로 끝나자 미 군정은 좌파와 우파를 배제하고 온건한 중간파 세력을 양성해 자신들의 세력기반으로 삼고자 했다. 이러한 미 군정의 의도에 따라 시작된 것이 좌우합작운동이다. (김일영, 《건국과 부국》, 생각의 나무, 2004, p51)
     이것은 ‘미 군정의 사주와 지원을 받아 전개된 정치공작’이었다. (양동안, 《대한민국 건국사》. 현음사, 2001, p240)

     그리고 미 군정으로 하여금 그러한 ‘정치공작’에 나서게 만든 것은 미 국무부였다. 미 국무부의 관리들은 남한의 민중은 공산주의적 강령을 지지하며, 이승만과 김구가 이끄는 남한의 우익진영은 ‘비진보적인’ 강령으로 인해 대중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한 것으로 판단하면서 미 군정과 남한의 우익진영이 유착하여 남한의 정치적 운명을 결정해 가는 것은 소련의 한반도 정책에 대한 올바른 대응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미 국무부 관리들은 한반도 문제는 모스크바 협정의 틀 속에서 미소합의에 의해 해결해야 올바로 해결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으며, 이승만-김구세력은 그런 ‘올바른 해결’에 대한 장애물로 생각했다. 

    바로 그런 생각들에 입각하여 미 국무부는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이승만-김구의 집단을 멀리할 것과, 이승만-김구 집단과 연결되지 않고 공산당과도 연결되지 않으면서 ‘진보적’ 강령으로 민중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는 새로운 세력, 즉 중도파 세력을 육성 지원하여 그들을 미 군정의 협력자로 삼을 것을 지시했다. 양동안, 앞의 책, p241

     미 국무부가 1946년 2월말 하지에게 보낸 전문에는 이승만에 대한 국무부의 거부감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수년간에 걸친 이승만과 국무부 간의 불만족스러운 거래의 경험 때문에 우리는 김구와 이승만의 집단들에 대해 어떠한 호의도 보여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의 미 군정이 김규식-여운형을 앞세워 좌우합작을 추진하면서 이승만과 하지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었다. 

    하지는 이승만과 그 지지세력을 정치무대에서 배제하기 위해 민주주의 원칙을 짓밟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1946년 10월말 실시된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민선의원 선거에서 미 군정과 좌우합작위원회측의 기대와는 달리 우익진영이 압승을 거두자(총 45명 중 34명), 하지는 좌우합작위원회의 일방적 주장을 받아들여 타당한 이유도 제시하지 않고 서울과 강원지역의 선거결과를 무효로 했다. 

     미 군정은 과도입법의원 중 관선위원 대부분을 중도파나 좌파성향 인사들로 충원했는데, 그들 중에는 미주 교민사회에서 일관되게 이승만에 반대하는 활동을 해 온 김원용과 김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승만에 대한 미 군정의 반감이 어느 정도였나를 짐작할 수 있다.

    미 군정은 여론조사 결과 조작도 했다. 미 군정 수석홍보관 그린 대령은 이승만의 홍보자문역이던 올리버 박사와 만났을 때, “여론조사에서 70%의 한국인이 이 박사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나자, 러치 장군(미 군정장관)의 명에 따라 보고서 내용을 조작해서 이 박사의 지지율을 과반수가 되지 않도록 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물론 공식적으로 토로한 게 아니고 술 좀 마시고 한 얘기였다). (로버트 T.올리버, 《이승만의 대미투쟁》(상),p90)

  • ▲ 상해에서 귀국한 임정주석 김구(가운데)를 하지 미군사령관에게 소개하는 이승만. 김구는 영어를 못했다.

    이승만과 하지는 때로는 공개적으로, 또 때로는 상대방의 면전에서 직접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원색적인 인신공격을 서슴지 않았다. 1946년 6월 방한한 로버트 올리버는 하지 장군과 부사령관 겸 군정장관 러시 장군을 만났을 때의 일을 이렇게 기록했다. <그들은 이 박사가 과대망상증으로 거의 정신이 나간 사람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하지 장군은 이 박사에게 은밀히 면담해보도록 정신과 의사와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했다....하지는 이 박사가 미 군정에 더 이상 효용가치가 없어져가고 있으며 공개적으로 비난해서 그를 ‘파멸’시켜야 할 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

    하지는 올리버에게 “그(이승만)는 한국 정계에서 가장 탁월한 분이고, 내가 보기엔 거의 유일한 정치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는 한 한국정부에 그가 설 자리는 결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공산주의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이승만은 미국 본토에서 공산주의와 하지에 대한 공격을 하기 위해,1946년 12월에서 이듬해 3월까지 방미 외교에 나섰다. 이승만은 트루먼 대통령, 유엔총회의장 등 미국 조야(朝野)인사들과 만나 하지의 실정(失政)과 소련의 야욕을 비판하면서, 미국의 대한(對韓)정책 변화를 촉구했다. 

    미 국무부는 이승만의 외교활동을 극심하게 방해했다. 이승만이 페터슨 육군장관과 만나려 했을 때 미 국무부 관리들은 ‘이승만이 한국 정계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 중의 한 명’이며, ‘어떤 한국인보다도 주한미군의 입장을 어렵게 만드는 인물’이라고 평가하면서 페터슨으로 하여금 이승만의 면담 요청을 거절하도록 작용했다. 

    결국 이승만은 독립운동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언론과 친한파 인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홍보전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북한군 50만 명이 남침을 준비 중이다”라는 등 센세이셔널한 얘기를 하면서 언론의 관심을 끌고자 애썼다.

    일제 하에서 이승만의 외교활동(특히 미 국무부를 상대로 한)이 그랬던 것처럼, 이때의 외교활동도 그 자체로서는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승만은 존 R. 힐드링 미 국무부 점령지 담당 차관보를 만났고, 워싱턴을 떠나기 전인 3월22일 아주 희망적인 성명서를 언론에 발표했다. 하지만 이승만의 측근이던 올리버조차도 그걸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올리버는 “이 박사의 발표처럼 힐드링이 특별히 보장할 만한 발언을 해 주었을 것 같지는 않다. 내 추측으로는, 이 박사가 발표한 내용의 일부 또는 전부를 힐드링에게 말해주었고, 힐드링은 상례적으로 하는 호의적인 말과 미국이 한국 독립을 촉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정도의 말을 장담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올리버는 “내 정보로는 이 성명서는 사실일 수가 없었다”고 했다. 미 국무부는 이 발표를 무시했다. 

  • ▲ 북한 단독정권을 세운 소련 슈티코프(오른쪽)는 남한을 흡수하기 위해 미군정사령관 하지(왼쪽)와 미소 공동위원회를 열어 남북한 좌우합작정부 수립을 시도하였다.(1946년 덕수궁 석조전에서)
    ▲ 북한 단독정권을 세운 소련 슈티코프(오른쪽)는 남한을 흡수하기 위해 미군정사령관 하지(왼쪽)와 미소 공동위원회를 열어 남북한 좌우합작정부 수립을 시도하였다.(1946년 덕수궁 석조전에서)

     하지만 이승만은 운이 좋았다. 1947년 3월12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그때까지의 대소협력노선을 포기하고 그리스 등 공산주의에 저항하는 나라들을 지원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트루먼 독트린’이다. 그 내용은 그동안 이승만의 반공·반소 주장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지만, 이승만이 거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다. 영향을 미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트루먼 독트린’을 자신의 외교적 성취로 포장할 수 있었고, 그게 국내에서는 먹혀들어갔다. 

    트루먼 독트린에도 불구하고 미 국무부와 하지 사령관은 종전의 관성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미 군정은 노골적으로 이승만 탄압에 나섰다. 미 군정은 이승만을 사실상의 가택연금 상태로 몰아넣어 그의 수행원이나 방문객들의 이승만 자택 출입을 통제했다. 이승만의 우편물들은 모두 미군 CIC(방첩대)와 정보부의 검열을 받았으며, 이승만에게 제공되는 정치자금의 루트를 봉쇄하여 이승만의 송금으로 유지되는 워싱턴 구미위원부의 운영이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양동안, 앞의 책, p341

     더 나아가 이승만에 대한 대안으로 서재필·강용흘을 귀국시키기도 했다.

  • ▲ 소련과 미국의 남북좌우합작 추진과 더불어 김구는 평양으로 김일성(왼쪽)을 찾아가 남북협상을 벌였다.(1948.4)
    ▲ 소련과 미국의 남북좌우합작 추진과 더불어 김구는 평양으로 김일성(왼쪽)을 찾아가 남북협상을 벌였다.(1948.4)

    하지만 이후 미국은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한반도 문제를 풀어가려던 노력을 포기하고,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했다. 이후 대한민국 건국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기로 하겠다. 그 과정에서 이승만과 미국, 이승만과 하지의 관계도 개선되었다.

    그러나 해방공간에서 이승만과 미국의 전반적인 관계는 대립·갈등의 관계였다. 일부가 상상하는 것처럼, 이 시기의 이승만은 미국의 앞잡이가 되어 분단을 선도하고 남한의 주도권을 잡아갈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이승만이 1946년 6월3일 이른바 ‘정읍발언’을 했을 때에도 미 군정의 반응은 싸늘했다. 군정장관 러치 소장은 6월10일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박사가 어떠한 말을 하였는지는 모른다. 만일 이 박사가 남조선에 따로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면 그것은 그의 입장에서 한 말이고 군정청을 위해 한 말은 아니다... 나는 군정장관으로서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에 대해서는 전연 반대한다. 내가 아는 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 계획도 없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근거 없는 말이다.” 

    한 마디로 이승만은 ‘미국의 앞잡이’가 되어 대한민국을 건국한 것이 아니다.
    이승만은 건국에 이르는 고비 고비마다 미 군정 및 미 국무부와 박 터지는 싸움을 벌이면서
    대한민국 건국을 쟁취해 낸 것이다. 

  • ▲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건국 선포식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
    ▲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건국 선포식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

    5. 미국, 건국 후 이승만의 안전보장 요청 거부

     대한민국이 건국됐고, 미국이 대한민국을 승인했지만, 이승만과 미국의 갈등관계까지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평가한 미국은 어떻게 해서든 모양새 좋게 한국에서 발을 빼려 했다. 미국은 이승만의 간절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1949년 470 여명의 군사고문단만을 남긴 채 주한미군을 철수시켰다.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국가건설에 필요한 경제 및 군사원조를 받아내기 위해 진력했지만, 이 역시 번번이 거절당했다. 

     이승만은 1949년 4월 조병옥을 미국에 특사로 파견, 군사원조를 요청했다. 조병옥은 애치슨 미 국무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 한국군의 규모를 6만5000명에서 10만 명으로 확대하고 5만명의 예비병력도 유지하며 이들에 대한 무기와 장비지원을 해 줄 것 ▲ 한국이 무력침공을 받을 경우 미국이 한국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공개적으로 해 줄 것 ▲ 미국이 주도하는 NATO와 같은 태평양지역동맹체를 결성하여 한국의 안전을 보장해 줄 것 등을 요청했다. 애치슨은 “특정 국가를 대상으로 하는 구체적인 군사공약은 생각할 수 없는 문제”라면서 이 요청을 거부했다. (남시욱, 《6.25전쟁과 미국》, 청미디어, p386)

     이승만은 1949년 8월20일 트루먼 대통령에게 공한을 보내, 한국군이 2일 분의 탄약밖에 보유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설명하고 필요한 무기와 탄약을 공급해 달라고 요청했다. 트루먼은 “한국이 감당할 수 없는 대규모 군사력의 유지보다 건실한 경제개발이 더 중요하다”는 말로 이 요청을 거부했다. (유영익 엮음, 앞의 책 (온창일, <전쟁지도자로서의 이승만 대통령>, p205)

    호위구축함급 군함의 제공을 요청했지만, 미 합참은 이것도 거절했다.

    결국 우리 해군 장병들의 성금으로 해양실습선 한 척을 구입해서 거기에 포(砲)를 탑재하고 백두산함이라고 명명했다. 이 배가 6.25 발발 직후 부산에 상륙하려던 적 수송선을 격침시킨 ‘구국의 배’가 되었다.

     미국은 군사원조만 거부한 것이 아니라, 판매도 거부했다. 국민들의 성금으로, 전투기도 아닌 T-6훈련기 10대를 미국에서 구매하려 했지만, 거부당했다. 한국은 이 비행기를 캐나다로부터 도입해야 했다.  

      트루먼 정부는 군사원조를 희망하는 이승만에게 ‘경제개발’에 전념할 것을 촉구했지만, 그에 대한 지원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트루먼 정부는 1억5000만 달러 규모의 대한원조법안을 제출했지만, 1950년 1월 미 하원은 본회의 심의 단계에서 이를 6000만 달러 규모로 삭감했다.
    이마저도 하원 표결에서 1표 차로 부결되고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미 하원은 1950년 회계연도분으로 1억 2000만 달러, 1951년 1억 달러, 도합 1억 2000만 달러를 배정했다. 

     하지만 이 예산이 집행되기 전에 6·25가 터지고 말았다.

  • ▲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건국 선포식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이 다시 한 번 미국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이나 아닌지 노심초사했다.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이승만이 1949년 12월 장면 주미대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국은 태프트-가츠라 조약과 일본의 한국합병에서 보았듯이 또다시 일본을 위해 한국을 포기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 것은 이러한 불안감의 반영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불안은 1950년 1월12일 ‘애치슨 선언’으로 가시화되었다. 유사시 유엔을 통한 개입의 여지를 남겨두었다고는 하지만, ‘애치슨라인’이라고 하는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방위선에서 한국이 배제된 것은 사실이었다. 

    애치슨선언이 나오자 이승만은 임병직 외무부 장관을 경무대로 불러 “애치슨 국무장관 연설의 전말과 진의를 규명하여 즉각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장면 주미대사는 애치슨 장관, 딘 러스크 극동담당차관보 등을 비롯한 국무부 관계자들과 접촉, “극동에서의 미국의 방위선은 한국을 포함하도록 연장, 수정되어야 한다”는 한국 정부의 희망사항을 전달했으나, 만족할만한 답변을 얻지 못했다.(박실, 《벼랑 끝 외교의 승리》, 청미디어, 2010, p169-172)

     애치슨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이 선언은 남침을 모의하던 김일성, 스탈린, 마오쩌둥에게는 둘도 없는 청신호였다.  

    사실 애치슨의 이런 입장 천명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의회에서 대한원조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애치슨은 하원 외교위원회에서 “우리는 아마도 미국의 군사력으로 한국인들에게 그들의 독립을 보장하지 못할 것” 이라고 말한 바 있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미국의 앞잡이’였다면, 미국이 대한민국 건국에서 6·25에 이르는 시기 동안 이렇게 이승만을 박절하게 대할 수 있었을까?

    6. 한국전쟁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쟁취’

     결국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터졌다.
    이승만은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입장이 되었다. 7월14일에는 우리 국군의 작전권을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에게 넘겼다. 맥아더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기념식장에서 “대한민국이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을 받을 경우, 캘리포니아를 지키듯이 한국을 방위하겠다”고 이승만에게 다짐했었다. 그리고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그 약속을 지켰다.
    그런데 9월 28일 서울수복을 수복하기 직전, 맥아더는 워싱턴으로부터 한 통의 전문(電文)을 받았다. “이승만 정권을 회복하려는 당신의 계획은 고위층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미국은 여전히 이승만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맥아더는 즉각 “현존하는 정부가 기능을 정지하였던 일이 없다는 사실에 비춰 서울의 상황이 합당한 안정을 허용하리만큼 충분히 안정되는 즉시 (이승만) 정부는 그곳으로 복귀되어야 할 것이다”라며 반박성 전문을 보냈다. 

  • ▲ 6.25전선을 시찰하는 이승만 대통령과 밴플리트 미군사령관.
    ▲ 6.25전선을 시찰하는 이승만 대통령과 밴플리트 미군사령관.

    맥아더와는 유엔군사령관으로 재직하는 내내 이승만과 시종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밴플리트는 이승만을 마음에서부터 존경했다. 그는 이승만을 '대한민국의 위대한 애국자, 강력한 지도자, 강철 같은 사나이, 그리고 자기 체중만큼의 다이아몬드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닌 인물'이라고 극찬하면서 흠모했다. 리지웨이나 클라크는 이승만의 고집에 대해서는 고개를 흔들면서도 그의 불굴의 애국심에 대해서는 존경을 표했다. 이는 다분히 이승만의 인품과 경륜, 학력의 소산이었다. 태평양전쟁 당시 장제스과 조지프 스틸웰의 갈등이 가져온 후과(後果)를 생각하면, 이승만이 당시 한국에 파견된 미군 장성들과 대체로 우호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대한민국을 위해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1951년 이후 휴전협정이 진행되기 시작하면서 이승만과 미국의 갈등은 다시 내연(內燃)하기 시작한다. 미국은 한국전쟁이 세계대전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휴전으로 한국전쟁을 ‘봉합’하려 했다. 미국인들은 그들이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서 자신들의 자식들이 죽어가야 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영국 등 미국의 동맹국들도 하루 빨리 한국에서 발을 빼고 싶어 했다. 때문에 ‘휴전은 한국에 대한 사형집행영장’이라며 북진통일을 외치는 이승만과 미국의 갈등은 불가피했다. 좌파학자들의 견해대로 이승만이 ‘미국의 앞잡이’였다면 미국의 휴전요구에 대한 그의 저항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휴전협정의 막바지 단계에서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을 통해 이승만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이승만은 클라크 사령관에게 이렇게 답했다.

  • ▲ 휴전후 미국을 공식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이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1954.8)
    ▲ 휴전후 미국을 공식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이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1954.8)


    “우리는 살기를 희망하오. 분명히 말해 두지만 우리는 생존을 희망하는 것이오.
    그렇소.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 결정하겠소.
    우리 민족은 영원히 존속해야 하오. 민족의 생존권은 어느 누구도 박탈할 수 없소.
    미국이? 천만에. 좀 안 됐지만 나는 이러한 정세 아래서 협력하겠다는 보장을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줄 수 없소.
    나 이승만은 미국인이 아니오.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우리 한국의 대통령이 아니오.
    이 나라의 대통령은 나요. 나는 내 민족을 위해서 분명히 내 주장을 펼치겠소.
    이는 우리 민족이 바라는 것이오. 이해하여 주기 바라오.”
    (마크 K. 클라크,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 국제문화출판공사, 1981, p448)

     클라크 사령관은 6월7일 “이 대통령이 지극히 비합리적이고, 전혀 양보할 기미가 없다”고
    미 합참에 보고했다. 

  • ▲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반공포로들이 이승만 대통령 사진과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1953.6.18)
    ▲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반공포로들이 이승만 대통령 사진과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1953.6.18)

    그리고 같은 달 18일 이승만은 2만 7000여명의 반공포로 석방을 단행했다.
    다음날 각료회의를 소집한 아이젠하워는 이렇게 푸념했다. “간밤의 몇 시간처럼 나는 나보다 더 현명한 동료의 조언을 갈구한 적이 일찍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절망적인 순간에 도달한 느낌마저 듭니다. 나는 동양에서 한 5년간 복무를 한 적이 있는데, 한 가지 배운 일은 도대체 동양사람들의 심리상태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박실, 앞의 책, p317-318)

    1944년 6월, 유럽의 명운을 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총지휘했던 사람답지 않은 푸념이다. 하지만 아이젠하워는 이날 회의를 “한국에서는 아직도 공산주의가 우리의 주적(主敵)이다” (유영익 엮음, 앞의 책 (차상철), p230)라는 말로 끝맺을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아마 미국이 이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내다보았을 것이다.
    덜레스 미 국무장관은 양유찬 주미대사에게 “이 대통령의 처사는 등 뒤에서 칼로 찌르는 격”이라고 비난했다. 

     미국은 이렇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이승만을 제거하려는 생각도 여러 번 했다. 미국은 이미 1952년 5월 부산정치파동 당시에도 이승만 제거 계획을 모색한 바 있었다. 미 8군 사령관 맥스웰 테일러(그의 아들이 리처드 C.알렌이라는 가명으로 이승만을 극히 부정적으로 묘사한 《한국의 이승만; 허가받지 않은 그의 초상》이라는 책을 쓴 존 M.테일러이다)는 이러한 기존 계획을 토대로 하여 ‘에버레디 계획’을 작성했다. 그것은 한국군이 유엔군의 작전권을 벗어날 경우 반항적인 지도자들을 제거하고, 그들에 대한 모든 지원을 중단하며, 필요할 경우 유엔군 지휘 하의 군사정부 수립도 검토한다는 내용이었다. (김일영, 《한국현대정치사론》, 논형, 2012,p108-109)

    하지만 이 계획은 미국 정부 내에서도 반대에 부딪혔다. 존 F.덜레스 국무장관은 “한국에서 미국이 싸우는 명분에 대치되는 계획과 행동은 생각할 수 없다” 며 반대했다.
    결국 미국은 ANZUS 수준의 방위조약을 한국과 체결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반공포로석방 후 방한한 로버트슨 미 국무부 차관보는 이승만과 힘겨운 줄다리기 끝에
    ‘휴전에 서명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방해하지는 않겠고’ ‘유엔군이 한국의 이익에 배치되는 행동을 하지 않는 한, 한국군을 그 휘하에 남겨두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 ▲ 이승만 대통령(뒷줄 가운데)이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서멍하는 변영태 외무장관과 덜레스 미국무장관을 지켜보고 있다.(1953.8.8)
    ▲ 이승만 대통령(뒷줄 가운데)이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서멍하는 변영태 외무장관과 덜레스 미국무장관을 지켜보고 있다.(1953.8.8)

    그 대신 로버트슨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 전후 복구를 위한 경제 원조, 20개 사단으로 한국군 증강 등을 약속해야 했다.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됐다. 서울에서 변영태 외무부 장관과 덜레스 미 국무장관이 ‘대한민국과 미합중국간의 상호방위조약(한미상호방위조약)’에 가(假)조인한 것이 그해 8월8일, 양국 대표가 이 워싱턴에서 이 조약에 공식적으로 조인한 것이 10월1일이었다. 이 조약은 양국 의회의 비준을 거쳐 이듬해 11월17일 정식으로 발효되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가조인된 다음날인 1953년 8월 9일, 이승만은 대국민담화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이제 한미방위조약이 체결되었음으로 우리의 후손들은
    앞으로 누대에 걸쳐 이 조약으로 말미암아 갖가지 혜택을 누릴 것이다.
     이 분야에 있어서 한미 양국의 공동노력으로 
    외부 침략자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여 우리의 안보를 오랫동안 보장할 것이다.”  

    이승만의 말처럼, 우리는 지난 60여 년 동안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인한 혜택을 만끽했다.
    몇 가지 국지적인 분쟁을 제외하고는 지난 60여 년 동안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하지 않았던
    것도, 개발연대에 경제발전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도, 산업화의 성과를 바탕으로 민주화로 이행할 수 있었던 것도, 1980년대 이래 데모와 파업으로 날을 지새워도 휴전선이 지켜질 수 있었던 것도, 오늘날 지척에 있는 북한공산집단으로부터 도발 위협을 받고 있으면서도 GDP 대비 2.42%밖에 국방비를 쓰지 않으면서 유유자적할 수 있는 것도, 다 한미상호방위조약 덕분이다.

    무엇보다도 한국이 낡은 중국문명의 탯줄을 끊고 해양국가로 문명사적 전환을 할 수 있도록
    결정적으로 담보해 준 것이 바로 한미방위조약이었다.

    이 조약은 미국이 자신의 ‘앞잡이’인 이승만에게 미국이 거저 준 선물이 결코 아니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미국의 휴전 노력에 완강하게 저항하고, 때로는 몽니를 부리면서,
     ‘쟁취’해 낸 것이다. 이를 위해 이승만은 자신의 정치적 생명까지 걸어야 했다. 

    냉전사의 대가인 존 루이스 개디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승만은 휴전을 파기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으나
    아이젠하워 행정부에 ‘종속된 동맹국(dependent ally)'라고 해서
    반드시 ’맹종하는 동맹국(obedient ally)'는 아니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존 루이스 개디스, 《냉전의 역사》, 에코 리브로, 2010,  p183)

  • ▲ 미국의 일방적인 휴전 협상에 전국문이 휴정반대 궐기대회를 열었다.
    ▲ 미국의 일방적인 휴전 협상에 전국문이 휴정반대 궐기대회를 열었다.

    휴전협정 조인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 발효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이승만은 다시 한번 미국의 애를 태웠다. 휴전협정 발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군 단독 북진’을 외쳤던 것이다.
    그를 달래기 위해 아이젠하워는 그해 11월 부통령 리처드 닉슨을 한국으로 보냈다.
    아이젠하워는 닉슨 편에 보낸 친서에서 “한국의 독자적인 행동으로 전쟁이 재발할 경우에는 유엔군은 한국군을 돕지 않을 것이며, 모든 경제원조가 중단되고, 유엔군은 모든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라고 위협했다 (이 무렵 미 합참은 존 E.헐 주한유엔군사령관에게 앞서의 에버레디 작전을 구체화하라는 지시를 내려놓은 상태였다).

  • ▲ 이승만 대통령은 주요외교문서들은 직접 작성했다. 유학생때 쓰던 타이프라이터는 대통령 사퇴할때까지 사용했다.(사전은 대통령 관저 경무대 집무실에서)
    ▲ 이승만 대통령은 주요외교문서들은 직접 작성했다. 유학생때 쓰던 타이프라이터는 대통령 사퇴할때까지 사용했다.(사전은 대통령 관저 경무대 집무실에서)

    하지만 이승만은 닉슨에게 “내가 언제든지 독자적인 행동을 취하기 전에 반드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먼저 알려 줄 것을 맹세하겠다”고 대꾸했다. 닉슨이 이승만을 설득하는데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실의에 빠져 귀국길에 오르기 직전, 이승만은 직접 타이핑한 종이를 닉슨에게 건네주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미국이 평화를 원하기 때문에 이를 위해선 어떤 양보라도 할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본인(이승만)에 대해서는 평화를 위해서 무슨 양보라도 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미국은 이승만이 무슨 일을 할 지도 모른다는 공산주의자들의 의혹을 제거해 주어서는 안 된다. 본인이 모종의 행동을 시작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공산주의자들에게 부단한 제동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승만은 자신이 밝힌 ‘독자적 행동 운운’은 결국 미국을 돕기 위한 것이며, 미국의 도움 없이
    한국만의 단독행동은 불가능하며, 한미 두 나라는 반드시 공동보조를 취해야 한다는 언질을 비로소 주었다. 후일 닉슨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한국 국민들의 용기와 인내, 이승만 대통령의 정신력과 지혜에 깊은 감명을 받은 채 한국을 떠났다. 나는 또한 공산주의자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 예측을 불허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 대통령의 통찰을 곰곰이 생각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여행을 하면 할수록, 많은 것을 배우면 배울수록 그 노정치가가 참으로 현명했음에 더욱 더 감탄하게 되었다.> 

  • ▲ 한국을 방문한 닉슨 부통령 부부와 환담하는 이승만 대통령 부부.
    ▲ 한국을 방문한 닉슨 부통령 부부와 환담하는 이승만 대통령 부부.

    1950년대 이승만 외교가 지니는 중요한 특징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정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벼랑 끝 외교전략을 유효적절하게 구사했다는 점이다. 벼랑 끝 외교 전략에는 상황적 필요에 따라 엄포나 협박, 그리고 최후통첩과 같은 방법이 사용되었지만, 그것은 대한민국의 안정보장과 국가이익의 극대화를 달성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때, 그가 선택한 마지막 수단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경험과 역사적 사례를 통하여 국제정치의 생리에도 밝은 현실주의자였다. 따라서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더 이상의 양보를 얻어내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경우에는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무모한 자폭행위를 결코 범하지 않았다.

    대미협상에서 발휘된 이승만의 역할은 저명한 미국의 외교사가(Howard K. Beale)이 적절히 비유한 대로 체스 판의 단순한 졸(卒) 이 아니라 “상장(上將)격의 졸‘이었다. 

    7. 전후의 한미갈등과 이승만의 실각

    6.25가 끝난 후에도 미국과 이승만의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다. 이승만과 미국은 국제정치(한일국교정상화), 경제(미국의 대한원조, 환율정책), 국내정치(사사오입 개헌, 국가보안법 파동, 조봉암 처형), 군사(한국군 감축) 등 곳곳에서 부딪혔다. 

    김일영 교수는 이 당시 이승만과 미국의 갈등, 특히 이승만의 반일정책을 둘러싼 갈등을 ‘동아시아 정책을 둘러싼 이승만과 미국의 충돌’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 다음은 김일영 교수의 주장이다.

    <아이젠하워 정부의 대외정책은 ‘뉴룩(New Look)전략’이었다. 그것은 공화당 내의 대외개입주의 노선과 재정보수주의노선 사이의 타협의 산물이었다. 이 전략에 따라 일본은 미국의 용인 아래 경제를 중시하는 노선을 선택할 수 있었던 반면, 여타 국가들, 특히 한국과 대만은 군사우선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미국의 대아시아 경제정책은 일본을 중심으로 한 수직적 지역분업을 지향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에 대해서는 공업화 억제방침이 취해졌고, 일본을 중심으로 한 지역적 분업체제에의 편입이 대한정책의 여러 국면에서 강제되었다. 그것은 한국정부로 하여금 미국이 제공한 원조의 상당 부분을 일본으로부터의 물자구입에 돌리게 강제함으로써 동일한 액수의 원조로 한일양국을 동시에 부양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두 나라에 가져오는 결과는 차별적이었다. 일본은 경제를 발전시키겠지만, 한국의 부흥노력은 그만큼 더뎌지고, 경제면에서 일본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한국은 일본이 면제받은 군사비 부담까지 져야 했다. 

    1950년대 아시아 최대의 원조수혜국이었던 한국의 이승만 정부와 미국 사이의 원조물자의 대일(對日)구매를 둘러싸고 격한 대립(때로는 원조의 일시적 정지까지도 포함한)이 전개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그리고 이것을 이해할 경우 우리는 이승만의 반일노선의 이면에 깔린 또 다른 측면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정치적 상징조작에 그치지 않고, 동아시아에서 한국의 정치·경제적 위상을 정립하는 문제와도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일영, 《한국현대정치사론》, 논형, 2011, p121)

    올리버도 김일영 교수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주장을 한 바 있다. 그는 “일부 이 대통령의 비판자들은 그가 과거에 일본으로부터 자신과 한국이 받은 부당한 대우 때문에 ‘반일적’이 되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사실 이 대통령은 현재의 여러 동향과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 훨씬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면서 “한국의 군사적 상황에 대한 그의 견해와 일본을 아시아의 강대국으로 다시 세우려는 미국의 지원에 대한 그의 불만으로 말미암은 이 대통령과 미국 정부 사이의 긴장관계는 한국 원조프로그램의 운영에 대한 의견충돌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로버트 T.올리버 《이승만의 대미투쟁》(하), 비봉출판사, 2014, p701)

    김일영 교수는 이승만의 북진통일론과 1952년의 부산정치파동도 미국의 동북아전략과 그에 대한 이승만의 반발이라는 관점에서 본다. 그는 “북진통일론을 단순히 호전적 반공주의자의 공갈로만 본다면, 직선제 개헌론 역시 독재자의 권력연장술책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북진통일론을 일본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미국의 동아시아정책과 재분단을 겨냥한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대한 약소국의 견제수단이자 협상수단으로 생각한다면, 직선제 개헌론은 집권연장책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고 말한다.  

    부산정치파동 당시 무초 주한미국대사는 장면을 지지했고, 밴플리트 장군은 미국이 반이승만적 입장임을 한국 군부 장성들에게 암시하고 다녔다. 앞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이때도 미국은 유엔군 혹은 한국군을 동원해 정권을 접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육군작전교육국장 이용문 준장은 이러한 미국측 계획에 호응해 병력동원을 모색했다. 이때 실병지휘관으로 예정되어 있던 사람이 작전교육국 차장 박정희 대령이었다. 하지만 전쟁지도자로 이승만에 버금가는 인물을 찾지 못한 미국은 대통령직선제를 주장하며 사실상의 친위쿠데타를 감행한 이승만과 내각책임제 개헌을 주장하던 야당간의 타협을 요구했다. 그 결과가 발췌개헌이었다. 사실상 이승만의 승리였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위기상황이 끝나자, 미국은 이승만에 대해 더 이상 인내하기 어려워졌다. 
    사사오입 개헌, 국가보안법 파동, 경향신문 폐간, 조봉암 처형 등을 두고 한미간 갈등은 쌓여만 갔다. 이런 와중에 국내정치에서 터져 나온 터무니없는 부정선거와 그에 대한 한국국민들의 분노는 미국에게 이승만이란 부담을 덜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월터 매카너기 주한미국대사는 4·19 후인 1960년 4월26일 이승만과 면담, ‘존경받는 자리로 은퇴하라’고 권했다. 김정렬 등의 회고에 의하면, 이승만은 매카너기의 권고 이전에 사퇴를 결정,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하야를 결단했다. 

  • ▲ 사퇴한 이승만 대통령이 이화장으로 돌아오자 시민과 학생들이 담장에 써붙인 글들이다.
    ▲ 사퇴한 이승만 대통령이 이화장으로 돌아오자 시민과 학생들이 담장에 써붙인 글들이다.

    결론

     미국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아 ‘개화’한 이승만은 청년 시절 이래 평생 이 땅에 ‘미국처럼 자유롭고 민주적이며 번영하는 기독교 국가’를 만들겠다는 꿈을 가졌다. 이런 의미에서 이승만은 부인할 수 없는 친미주의자였다.

     하지만 독립운동 시기는 물론이고 해방 후 건국에 이르는 시기, 6·25 전쟁 중, 그리고 전후 재건기에, 이승만은 내내 미국과 대립하고 갈등을 빚었다. 이는 이승만의 독립의지와 애국심·자주성이, 한국의 국제전략적 가치를 미미하게밖에 보지 않는 미국의 대외정책과 충돌한 결과였다. 

    이승만은 그런 상황에서 국제정치에 대한 통찰력, 단호한 결단력을 바탕으로 ‘벼랑끝 외교’ 전술을 구사하면서 최대한의 외교적 성과를 이루어냈다. 대한민국의 건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은 그 양대 정점(頂點)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적어놓았다고 한다.

    “이승만이 철저하게 비협조적이고, 나아가 반항적이기까지 한 사례들을 담은 긴 목록을 만들어서 열거하기 위해 시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이승만은 지금까지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는 동맹자(an unsatisfactory ally)였기 때문에 그를 가장 심한 말로 통렬히 비난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는다.” (유영익 엮음,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 (차상철, <외교가로서의 이승만 대통령>),p162)

     더 나아가 아이젠하워는 CIA국장에게 “이승만은 우리의 친구가 아니라 적”이라고 투덜대기까지 했다. 미국 대통령이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는 동맹자’, 더 나아가 ‘적’이라고까지 극언했던 분을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미국의 앞잡이’라고 폄하하고 있다.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마지막으로 차상철 충남대 교수가 <외교가로서의 이승만 대통령>에서 한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오늘 우리가 다룬 주제의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태어날 신생 독립국가의 최고 지도자가 되려는 커다란 야망을 품어온 이승만은 맹목적인 친미주의자는 결코 될 수 없었다. 수십년 동안 미국 유학과 망명생활을 하면서, 미국이 저질렀던 배신행위와 기만, 그리고 무관심으로 이승만이 겪어야만 했던 쓰라린 체험들은 그로 하여금 맹목적 친미주의자가 아니라 미국의 정치와 외교의 속설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철저한 ‘지미(知美)주의자’로 만들었다. 나아가 강대국에 의한 약소국의 희생이 다반사처럼 자행되는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에서, 이승만은 초강대국인 미국이 지닌 힘과 영향력을 너무나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과 생존의 확보를 위해 미국을 반드시 붙잡아야만 하는 ‘유일한’국가라고 믿었던 철저한 용미(用美)주의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