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 충호(忠虎) 31호:2015년 6월/www.chnsu.kr 02-778-4202>

    120년이 지난 일이지만, 모르고 지낼 수는 없다
    = 청년 李承晩이 쓴 『청일전쟁』에 대한 기록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 이 책 《청일전기(淸日戰記)》는 제목 그대로 청일전쟁에 대한 기록이다.   
    원래 이 책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 ‘영 J.알렌’과 중국 언론인 채이강이
     1897년 《중동전기본말(中東戰記本末)》이라는 이름으로 펴낸 것이다. 

     《중동전기본말》은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도 주목한 책이었다.
    1899년 사학자 현채와 언론인 유근이 이 책을 발췌해 《중동전기》라는 제목으로 펴냈다.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한성감옥에 수감 중이던 이승만은 이듬해 《중동전기》를 자신의 관점으로 다시 발췌하여 정리한 후 여기에 ‘전쟁의 원인’, ‘권고하는 글’이라는 논설을 덧붙여 이 책을 지었다.
    《청일전기》가 세상에 나온 것은 나라가 망한 후인 1917년.
    이승만의 망명지 하와이 호놀룰루에서였다. 서문에서 이승만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한인들이 오늘날 유구국이나 대만 인종들의 지위를 차지하고 말 것 같으면 
    이 전쟁의 역사를 알아도 쓸데없고 오히려 모르는 것이 나을 터이지만, 
    우리는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여 태평양이 마르고 히말라야가 평지가 될 지라도 
    우리 대조선 독립은 우리 한인의 손으로 회복하고야 말 터인즉 
    우리 한인이 갑오전쟁(청일전쟁)의 역사를 모르고 지낼 수는 없다.”
  • 한성감옥에 수감 중인 이승만과 옥중 개화당 동지들. 왼쪽 중죄수 복장이   이승만이다(1903).
    ▲ 한성감옥에 수감 중인 이승만과 옥중 개화당 동지들. 왼쪽 중죄수 복장이 이승만이다(1903).
    거짓 보고하는 將帥, 모래 넣은 포탄

    이 책에 나오는 청나라 정부나 군대의 모습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청군을 이끌고 조선에 상륙한 청나라 장수 섭지초는 아산 등지에서 일본군과 접전, 연전연패하고 평양으로 후퇴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승전했다고 거짓보고를 올려 1894년 8월 서태후와 황제로부터 잇달아 은상(恩賞)을 받는다.
    청나라 황제가 그의 보고가 거짓이었다는 것을 알고 전에 내렸던 상을 거두어들이는 것은 이듬해 2월15일이고, 섭지초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은 다시 두 달 뒤였다.
    이때는 이미 일본군이 요동반도로 진공(進攻), 북경을 노리고 있을 때였다.

    군 지휘관의 거짓보고, 상황파악을 못 하고 헤매는 국가지도부의 모습이 남의 일 같지 않다.
    천안함사태나 연평도사태, 혹은 병영 내 총기난사 사건 같은 것이 났을 때에 우리 군 지휘부 혹은 국가지도부가 보여줬던 모습도 거기서 크게 다르지 않다면 지나친 얘기일까?
  • 청일전쟁 당시 청나라 철갑함 정원(定遠)
    ▲ 청일전쟁 당시 청나라 철갑함 정원(定遠)
더 한심한 것은 청군의 고질적인 군수(軍需)비리였다.
부패한 관리와 지휘관들은 뇌물을 받고 엉터리 무기들을 도입했고,
그 때문에 실전이 벌어지자 청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졌다.

<청군이 사용한 소총은 감사와 대신들이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서
양인들이 쓰다 버린 것을 수입해 온 것으로, 소총의 구경과 탄환이 맞지 않는 등
엉망이어서 아무리 맹장(猛將)이어도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설령 소총과 탄약이 정상이었다 해도 장수와 병사들이 훈련되어 있지 않았고 전술에 어두웠다.>

 <청국 육군의 포탄은 제조 과정에서 협잡배가 화약은 넣지 않고 진흙과 모래를 집어넣어
전쟁에서 낭패를 당했다. 해군의 포탄은 육군 포탄보다는 성능이 우수했으나 화약의 폭발력이
약해 일본 함정을 맞춰도 파괴력이 없어 낭패를 당했으며, 함정의 기동성이 떨어져 더 많은 피해를 당했다.>

 <대포 한 문 값이 1000원이라고 탁지부에 보고한 후 200~300원은 언제나 자기 주머니에 넣고 500~600원을 들여 사다가 숫자만 채웠을 뿐 이 대포가 제 성능을 발휘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어디서 많이 본 얘기 같지 않은가?
총탄에 뚫리는 방탄복, 적 잠수함을 탐지하지 못하는 구형 소나를 장착한 군함,
고장 난 함포와 자주포, 무겁고 고장 잘 나는 복합소총, 갈지자 운행을 하는 고속정,
대공(對空)미사일이 없는 이지스 구축함, 물에 가라앉는 수륙양용장갑차,
북한이 보유한 지대공 미사일을 피하지 못하는 공군의 미사일 회피 훈련 장비….

그런 식으로 납품된 불량 무기, 불량 장비로 무장한 장병들이 유사시 제대로 싸울 수 있을까?
부하 장병들의 목숨을 돈과 바꾸는 부패한 군 지휘부에게 군대를 맡길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 모골이 송연해 진다. 

멸시받는 나라 조선

청나라만 한심하고 참담한 것은 아니다.
자기 나라를 이웃의 전쟁터로 내주어야했던 조선은 더 했다.
일본과 청나라의 대관(大官)들이 조선을 멸시하는 내용을 보면, 살이 떨릴 지경이다.

 <기왕의 사건에서 더듬어 볼 때 조선반도는 붕당으로 인한 내분과 폭동의 온상이 되어 버리는 등 참상을 드러냈고, 이 같은 사변이 자주 발생한 이유는 독립국으로서의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요소를 결여했기 때문이라고 확신하기에 충분합니다.> (1894년 6월22일, 일본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가 도쿄주재 청나라 공사 왕봉조에게 보낸 서신)
  • 청일전쟁의 주역인 청나라 리훙장(李鴻章, 1823~1901·사진 왼쪽)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오른쪽)
    ▲ 청일전쟁의 주역인 청나라 리훙장(李鴻章, 1823~1901·사진 왼쪽)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오른쪽)
  • 강화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시모노세키에서 만난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가 나누는
    수작도 가관이다.
     <이토 : “귀국 인민은 조선 사람보다 국가의 법을 잘 따르고 생업에 부지런하니
               백성을 다스리기가 쉬운 듯 합니다.”
     이홍장 : “조선인민은 원래 나태합니다.”>

    무쓰나 이토, 이홍장만 조선을 멸시하는 게 아니다.
    《중동전기본말》을 쓴 알렌이나 채이강도 “조선은 어리석고 겁이 많으며 줏대가 없고
    이민족에게 눌려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속국” 이라고 말한다. 
  • 청일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청-일간 ‘馬關條約(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 (1895년 4월 17일). 일본은 요동반도를 차지하고 조선은 독립국임을 명문화, 청나라로부터 조선을 떼어내는데 성공한다.
    ▲ 청일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청-일간 ‘馬關條約(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 (1895년 4월 17일). 일본은 요동반도를 차지하고 조선은 독립국임을 명문화, 청나라로부터 조선을 떼어내는데 성공한다.

  • 화가 났다.
    도대체 당시 조선의 위정자(爲政者)들은 나라를 어떻게 다스리고,
    백성들을 어떻게 이끌었기에, 이웃나라로부터 저렇게 멸시를 받게 만들었단 말인가?

    그러나 조상들만 탓할 일도 아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미국이나 일본에 대해서는 작은 건덕지만 있어도 그렇게 용감하게 대들면서,
    중국정부나 중국인들의 오만방자한 작태에 대해서는 정부건, 언론이건, 시민들이건,
    꿀 먹은 벙어리다. 이를 두고 ‘어리석고 겁이 많으며 줏대가 없고 이민족에게 눌려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속국’ 기질의 소산이라고 하면 지나친 얘기일까?
  • 중국 해군은 갑오전쟁 120주년을 맞이하여 해상 추모식 갖고,   북양(北洋)해군 장병들을 추모했다.(2014년 8월 27일)
    ▲ 중국 해군은 갑오전쟁 120주년을 맞이하여 해상 추모식 갖고, 북양(北洋)해군 장병들을 추모했다.(2014년 8월 27일)

    다시 요동치는 東北亞

    청일전쟁이 끝난 지 꼭 120년이 되는 지금, 한반도 주변 정세는 다시 급변하고 있다.
    120년 전에는 일본이 청나라 중심의 기성질서에 도전하는 형국이었지만,
    지금은 중국이 미·일이 구축해 놓은 기존의 동북아질서에 도전하고 있는 양상이다.

     한때 ‘이만 하면 우리나라 국력도 만만치 않다’고 자부했던 적도 있지만,
    중국·일본 등의 거대한 국력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동북아 정세가 요동치는 오늘날, 《청일전기》는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볼만한 책이다. 
    역자(譯者)들은 100여 년 전의 글을 현대어로 옮기고, 이승만이 난삽하게 옮긴 외교문서 등은
    적절한 번역문을 찾아내 대치했다.
    권말(卷末)에 ‘청일전쟁 이해에 필요한 배경지식’(김용삼-김효선)을 실어
    책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