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 후 재의결은 당청 파탄, 비상정은 여야 파탄23일 국무회의서 심의하겠지만 행사 여부는 아직
  •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가능성이 정치권을 떠돌고 있다. 이 가능성은 언제쯤 현실화 여부가 판가름날까. 그리고 만일 실제로 거부권이 행사된다면 향후 정국은 어떠한 방향으로 요동치게 될까.

    헌법 제53조 2항은 대통령의 거부권을 규정한다. 국회에서 의결한 법안이 정부로 이송되면 대통령은 15일 이내에 공포해야 하는데, 그 대신 이의서를 붙여 국회로 환부(還付), 재의를 요구할 수 있다.

    만일 박근혜 대통령이 실제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그 시점은 언제쯤이 될까.

  • ▲ 국회법 개정안의 정부 이송이 다음 주 중순인 10~11일로 늦춰진 것에는 정의화 국회의장(사진)의 정치적 심모원려가 깔려 있다는 지적이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국회법 개정안의 정부 이송이 다음 주 중순인 10~11일로 늦춰진 것에는 정의화 국회의장(사진)의 정치적 심모원려가 깔려 있다는 지적이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거부권 행사 시점 "총리 인준 이후, 23일 국무회의에서 심의 유력"

    헌법에 따라 정부로 이송된지 15일 이내에 거부권을 행사해야 하므로, 법안이 정부로 이송되는 시점이 중요해진다. 국회사무처 관계자는 "10~11일 무렵에 이송될 것"이라고 밝혔다.

    본회의에서 의결한 법안은 국회 의안과에서 오탈자 확인 절차 등을 거쳐 정부로 이송한다. 통상적으로 오래 걸릴 절차는 아니지만, 이번 경우에는 공무원연금법 개정안 등 처리해야 할 법안이 많아 평소보다 오래 걸린다는 것이 국회사무처 관계자의 설명이다.

    하지만 정치권 관계자는 "법안의 정부 이송이 늦어지는 것에는 몇 가지 정치적 복선이 깔려 있는 것 같다"며 "정의화 국회의장의 심모원려(深謀遠慮)"라고 해석했다.

    법안이 이송된지 15일 이내에 거부권을 행사해야 하지만, 현재의 정국에서는 정치적 사정 때문에 특정 시기 이전에는 이를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적 사정'이란 황교안 국무총리 후보자의 임명동의안 표결을 가리킨다.

    황교안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는 8~10일 사흘간 국회에서 실시된다. 이후 인사청문특위는 전체회의를 열어 경과보고서를 채택하고, 본회의에서 임명동의안 표결이 이뤄지게 된다.

    정치권 관계자는 "(임명동의안 표결이 이뤄지기에 앞서) 그 전에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입법부를 자극함으로써 황교안 후보자의 인준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변수는 또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미국 순방 일정이다.

    헌법 제89조에 따라 법률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는 국무회의의 심의사항에 해당한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이달 중순 미국을 방문한다. 매주 화요일 열리는 국무회의는 9일 열린 뒤, 16일 국무회의는 방미 관계로 건너뛰고 23일 다시 열릴 예정이다.

    만일 국회 측에서 3일 당장 법안을 정부로 이송한다고 하면, 18일까지는 거부권 행사 여부를 결정해야 하므로 23일 국무회의까지 심의를 미룰 여유가 없게 된다. 당장 9일 국무회의에서 거부권 행사 여부를 심의해야 하기 때문에 미리 정치적 물밑작업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하지만 국회사무처에서 밝힌대로 11일에 법안을 정부로 이송한다면 26일까지가 거부권 행사 시한이므로, 박근혜 대통령은 미국에 다녀온 뒤 23일 열릴 국무회의에서 거부권 행사 여부를 결정할 수 있게 된다.

    이 모든 정치적 스케쥴을 계산한 정의화 국회의장이 국회법 개정안의 이송을 일부러 다음주 중순으로 미뤘다는 것이 국회 관계자의 설명이다.

  • ▲ 국회법 제112조 5항에 따르면 대통령으로부터 환부된 법률안의 재의결과 인사에 대한 안건은 무기명 투표하도록 돼 있다. 사진은 지난 2월 16일 이완구 국무총리 임명동의안에 대한 무기명 투표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의원들의 모습.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국회법 제112조 5항에 따르면 대통령으로부터 환부된 법률안의 재의결과 인사에 대한 안건은 무기명 투표하도록 돼 있다. 사진은 지난 2월 16일 이완구 국무총리 임명동의안에 대한 무기명 투표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의원들의 모습.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거부된 법률안 재의는 무기명 투표… 사전 작업 없이는 재의결 가능성 높아

    그렇다면 거부권 행사에 앞서 해야 할 정치적 물밑작업이란 무엇일까. 어떤 작업이 필요하기에 거부권 행사 여부 결정에 앞서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 법안이 국회로 되돌아오면 상임위나 법사위를 거치지 않고 곧장 본회의 상정 절차를 밟게 된다.

    그런데 국회법 제112조 5항에 따르면 대통령으로부터 환부된 법률안은 무기명 투표로 표결하도록 돼 있다. 이는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의원들이 자유 의사에 따라 표결할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한 조항이다.

    여권 관계자는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법 개정안을 강력히 비판했기 때문에 지난 29일 새벽처럼 기명 투표를 한다면 여당 의원들이 많은 심적 부담감을 느꼈을 것"이라며 "하지만 재의는 무기명 투표이기 때문에 여당 의원들이 청와대의 의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물론 대통령이 거부한 법률안의 재의결에는 재적 의원 과반수가 출석해 출석 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하는 가중의결정족수가 적용되지만 "아무런 대책 없이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십중팔구 재의결될 것"이라는 게 정치권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재적 의원 298명 전원이 출석한다고 가정할 때 가중의결정족수는 199명. 현재 새정치연합 소속 의원이 130명이고 정의당이 5명, 친야(親野) 무소속인 천정배 의원이 있기 때문에 야권이 도합 136명이다. 여당인 새누리당의 160명 의원 중에서 63명이 찬성에 가담하면 재의결되는데, 이는 어렵지 않은 일이라는 게 정치권 관계자들의 전망이다.

    재의결이 돼버리면 공포 여부에 관계없이 법률안은 즉시 법률로서 확정되고, 더 이상 대통령조차도 손을 쓸 여지가 없다. 헌법 제53조 6항에 따르면, 그럼에도 대통령이 5일 이내에 공포하지 않을 경우, 국회의장이 이를 대신 공포한다.

    여권 관계자는 "이런 사태가 실제로 발생하면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에는 치명적인 타격이 가해질 뿐더러 당청(党青) 관계는 완전히 파탄이 나게 된다"며 "아무런 사전 셈법이나 물밑 교섭 없이 무작정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 ▲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뒤 여당이 본회의 상정에 응하지 않으면 당청 관계가 봉합되는 대신 여야 관계가 파탄을 맞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사진은 지난달 28일 심야 협상을 앞두고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와 새정치민주연합 이종걸 원내대표.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뒤 여당이 본회의 상정에 응하지 않으면 당청 관계가 봉합되는 대신 여야 관계가 파탄을 맞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사진은 지난달 28일 심야 협상을 앞두고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와 새정치민주연합 이종걸 원내대표.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거부한 뒤 재상정 안 하면 여야 관계 파탄… 내년까지 폐기도 안 돼

    여권 일각에서는 대통령이 일단 거부권을 행사한 뒤, 여당이 국회로 되돌아온 법안을 본회의에 상정하는 것에 응하지 않음으로써 이를 폐기하는 방안도 유력하게 거론된다.

    다만 헌법 제51조에 규정된 회기계속의 원칙에 따라, 6월 임시국회가 끝난다고 해도 국회법 개정안은 폐기되지 않는다. 내년 5월의 19대 국회의원 임기 만료로만 의안은 폐기된다.

    당청 관계는 봉합할 수 있겠지만 대신 여야 관계가 파탄을 맞이한다는 부담이 있다. 게다가 회기계속의 원칙에 따라 폐기되지 않고 계속해서 본회의에 언제든지 상정될 수 있는 상태로 대기하고 있는 국회법 개정안의 존재는 국회선진화법과 함께 두고두고 여당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법조 관계자는 "영국과 독일, 일본은 회기불계속의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에 하나의 회기, 예를 들어 6월 임시국회가 폐회되면 본회의에 상정되지 못한 의안들은 모두 자동 폐기된다"며 "하지만 우리나라와 미국, 프랑스는 회기계속의 원칙을 채택했기 때문에, 국회의원의 임기 만료로 19대 국회가 끝나는 내년 5월까지 계속해서 국회법 개정안이 언제든지 본회의에 상정될 수 있는 상태가 된다"고 설명했다.

    이후로는 어떠한 민생경제법안을 본회의에 상정하려고 해도, 야당이 국회법 개정안의 본회의 재상정이 우선이라고 선을 그어버리면 여야 협상의 돌파구를 찾기가 어려워진다. 민생경제법안 통과가 절실한 청와대로서도 뭐라고 여당 원내지도부를 닦달하기가 어렵게 된다. 결국 국정 자체가 꽉 막히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정치권 관계자는 이러한 시나리오를 설명하면서 "이래도 파국, 저래도 파국"이라며 "이송 전에 국회법 개정안의 독소 조항을 수정해 재의결을 하거나,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고 여야 협상을 통해 제3의 국회법 개정안을 마련하자는 주장도 있지만 쉽게 실현될 수 있을는지는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 ▲ 대법원 전경. ⓒ조선일보 사진DB
    ▲ 대법원 전경. ⓒ조선일보 사진DB

    ◆사법심사로 방향 틀 가능성은?… "대법원은 안 나설 것"

    뻔히 예상되는 정국의 파탄에 부담감을 느낀 박근혜 대통령이 거부권 행사를 포기하고, 행정부의 행정입법권 침해를 이유로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할 수도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이 경우에는 입법부와 행정부의 정면 충돌을 피해, 삼권분립의 또다른 축인 사법부의 해석을 구하는 우회 경로를 찾는 모양새가 된다.

    한편으로는 행정부가 직접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하는 것의 정치적 부담감을 줄이기 위해, 대법원이 나서서 헌법 제107조에 규정된 위법 명령·규칙·처분 심사권 침해를 이유로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해줘야 한다는 지적도 정치권 일각에서 제기된다.

    하지만 법조 관계자는 "대법원이 나설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며 "상고법원제 도입을 위해 법원조직법 개정 협조가 절실한 대법원이 국회와 각을 세우려 하지 않을 것인데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사이의 미묘한 감정 싸움을 고려할 때 대법원이 나서서 헌재에 판단을 구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