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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성의 친구' 시아누크, "李承晩은 級이 다른 高段手의 지도자"

    "많은 지도자들이 무장투쟁을 통하여 독립을 쟁취하려 하였는데,


  • 이승만은 외교를 통하여, 즉 세계정세의 흐름을 이용하여
    대한민국을 세웠습니다."

    趙甲濟   
      
       오늘 저녁 한 유명 법률학자(전 서울대 교수)와 식사를 하면서
    재미 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정부 기관장 자격으로 노로돔 시아누크 캠보디아 국왕(2012년에 사망)을 만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시아누크 왕은 89세로 별세할 때까지 격동하는 인도지나 역사 속에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낸 이다. 크메르 루즈 집권 이후 10여 년간 북경과 평양을 오가면서 망명생활도 하였다.
    특히 김일성과 친밀하였다.
       그런 그가 한국인 학자 앞에서 李承晩 대통령을 극찬하더라고 한다.
    이 학자가 전해준 시아누크의 평은 이러하였다.

  • 북한서 망명생활 하며 김일성과 친했던 캄보디아 국왕 시아누크는 평양을 방문, 김정일에게 훈방도 주었다. 오른쪽은 국왕부인.
    ▲ 북한서 망명생활 하며 김일성과 친했던 캄보디아 국왕 시아누크는 평양을 방문, 김정일에게 훈방도 주었다. 오른쪽은 국왕부인.

     
      
       "李承晩은 戰後 신생국가의 지도자 중 급이 다른 이였습니다.
    많은 지도자들이 무장투쟁을 통하여 독립을 쟁취하려 하였는데,
    이승만은 외교를 통하여, 즉 세계정세의 흐름을 이용하여 대한민국을 세웠습니다.
    수가 많고 수준이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1950년대에 아시아를 대표하는 반공 지도자였습니다.
    한국의 월남 파병은 박정희 대통령에 의하여 이뤄졌지만
    그 전에 李承晩 대통령이 월남파병을 위한 공작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공산당이 득세하자 인도네시아 정부에 파병을 제의한 적도 있습니다.
    (수카르노 대통령 시절인 듯). 오늘날 대한민국의 발전은 이승만 덕분입니다."

     
       이 학자는 김일성과 친하였던 시아누크의 이승만 칭찬에 놀랐다고 한다.
    귀국하여 자료를 찾아보고는, 이승만이 월남 파병을 위한 탐색을 한 적이 있음읊 확인하였다.

    시아누크 왕은 냉전 시절에 서양과 공산 진영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약소국인 캠보디아의
    國益을 지키기 위하여 현란한 외교를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런 사람이 이승만을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高手의 지도자였다"고 평한 셈이다. 이승만을 상대로 하면서 그의 장단점을 관찰한
    미국 대사 무초는 퇴임 후의 증언에서 "李 대통령은 국제정세를 고차원에서 이해한 사람이다"고 평했다.
       시하누크의 말대로 국제 외교를 통한 독립과 건국이야말로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한의 國益을 도모하는 최고의 정치이다.
    (한국에는 무장독립투쟁에 대하여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위대한 통찰력에 기초한 고매한 인격이어야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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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7월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에 서명한 유엔군 사령관은 마크 W. 클라크 대장이었다. 그는 轉役한 뒤 '다뉴브에서 압록강까지'라는 회고록을 썼다.
    클라크 장군은 자신이 상대하였던 李承晩 대통령에 대하여 생생한 체험기를 남겼다.
    유엔군, 특히 미국의 도움으로 전쟁을 치르면서도 자존심을 세우면서 고집스럽게 國益을 추구하는 老투사의 모습을, 존경심을 깔고 객관적으로 묘사하였다.
    그는 휴전을 반대하는 李 대통령 때문에 수많은 곤욕을 치렀지만 記述(기술)은 결코 적대적이지 않다. 李 대통령의 애국심과 교양, 그리고 용기에 감동한 사람처럼 썼다.

       <한국전을 통하여 이승만은 아시아에서 장개석, 네루와 버금 가는 位相을 확보하였다.
    그는 아시아의 반공국가 및 非공산국가群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그는 공산주의자들과의 투쟁을 통하여서뿐 아니라 때로는 미국과 맞서기를 서슴지 않는 행동을 한다는 사실을 통하여 그런 지도자가 되었다.
    이승만은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그는 아시아人이었다. 그는 강력한 지도자였다.
    성장하는 강력한 군대를 갖고 있었다. 반공지도자일 뿐 아니라 反식민지 지도자였다.
    많은 아시아 사람들에게 이승만은 극동 지역에 존엄과 자존심을 가져다 준 인물이었다.
    이런 이미지는 그가 한국의 동맹국인, 강력한 나라들의 의지에 끌려가지 않고
    오히려 그들과 맞서 전쟁을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고 있다는 점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평판과 자존심으로 해서 그는 다른 아시아 정부를 상대할 때도
    頂上級보다 낮은 직급자는 만나려 하지 않았다.>

      
       2차 대전 때 이탈리아 전선을 지휘하였던 클라크 장군은 이승만을 '존경스러운, 애국적인, 그리고 능수능란한 국가 수반'이라고 표현하였다.

    하원의원 시절부터 유명한 반공투사였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1953년 당시엔 아이젠하워 대통령 아래에서 부통령이었다. 1972년 중국을 방문, 모택동과 화해함으로써 소련을 고립시키는 대전략을 구사, 냉전 승리에 기여하였던 대전략가 닉슨도 이승만 대통령을 존경한 사람이다.
      
       1953년 가을 닉슨 미국 부통령이 서울에 도착했을 때 그는 李承晩 대통령에게 보내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親書(친서)를 갖고 있었다. 닉슨을 만난 駐韓(주한) 미국 대사 엘리스 브릭스는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비슷한 불안을 품고 있었다. 휴전에 반대해온 李承晩 대통령이 북한군을 독단으로 공격하여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일지 모른다는 불안이었다. 李 대통령은 자신이 그런 공격을 해놓으면 미국은 한국을 돕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誤判(오판)하고 있을지 모른다. 닉슨은 브릭스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대사관에서 만났다. 특별 협상팀을 이끌고 있던 아서 딘은 닉슨이 이승만에게 전달할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휴대한 것을 알고 말했다. 그는 李承晩 대통령을 매우 존경하고 있었다.
       “李 대통령의 이빨을 뽑고 그로부터 무기를 빼앗아버리는 행동을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는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우리의 친구들이 거의가 상황이 좋을 때만 친구인 척하는 데 반해
    李 대통령은 언제나 믿을 수 있는 진정한 친구입니다.”
      
       다음날 닉슨은 경무대로 李承晩 대통령을 방문했다.
    닉슨이 관찰한 李 대통령은 날씬한 몸매에 걸음이 활달하고 악수할 때의 힘도 세었다.
    78세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곤색 양복에 곤색 넥타이를 맸다.
    李 대통령은 닉슨 부통령이 “개인적으로 논의할 사안이 있다”고 하니 배석자를 물렸다.

       닉슨은 “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대표할 뿐 아니라 한국의 친구로서 활동한 오랜 기록을
    가진 사람이다”고 말했다. 李承晩 대통령은 그런 말을 하는 닉슨을 凝視(응시)하였다.
    닉슨은 아이젠하워의 친서를 호주머니에서 꺼내 건네주었다.
    李 대통령은 그 편지 봉투를 조심스럽게 만졌다. 그는 천천히, 계산된 행동을 하듯이 봉투를 열고 편지를 꺼냈다. 그는 큰 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위엄 있고 정확한 발음이었다.
    이 親書에서 아이젠하워는 한국이 또 다른 전쟁을 시작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한 뒤 李 대통령이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줄 것을 요청했다.
      
       李 박사는 편지를 무릎 위에 놓고 한참 내려다보았다.
    그가 얼굴을 들었을 때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는 “아주 좋은 편지입니다”라고 했다.
       李 대통령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친서 내용과는 다른 話題(화제)로 옮겨갔다.
    일본문제, 아시아-태평양 정세의 미래를 이야기하더니 미국정부가 對韓(대한)원조를 해주는 방식을 비판했다. 닉슨은 話題를 다시 親書쪽으로 돌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요청을 들어주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라는 것을 솔직하게 말씀드린다”고 했다.
      
       “나도 귀하에게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미국으로부터 받은 도움에 대해서, 그리고 아이젠하워 대통령과의 개인적 관계에 대해서
    나는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이런 관계로 해서 나는 미국의 정책과 맞지 않은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나는 노예상태의 북한동포들을 해방하기 위하여 평화적 방법으로, 그러나 필요하다면 武力(무력)을 동원해서라도 통일을 성취하는 것이 한국인의 지도자로서 나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잠시 멈추더니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는 미국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노심초사하는 것을 잘 이해합니다.
    그러나 한반도를 분단된 채로 남겨놓은 상태의 평화는 불가피하게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고, 이 전쟁은 한국과 미국을 동시에 파괴할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런 평화에 동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李 대통령은 닉슨을 향하여 몸을 숙이더니 말했다.
       “내가 일방적인 행동을 취하기 전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미리 알려드릴 것임을 약속합니다.”
      
       닉슨 부통령은 이 정도의 약속으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상호합의하지 않고선 어떤 (도발적) 행동도 한국이 단독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약속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두 사람은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헤어졌다.
    미국 대사관에 돌아온 닉슨은 대화내용을 자세히 기록했다.
    그는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닉슨은 자신의 침묵이나 무능으로 하여 李承晩 대통령이 오해를 하도록 해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미국 정부가, 李 대통령이 한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일방적으로 군사적 조치를 취하는 것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란 점을 이해시켜야만 한다.
       李承晩 대통령은 닉슨을 만난 뒤 기자들에게 “닉슨 부통령을 통하여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설득하여 한반도의 이 문제를 끝장내게 할 수 있을 것이다”는 말을 했다. 이것도 닉슨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서울에서의 마지막 밤에 닉슨 부통령 부처는 한국 무용과 음악 공연에 초대되었다.
    어린이 합창단이 출연했다. 공연도중 무대가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으나 어린이들이 비명을 질렀다. 지휘자는 貴賓(귀빈) 앞에서 이 무슨 창피냐는 듯이 퇴장해버렸다. 닉슨은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동양에서 손님 대접에 실패하는 것이 얼마나 큰 수치인지를
    잘 아는 그는 이 난처한 처지를 수습하고 싶었다.    
       닉슨 부통령 부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한 사람씩 나중에는 관중들이 전부 다 일어나 함께 박수를 쳤다. 어린이 합창단도 웃기 시작했다. 지휘자도 무대로 돌아와 공연을 계속할 수 있었다.

       다음날 닉슨은 李承晩 대통령을 다시 만났다.
    李 대통령은 지난 밤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서 보고를 받은 듯 매우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대통령은 두 사람만 남게 되자 두 페이지짜리 종이를 꺼내서 펼쳤다.
    그는 “보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내가 직접 타이프를 쳤다”고 말했다.
    李 대통령이 말했다.
      
       “공산주의자들이, 미국은 이승만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貴國(귀국)은 가장 중요한 협상력 하나를 잃는 것이 될 뿐 아니라
    우리는 모든 희망을 잃는 것이 됩니다.
    내가 모종의 행동을 취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늘 공산주의자들을 견제하고 있습니다.
    우리 서로 솔직합시다. 공산주의자들은 미국이 평화를 갈망하므로 그 평화를 얻기 위하여는 어떤 양보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들의 생각이 맞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그러나 그 공산주의자들은 나는 미국과는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가진 그런 불안감을 없애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귀하가 도쿄에 도착했을 때인 내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답신을 보내겠습니다.
    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그 편지를 읽어보고 파기해주셨으면 합니다.”

      
       李承晩 대통령은 메모한 두 페이지짜리 종이를 닉슨에게 건네면서
    “보고용으로 이를 이용해도 좋습니다”라고 했다.
    그 메모엔 이승만 대통령이 필기한 한 구절이 첨가되어 있었다.
       <너무 많은 신문들이 이승만이 단독으로 행동하지 않기로 했다고 보도한다.
    그런 인상을 주는 것은 우리의 선전방침과는 부합되지 않는다.>

      
       경무대에서 두 사람은 악수를 하고 헤어졌는데, 李 대통령은 이때 이렇게 말했다고 닉슨 회고록은 기록하고 있다.
       “내가 한국은 단독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부 다 미국을 도와주는 일입니다.
    나는 한국이 단독으로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우리는 미국과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가면 모든 것을 얻을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닉슨은 퇴임 후에 쓴 <나는 한국인의 용기와 인내심, 그리고 李承晩의 힘과 지혜에 깊은 감동을 받고 떠났다. 나는 李 대통령이 공산주의자를 상대할 때는 ‘예측불가능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통찰력 있는 충고를 한 데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그 후 더 많이 여행하고 더 많이 배움에 따라서 그 노인의 현명함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닉슨은 冷戰(냉전)을 서방세계의 승리로 이끈 3大 전략가중 한 사람이다. 냉전 승리의 틀을 짠 트루먼, 소련을 압박하여 총 한 방 쏘지 않고 내부로부터 무너지게 만든 레이건, 그리고 중국과 화해하여 소련의 힘을 약화시켰던 닉슨이 그들이다.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 후 물러난 뒤 여러 권의 책을 썼다.
    그는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함에 있어서 “우리는 무엇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는 것은 바보짓이라고 강조했다. 이 깨달음은 李承晩 대통령으로부터 배운 ‘불가측성의 중요성’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닐까? 어쨌든 최고의 反共전략가인 닉슨이 李承晩 대통령을 극찬한 것은 요사이
    조국에서 잊혀진 존재가 된 이 위대한 先覺者(선각자)를 이해하는 데 하나의 자료가 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중국과 북한에 "저 사람은 무엇을 할지 모르는 지도자이다"는 인상을 심어주어야 할 것이다. 국가생존을 위해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란 느낌을 주는 지도자의 존재 자체가 전쟁 억지력이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