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사랑회 / 연구발표회: 한국여성들의 독립운동>     

            <하와이 여성 독립유공자, 1909~1945>
     
             
     
     이덕희 /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 소장

  • 이덕희 소장
    ▲ 이덕희 소장
   국가보훈처의 자료에 의하면, 1962년부터 2014년까지
미주지역에서 153명의 독립유공자가 포상되었다.
포상의 훈격으로는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 건국포장, 대통령표창 등으로 7격이 있다.
153명 포상자 중 여성은 단 10명으로, 2명이 애국장, 3명 애족장, 4명 건국포장 (4명), 그리고 1명이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이 10명의 여성 중  박신애 (애족장), 심영신 (애족장),
이(권)희경 (건국포장), 전수산 (건국포장) 등 하와이 여성은
4명뿐이다. (괄호 안은 남편의 성姓)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하와이에서 무장 항일투쟁에 직접 참가할 수 없었던 한인들이 한국독립운동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은 재정적 기여와 외교 및 선전활동의 전개이다. 고정휴, 『1920년대 이후 미주·유럽지역의 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 편찬위원/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pp. 20-21. 
  1910년 하와이 한인 인구가 미주 대륙 한인 인구보다 약 10배 많았고, 하와이 여성의 수가 미주 대륙 전체 한인 인구보다 훨씬 많았음을 고려하면 (표 1. 참조), 하와이 한인여성 4명만이 포상을 받았다는 것은 초기 이민 여성의 활동에 대하여 너무 무관심했음을 일러준다. 
 
        <표 1.  하와이와 미주 본토의 한인 인구, 1910년~1930년>

                  하와이                  미주 본토
1910:  4,533 (남 3,931; 여 602)    462 (13개 주)
1920:  4,940 (남 3,488; 여 1,452)     1,165 (29개 주: 캘리포니아 755)
1930:  6,461 (남 3,999; 여 2,462)     1,860 
        
  • 1902년 12월 한국 최초의 하와이 이민을 싣고 제물포를 떠났던 갤릭호.
    ▲ 1902년 12월 한국 최초의 하와이 이민을 싣고 제물포를 떠났던 갤릭호.
  •      
    이 논문의 목적은 하와이 여성 독립유공자 명단 작성이다. 뒤늦게나마 해방 70주년을 맞아 시도하는 작업이다. 이 논문은 3 장으로 나누어 작성하였다.
    제1장은 필자가 이미 발표한  하와이 여성 단체활동에 관한 3개 논문 <하와이 한인 여성단체들의 활동, 1903-1945> <하와이 한인 여성단체의 국권회복운동 1909-1945>  <하와이 한인과 일본인 여성단체 활동비교, 1885-1945>중 특히 첫 2개 논문을 수정·보완하면서, 여성들이 자신들의 단체를 통하여 조국의 국권회복과 독립을 위해 지속해온 활동을 요약하였다. 그리고 새롭게 찾을 수 있는 각 단체의 회원, 임원 명단을 첨가하였다. 제2장은 제1장에 밝힌 많은 이름을 여성단체 임원과 일반회원 2 부류로 나누어 최초로 하와이 여성 독립유공자 후보 명단을 작성하였다. 제3장에는 14명 개인에 관한 간단한 자료를 포함하여, 활동한 여성들의 인적 배경을 알리고자 하였다.  
       명단 작성을 위하여 《국민보》,《태평양 잡지》, 《태평양 주보》와 각 단체의 남아있는 회의록을 참조하였다. 《태평양 잡지》와 《태평양 주보》도 결본이 있지만, 《국민보》는 1914년 8월 1일부터 1936년 12월 20일 까지 약 20년간 결본임을 밝힌다.  
       


  • I. 하와이 여성 단체

        1910년에 하와이에 정착하여 있던 약 600명의 여성들이 한국에서 문 밖에도 나가보지 못하고 교육도 받지 못한 여인들이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한국에서 교회를 다니면서 성경 공부도 하였고 세례도 받았다. 그 중에는 이미 기독교 선교에  앞장을 선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남편을 따라 이민에 동참하는 진취적이고 모험적인 여성들이었는데, 이들이 이민을 주장하여 오지 않았나 생각되기도 한다. 이민 여성들은 도착하면서 곧 남편과 함께 맞벌이 노동을 하였고, 처음 몇 년간의 정착 기간을 지낸 후 1908년을 전후하여 여성들만의 단체를 조직하였다.
        1910년에서 1924년까지 약 800여명의 두고 온 부인들과 자녀들 또 새 신부들이 도착하여 부녀자 인구가 증가하였다. 가정을 이룬 이들은 자녀들의 출생, 교육과 더불어 농장을 떠나 새로운 직장을 가지고 안정된 생활을 위해 노력하였다. 조국이 자주권을 잃었던 이 시기에 이들은 다른 어느 민족보다도 더 진한 조국애로 불탔고, 그래서 더더욱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열성을 다했다. 가정을 이루었던 이들 여성들이 조직한 여러 단체의 활동을 살펴본다.
  • I-1. 신명부인회
       
        1909년 6월 8일자《신한국보》기사에서 (p. 4) 1909년 이전에 한인 여성들의 조직 활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점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자 1909년 2월 19일에 한인들이 자발적으로 공동회 (누구나 참석할 수 있는 공개적인 모임을 말함)를 가졌다. 그리고 송병준, 이완용, 일황(日皇) 등에게 전보를 보내기로 결정하고 기금을 모집하였다. 총 $333.90 (2015년 구매가격 약 $7,700에 해당)을 모금했는데, 기금을 낸 사람들의 명단이 있다.
     이 명단에  신명부인회라는 여성단체 이름과, 홍해나, 림메불, 황마리아, 김재순씨 부인 등 여성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 
        신명부인회의 설립 목적이 무엇이며 또 정확하게 언제 조직되었는지는 이전 자료가 없어 알 길이 없으나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신한국보』는 1909년 2월 12일자인데, 6월 8일 이전에는 신명부인회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지 않다.) 1908년 전후라고 추측할 수 있다.  1908년 5월 23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몇 명 부인들이 한글교육과 교회 일을 보조한다는 목적으로 대한부인회를 조직하였는데, 인구수가 훨씬 컸던 하와이의 신명부인회가 좀 더 일찍 조직되었고 이 대한부인회의 본보기가 되었으리라 본다. 다른 섬에 여러 지부도 있었던 신명부인회의 조직체계도 단체의 연륜과 능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1909년 12월부터 1910년 3월까지 총 4개월 동안 하와이 한인들이 합심하여 안중근의사 재판경비를 위한 의연금 모집을 진행하였을 때  1,595명이 참여하여 $2,916.85 (2015년 구매가격 약 $67,000에 해당)가 모아졌다. 
     이 안중근 기금에 동참한 사람들의 명단에서 신명부인회가 여러 섬에 지부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따라서 여러 지부의 신명부인회 회원임을 밝힌 여성의 명단과 일반 여성의 명단을 아래와 같이 작성할 수 있다. 이민 초기 여성들이 본인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누구의 부인이라고 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1910년의 신명부인회 회원 중 누구의 부인으로 기록된 경우가 있다.  기록된 남편의 부인 이름을 밝히지 못한 것은 그대로 남편 이름을 사용하였다. 1910년도 중반부터는 여성 대부분이 본인 이름을 기록하였는데, 남편의 성을 사용한 여성도 있다. 본인의 성을 아는 경우에는 본인의 성 옆 ( )안에 남편의 성을  밝혔다. 

    신명부인회 회원 (43명)
    김관선, 김메레, 김살로메, 김성옥,  김위레스, 김한근, 노맹월, 박에스터, 
    신응문, 유로득,  이관선,  이신실, 이애나, 이진실, 임마리아, 임메리, 조매리, 조윤이, 최마리아, 최정순,  한영우, 

    고분이 모친, 김국경 부인, 김재근 모친, 김재근 부인, 김치경 부인, 
    노맹월 모친, 민승현 부인, 민한옥 부인, 박한용 부인, 백경수 부인, 
    서창순 부인,  안앨나 모친, 오응택 부인, 유성수 부인, 이기영 부인, 
    이경신 부인, 이복기 모친, 이성언 부인, 이 부인, 장원여 부인, 조 부인, 
    함삼여 부인  

    일반 여성 (20명)
    박메리, 안앨나,  
    김도삼 부인, 김응섭 부인,  김창근 부인, 김창수 부인, 김치운 부인,
    김친규 모친, 박경오 부인, 박응서 부인, 박자홍 부인, 박씨 부인, 
    송공선 부인, 서달근 부인, 안치길 부인, 안성실 부인, 유진학 부인, 
    이기원 부인, 최정호 부인, 최성렬 부인 

  • I-2. 부인교육회
     
        1909년 4월 27일자『신한국보』에 따르면 4월 16일에 10명의 부인들이 자유교회에 모여 부인의 교육을 목적으로 ‘부인교육회’를 조직하고 신학과 가정학을 공부하기로 하였고, 자유교회의 선교사(전도사) 신홍균이 이들의 모임을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고 보도하였다 (p. 3). 자유교회는 감리교회 전도사 신홍균 (전에 신판석 또는 신반석으로 알려짐)이 감리교회의 목사직을 사임하고 1909년 3월 23일에 호놀룰루 시내 퀸스 골목 (현 Queen's Hospital의 일부)에 세운 교회이다.  
      
       신학공부란 성경공부를 뜻하는 것인데, 부인들이 여성교육이라는 취지로 모임을 시작하면서 성경공부를 한 것이다. 그런데 위의 신문 기사는 부인교육회를 조직한 10명의 부인들이 자유교회 교인이었는지는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당시 하와이 한인의 약 30%가 기독교인이었고,  호놀룰루 시내에 거주하는 400여명의 한인 중 기독교인들은 감리교회와 성공회교회에 출석하였다. 성공회교회는 자유교회에서 1마일 (1.6 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고,  감리교회는 1 블록 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이 10명의 부인들이 기존의 감리교회나 성공회교회 교인이었다면, 왜 새로 조직된 자유교회에서 부인교육회 모임을 갖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반면, 김원용이 기술한 것처럼 신홍균 전도사가 친일파로 알려진 와드맨 감리사로부터 독립하여 이름 그대로 ‘자유’교회를 조직한 것이라면, 10명의 부인들은 신홍균의 독립성에 찬성하여 그의 새 교회와 관계를 갖고자 한 것이거나, 아니면 기존의 교회 교인들 보다는 조금 더 ‘독립심’이 강한 자유교회 교인이 아니었을까 추측할 수 있다.   
        6월 22일자 『신한국보』는 첫 면 상단 반쪽 전체에 부인교육회 설립목적을 다음과 같이 게재하였다.  
    이 세상에 인류로 생겨나서 남녀를 물론하고 상제(하나님)의 자녀 되기는 일반이라. 고유한 권한이 풍부하여 성질총명이 추호도 차별이 없거늘 사업상 능력에 어찌 우열이 있으리요 (중략) 
    여자는 국민의 주모라 (중략) 여자의 자녀를 기르는 공적이 어찌 장부가 세상을 건지는 사업에 사양하리요. 여자 교육은 금일 세계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다(중략) 
    황후폐하께서 여권이 오래 타락함을 민휼하시며 국세가 따라 위박함을 통찰하사 특별히 전국에 책조를 환강하시고 여자의 교육을 장려하시니(중략)
    금일 한국의 여권을 확장함이 어찌 여자사회의 혁명을 주장할 따름이리요(중략)
    공민의 큰 부분을 차지한 1천만 여자의 속박을 끌러 먼저 국가의 원기를 기르면 이족의 침략을 항거하여 비경에 함락한 국민을 가히 광제할지니(중략)  
    대개 하와이 한인의 진도는 다른 날 한국의 국권을 광복함이 두 어깨에 담부한 책임이라(중략) 
    이제 동지를 결련하여 부인교육회를 조직하니 이는 특별히 남자사회의 세력을 
    다투는데 있을 뿐만 아니라 일반 여자의 교육을 보통하여 문명의 본원을 발전함이니 (하략)  (현대어로 바꿈; 필자 강조)

        위의 설립목적에서 볼 수 있듯이 하와이에서의 여성교육운동은 단순히 여성개화운동이 아니었고 조국의 국권을 광복한다는 구국운동의 입장에서 강조되었고 기독교 복음화와 연계되었다.  부인교육회는 안중근 의사 재판경비를 위하여 $10을 기부하였다. 부인교육회 회원들은 자신들의 계발에 노력하면서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한 활동에 단체로 참여하였다. 
    불행하게도, 부인교육회 회원 명단을 찾을 수 없다.  
     

  • I-3. 대한부인회
        1913년 9월 3일자《국민보》(p. 4)에 의하면, 1913년에는 신명부인회와 부인교육회 이외에 적어도 2개 단체가 더 있었고, 다른 섬에도 이들 단체의 지부가 있었다. 하와이의 한인 여성들은 이민 직후부터 사회활동을 적극 추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1913년 4월 19일에 이들 4 단체가 통합하여 “대한부인회”를 결성하였다. 김원용, 앞의 책 , p. 232. 김원용이 대한부인회를 하와이 한인여성들의 첫 조직이라고 지적하였는데, 오류이다. 
     그 목적은 
       1)자녀의 국어 교육 장려, 2)가정 일용사물의 일화 (일본제품) 배척,  
       3)교회와 사회단체 후원과 4)재난 동포 구제 노력이었다. 

        첫 회장은 황마리아였다.  다섯 달 후인 9월 2일에 회칙(장정)이 완성되어 회의를 열었고 두 가지 활동할 것을 결정하였다. 우선, 실업을 경영하여 재정을 만들어 놓고, 전도를 부지런히 하여 사회를 개량한다는 것이다. 실업 방침으로는 재봉소를 설립하여 남녀의 의복을 지어 팔기로 하였다. 전도사업은 매 주일 1-2명 내지 2-3인이 병인들을 심방하며 또 믿지 않는 동포들을 권유하기로 하였다. 우선 그 자리에서 기금을 모집하였는데 수전위원은 황마리아였다. 전도는 9월 9일 일요일부터 시작하기로 하였고 위원은 조부인매륜 (조매륜)과 최부인엘리자베트(최엘리자베트: 남편 최진태가 사망하면서  본인의 성 박을 사용하여 박엘리자베트가 되었다.)이다.
    특기할 것은 대한부인회의 활동을 회비만으로 충당하려는 소극적인 방법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실업을 경영하여 재정을 충당하며 활동을 하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태평양잡지》1913년 11월 1일호에 실린 “호항한인부인회”라는 제목의 글에 회원이 70명에 달하였다고 했는데, 명단은 찾을 수 없다. 《국민보》 1913년 11월 5일 기사는 4 단체가 통합하여 설립된 대한부인회의 “모든 일이 더욱 자미스럽고 진취”된다고 밝히면서 매주일 모이는데 회원들이 많이 모여 회의장소가 협소할 정도라고 하였다. 회의장소가 어디였는지 또 몇 명이 모였다고는 밝히지 않았다. 11월 3일에는 총무를 여러 지방으로 보내 지부를 결성하도록 결정하였고, 또한 그 자리에서 국민회 사무실 건축을 위한 기금모집을 하여 $20을 모금하였다. 한인사회의 대표기관인 국민회를 지원하며 독자적인 활동을 한 것이었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경제적인 능력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1914년 1월 12일에 카우아이 섬 콜로아(Koloa)지방 지부 설치를 시작으로 오아후 섬 와히아와(Wahiawa), 하와이섬 코나(Kona) 지부도 설치되었다. 와히아와 지부 회원들은 1914년 2월 2일 국민회 창립 6주년 기념 시가행진에 참여한 광무군인들의 제복 30벌을 만들었는데
     실질적으로 재봉일로 돈을 마련하려 한 것이다.  
    1914년 4월에 대한부인회 사무실을 국민회 사무실 옆으로 이사하고  곧 이어 경제적으로 곤란을 받고 있는 《국민보》를 위한 기금모집에 대한부인회 회원들이 후원하였다. 
      호놀룰루의 70여명 회원 중 특별히《국민보》를 후원한 회원은 아래와 같다.

    강성기, 김경범, 김길남, 김관선, 김루신다, 김순명, 김유실, 김재욱, 문찬성, 박엘리자벳트, 박유네스, 박원신, 박정순, 손덕유, 송겸심, 신영진, 안해나, 
    윤힐란, 이부실, 이창식,  이(권)혜경, 정은수, 지해나, 차정림, 최사홍, 
    최응범, 최장손, 최하리, 한상호, 황경애, 황마리아 (11명)
    김성백 모친, 김차삼 부인, 양기전 부인, 유한응 부인, 정두복 모친 (5명) 
  • 한인중앙학교 교장 이승만 박사.
    ▲ 한인중앙학교 교장 이승만 박사.
        1914년 4월 19일에는 1주년 기념식을 한인중앙학교 (교장 이승만)에서 성대히 거행하였고 
     6월 17일에는 새 임원을 선출하였다. 
     새 임원은 류창선 (회장), 안윤심 (부회장), 강창숙 (서기), 김유심[실] (회계), 안하[해]나 (학무), 차(리)정림 (사찰) 이었다. 1914년 5월에는 평양에서 선교사업을 하는 노불목사를 통하여 서간도의 재난동포 구제금으로 $300을 보냈다. 
      또 1918년 6월 14일에 있었던 통상회 (정기적으로 열린 회의)에서 $250을 한국에 보내 땅을 사서 전도비의 기본금이 되도록 결정하였다. 즉 그 땅에서 얻은 추수수입으로 한국내의 지방민 전도사업에 충당하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대한부인회의 1년 동안의 활동을 미루어 볼 때, 70여명 회원의 대한부인회라는 여성 단체가 기독교선교와 애국운동을 활발히 병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국민보》 1914년 8월 27일자와 30일자에는 국민회 호놀룰루 지방회 모임에서 최근에 도착한 안득은 (김영진 부인)과 류창선 (이관묵 부인) 두 여성이 한 연설내용을 요약하여 발표하였다.
    안득은은 국민회 활동을 치하하고, 아편 복용을 규탄하고, 동포들의 정신적 단합을 강조하였으며, 또 신학을 공부한 사람과 영어로 소통할 수 있는 지도자들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또 안득은은 부인들의 의복개량에 관하여 반대의견을 표하였다.
    하와이의 한인 여성들이 더운 기후에 알맞게 한복을 개량하여, 치마와 저고리 소매의 길이를 짧게 하여 입었는데, 이에 대하여 안씨는 민족 고유의 복식을 개량하는 것은 조국을 깨는 (망하게 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청중석에 있던 이승만 박사가 나서서, 이 문제는 나중에 더 논의하기로 하자고 하였다.
    그는 의복과 나라를 동일시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고 하면서, 그렇다면, 남자들도 다 양복을 벗고 도포를 입어야 하느냐고 하여 한바탕 웃었다는 기사도 덧 붙였다.
    1948년 대통령 취임식에 이승만 대통령은 한복을 입었고, 후에도 공식석상에  한복을 자주 착용하였다.
     
       류창선의 연설은 “우리 하나 하나는 의식, 명예, 책임 등 이루고자 하는 것이 다르다. 미국과 하와이 한인 정형을 비교할 때 미국이 표면적으로는 낫고, 중심적 발달은 하와이가 낫다. 이렇게 삶의 목적이 다른 우리 개개인이 이지만, 미국과 하와이 한인들이 동심협력한 후에야 우리 전체의 희망을 성취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1910년을 전후하여 한인 여성들의 조직 활동이 활발하여 졌고, 여성들뿐만 아니라 범 한인사회 모임에서도 지도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민생활의 기반이 잡혀짐과 동시에 1910년부터 여성들의 수가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망국의 한은 더더욱 많은 이들을 기독교신앙 부흥을 통한 애국계몽운동과 민족교육에 활발히 참여하도록 하였다.  김공도 (고덕화 부인)와 김옥순 (황성국 부인)은 1913년 말과 1914년 초에 도착하였는데, 이 둘은 한글학교에서 가르쳤다. 
    I-4. 대한소녀리그

          하와이 한인들에게 한국의 독립운동 소식이 전해진 것은 1919년 3월 9일이었다.
    두 달 후인 1919년 5월 28일자 스타블르틴(Honolulu Star Bulletin)에 대한 소녀 리그(Korean Girls' League) 회장 최순이(Soonie Choy, 19세, 학생) 이름으로  미주 본토와 영국, 프랑스 등의 유명한 여성단체들과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의 부인 등에게 수백 통의 편지를 보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 편지는 일본의  한국 침략 사실을 알리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 전 세계의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대한소녀리그의 서기는 신매리(Mary Shin) 이었는데 당시 16세의 여학생이었다. 이 단체는 고등학교 여학생의 모임이었다. 더 이상 이 단체에 관한 기사가 없다가, 두 달 후인 7월 14일에 Korean School Girls 라는 이름으로 유사한 내용의 편지를 파리 평화회의에 참석중인 미국 대표들에게 보냈다는 기사가 스타블르틴 지에 실렸다.
     아마도 대한소녀리그의 학생들이 활동을 계속 이어가고 있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여학생들이 병탄된 조국의 상황을 세계 여성단체와 미국 대표들에게 호소하면서, “한국의 염원 (광복)을 말살하는 일본이 아시아 국가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이며, 동시에 세계 민주화에 미치는 영향이 어떠할 것인가(What effect will the denial of Korea's national hopes by Japan have upon Asia and upon the possibility of a world democracy?)”라고 물었다는 기사였다. 비록 짧은 기간의 활동이었지만, 미주 한인의 새 싹인 여학생들이 외교적 창구를 활용하였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  

  • I-5. 대한부인구제회

    독립운동 소식이 알려지자, 하와이 각 지방의 여성대표 41명이 3월 15일에 호놀룰루 국민회 총회관에 모여 조국독립운동에 모든 역량을 기울이기로 하고 새로이 “대한부인구제회”를 결성하였다. 
      영자 신문 애드버타이저 지가 보도한 대로, 원래의 명칭을 대한 적십자 Korean Red Cross Society로 조직하려 하였으나, 한국이 자주독립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하여 대한부인구제회라 하였다. 특기할 것은, 애드버타이저 지가 보도한 것처럼, 이 모임이 단순히 이들 여성 41명의 회의가 아니라 한인들 300여명이 모인 범교포적 회의였다는 것이다. 이 모임에 참가한 41명의 여성단체 대표자의 명단은 아래와 같다.

    손마리아, 황마리아, 김유실, 박정금, 안정송, 김복남, 손경신, 
    김보배, 최사용, 백인숙, 안득은, 김복순, 김정한, 정혜련, 김루시, 
    김마주리, 임마리아, 김살로메, 정마타, 손마타, 김해나, 심영신, 
    김차순, 곽명숙, 박금우, 김엘시, 김으로쓰, 홍수사나, 한에스터, 
    리영애, 최자신, 김숙안, 박엘시, 리마지, 김순화, 김교선, 윤광히, 
    조병선, 유정순, 리월선, 엄수산
       
        이 모임의 결과로 3월 31일에 대한부인구제회 발기인 회장, 손마리아; 부회장 겸 외교원, 김마주리, 총무, 김보배; 서기, 김유실, 김복순; 재무, 송마다[타]; 학무, 백인숙; 법무, 정혜린; 구제 안득은; 사찰, 정마터[타] 의 이름으로 <취지서> 가 발표되었는데  「취지서」, 『이화장 소장, 우남 이승만 문서, 동문편』(이하 『우남 이승만 문서』) 제12권, 중앙일보사/ 연세대학교 현대한국학연구소, 1998, pp. 393-394. 위의 인용한 애드버타이저 지에 회장 Mrs. Mary Song 과 총무 Mrs. W. K Ahn (안정송)이 피선되었다고 한 것은 오기이다.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우리대한 부녀들아 때가 왔도다. 이때는 조상나라를 독립지위에 올려 앉혀 놓는 때요, 동족들이 피를 흘려 장래 큰 희망과 영광을 누리려하는 이땐줄 깨닫는가 못하는가. 활동하라, 이때는 한집안 횃대 밑에서 반에반쪽 사람 노릇하지 말고 사상을 한번 변하여 20세기 확무대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받은 한 사람의 권리를 넉넉히 누릴지어다...
    목적은 나라 위하여 피 흘리고
    죽고 갇히고 고생하는 동족을 구제할 것이며...”

  • 이 취지서에 10명 회장단과 78명 회원 명단이 실려 있어 조직 당시에 88명의 회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명단에는 79명으로 로희창 부인, 디[지]영희가 반복됨) 회원 명단은 아래와 같다. (굵은 글씨는 임원)        

       
    구명수, 김경란, 김교선, 김구레쓰, 김남순,김루시, 김마주리
    김막달나, 김매리, 김메불, 김무숙, 김보배, 김복남,  김삼덕, 김선봉, 김성이, 김수복,
          김숙안, 김순양, 김순하, 김아지, 김앤의, 김엘리사벳, 김유실, 김일남, 김임순, 김정한, 김차      득, 김창순, 김캐로린, 김해나, 류정순, 량덕선,  리래드라, 리리랜스, 리마구렛, 리석기, 리신      석, 리에스터, 리애니, 리점순, 리진실, 리천순, 리플로라, 리필언, 림금이,림덕순,  림마리아,       박엘리사벳, 배천례, 백인숙,  박정금, 변석경, 
    서동조,  손경신, 손마리아, 송마다[타], 손봉화, 손영주, 송필순, 
    신성금, 신숙경, 안득은, 양정신, 엄수산나, 유로득, 유순례, 유흥수,오애마, 장마리아,
          장엘리하, 전로세, 정마터[타], 정혜린, 조병선, 
    조수산나, 조헬란,  진신실, 디[지]영희, 차순남, 최사흥, 최소근, 
    최요한나, 최재도, 한에스터, 홍매리, 홍수사나, 김계남 빙모 (88명)


       그런데 이 88명의 창단 회원 명단에는 대표자로 모였던 41명 모두가 포함되지 않았다. 이 취지서의 명단이 정확할 것이지만, 왜 대한부인회에서 활약한 여러 명, 예를 들어 황마리아, 이(안정송) 등이 부인구제회 창단 명단에서 빠졌는지 확인해야 할 사항이다.   
        대한부인구제회 장정이 1919년 11월에 작성되었는데, 구제회를 조직하는 동기가 한국에서 기미년 독립운동의 소식을 듣고 “우리 여자들도 하늘이 준 국민 고유의 의무와 권리를 다 함이 천직인 줄로 자각”하였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와이 대한부인구제회 장정」, 1919, p. 1. 
     조직 명칭은 대한부인구제회라 하나 만일 필요한 경우에는 대한민국 적십자회로 변경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p. 4). 
        조직으로는 대표회와 사무를 총괄하는 총부 (중앙부)를 두었는데, 대표회는 각 지방에서 선출된 대표들로 조직되었다.  대표의 연령은 22세 이상이며. 신분은 묻지 않으나 국한문을 능히 쓰고 읽을 줄 알며, 또한 국문과 영어만 쓰고 읽을 줄 알아도 합당하다고 하였다. 대표가 자기 지방의 일반회원의 부탁을 져버리거나 소임을 감당치 못할 때에는 그 지방 회장이 사직을 권고하거나 파면을 할 수 있다고 책임의 중요성도 강조하였다 (pp. 4-5). 통합 목적은:
    1) 본국에서 난리 (독립운동)로 참상을 당한 사람과, [독립]전쟁에서  부상하는 동족을 구원한다. 
    2) 부녀들의 절개와 례모와 근면하기를 서로 권장하여 대한부인의 참된 모습을 보전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