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 거듭하다 반성문… "아파보니 눈물 흘리는 사람 보이더라"
  • ◆편집자주

    24~25일 이틀간 실시된 관악을 보궐선거 사전투표가 투표율 7.39%로 마무리됐다. 29일 본 투표일에 투표할 유권자 중에서는 아직도 여러 후보자들 사이에서 마음을 결정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는 지적이다.

    〈뉴데일리〉는 관악을의 3강 후보로 꼽히는 새누리당 오신환·새정치민주연합 정태호·국민모임 정동영 후보가 걸어온 길을 재조명하는 기획 기사를 준비했다. 본 기획을 통해 세 후보가 걸어온 길의 명(明)과 암(暗)을 담백하게 담아내 유권자들에게 알림으로써, 소중한 선택에 도움을 드리고자 한다.

    [후보자가 걸어온 길 ①] 오신환, 40년 관악인… 한 눈 팔지 않을 사람
    [후보자가 걸어온 길 ②] 정태호, 두 번의 국보법 위반 전력… 정통 친노
    [후보자가 걸어온 길 ③] 정동영, 굴곡 겪은 거물… 지역 연관성은 '글쎄'


  • 국민모임 정동영 후보.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국민모임 정동영 후보.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국민모임 정동영 후보는 관악을 보궐선거에 출마한 세 후보 중 가장 늦게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새정치민주연합 정태호 후보가 23세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면서, 새누리당 오신환 후보가 36세에 서울시의원이 되면서 각각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면, 정동영 후보는 그의 나이 58세가 되는 2010년에 이른바 '공개 반성문'을 쓰면서 인생 항로의 변침을 했다.

    정동영 후보가 걸어온 길은 다른 두 경쟁 후보와는 많이 다르다. 그의 행로는 중앙정치와 맞닿아 있다. 집권 여당을 만들어냈고, 장관을 지내고 대선 후보로 나서기도 했다.

    반면 서울 관악을과 연관해서는 서술할만한 것이 거의 없다. 유일한 접점은 관악을 선거구 내에 캠퍼스가 있는 서울대학교를 나왔다는 정도다. 그나마도 정동영 후보가 국사학과 72학번으로 들어갈 때는 동숭동에 있는 문리과대학 캠퍼스로 입학했다.

    정 후보는 17일 열렸던 주민자치 대담토론회에서 "군대에 갔다 와보니 대학이 없어졌더라"며 "문리대는 쪼개지고 나는 관악산으로 옮겨간 인문대로 복학해야 했다"고 털어놨다. 그와 관악캠퍼스와의 인연은 '들어갈 때'가 아닌 '나올 때'의 인연, 반쪽 짜리 인연 뿐이다.


  • 국민모임 정동영 후보가 24일 우림시장에서 열린 유세에서 무선 마이크를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넘기며 즉석 문답을 나누고 있다. ⓒ뉴데일리 정재훈 기자
    ▲ 국민모임 정동영 후보가 24일 우림시장에서 열린 유세에서 무선 마이크를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넘기며 즉석 문답을 나누고 있다. ⓒ뉴데일리 정재훈 기자

    ◆승승장구하다 대선 패배 계기로 내리막길… "나는 많이 실패한 사람"

    1978년 MBC에 입사한 정동영 후보는 1996년 정계에 복귀한 고 김대중 전 대통령(DJ)에 의해 정치권에 영입됐다. DJ가 직접 당사 기자실에서 영입 기자회견을 할 정도로, 그는 정계 입문 때부터 주목받았다.

    그 해 열린 15대 총선에서 전주 덕진에 출마해 전국 최다 득표를 하며 화려하게 여의도에 입성한 정동영 후보의 정치 행로는 한동안 승승장구 그 자체였다. △16대 총선에서 재선 △천정배·신기남·추미애 의원 등과 '정풍 운동'을 주도해 권노갑 고문 등을 축출 △열우당 창당 및 통일부장관으로 입각 등 순조로운 행보가 계속됐다. 2007년에는 집권여당인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 후보가 되면서 그의 경력에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거짓말처럼 내리막길을 걸었다. 정동영 후보가 24일 국회의원 후보자 초청 공청회에서 토로한 "나는 정치인으로서 많이 실패한 사람"이라는 회고는 이 시점부터의 이야기다.

    정동영 후보는 이날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크게 졌다"고 했다. 실제로 2007년 대선에서 그가 얻은 26%의 득표율은 국민 직선으로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 후보가 기록한 사상 최저 득표율이다.

    이후로도 패배는 계속됐다. 정 후보는 "재벌그룹 회장에게 동작에서 도전했다 패배했다. 강남에서도 졌다. 당권 도전에서도 실패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정치인에게 패배는 죽음과도 같은 것"이라며 "고통스러운 패배 속에서 속으로는 눈물도 많이 흘렸다"고 회상했다.


  • 국민모임 정동영 후보가 24일 신림역에서 김세균 창당준비위원장, 이행자 서울시의원과 함께 퇴근 인사를 하고 있다.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국민모임 정동영 후보가 24일 신림역에서 김세균 창당준비위원장, 이행자 서울시의원과 함께 퇴근 인사를 하고 있다.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2010년 반성문 쓰고 사상 전향… "관악에서 정치지진 일으키겠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서울 동작을에 출마해 정몽준 전 의원에게 패한 정동영 후보는 도미(渡美)했다. 이후 공교롭게도 현지에서 이른바 '미국발 금융위기'를 목격하면서 정 후보는 '사상적 전향'을 하게 된다.

    2009년 귀국해 전주 덕진에서 열린 보궐선거에 당선된 정동영 후보는 급진적인 행보를 펼쳐 의아함을 샀다. 2010년 8월에는 "저는 많이 부족한 대통령 후보였습니다"라는 공개 반성문을 자신의 블로그에 게재했다. 정 후보는 이 반성문에서 한미FTA와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자신의 이해가 부족했다며 사과하고, 미국발 금융위기와 용산 사건을 계기로 자신은 반신자유주의로 돌아서게 됐다고 주장했다.

    이후 같은 해 10·3 전당대회에서 정동영 후보는 당권에 도전했지만 손학규 전 고문에게 패했다. 최고위원회에 들어간 정 후보는 손학규 대표와 사사건건 충돌했다. 2011년 7월 1일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는 손학규 대표의 '원칙 있는 대북 포용정책'을 공개 비난하다가, 손 대표로부터 "종북진보에 대해서 색깔론을 제기할 생각은 없지만, 민주당은 분명히 이와 다르다"는 면박까지 당했다.

    정동영 후보는 2012년 총선에서는 강남을에 출마했다 대패했다. 그럼에도 원외에서 재차 대권 도전을 선언했지만 당내외의 호응은 미적지근했다. 7월 9일 민주당 예비후보 중 가장 먼저 대선 가도에서 하차하게 되자, 이른바 '정동영계'는 붕괴됐고 그는 당내 입지를 잃었다. 이후 자신의 말대로 "밀양에서, 영도에서, 평택에서, 진도에서" 활동하던 그는 지난 1월 새정치연합을 탈당하고 국민모임 창당을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국민모임 후보로 관악을 보궐선거에 출사표를 던진 그에 대해 지역 정가 관계자들은 "선거운동을 하는 것을 보니 가장 노련한 후보이고, 체급이 있는 거물인 것은 확실하다"면서도 "관악을과 관련해서는 아직까지도 별로 할 말이 없다"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