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꿔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시간만 죽이는 외교 책임자들, 결과는 공허한 메아리
  • 올리버 에비슨이 한국인 조수 박서양의 도움을 받아 수술하는 모습. 에비슨은 조선인 의사를 양성해 우리나라에 서양 의술이 보급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조선일보(문화재청 제공)
    ▲ 올리버 에비슨이 한국인 조수 박서양의 도움을 받아 수술하는 모습. 에비슨은 조선인 의사를 양성해 우리나라에 서양 의술이 보급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조선일보(문화재청 제공)

     

    [싱가포르=오창균 기자]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아시아에 급작스러운 변화가 찾아왔다. 18세기 말 서유럽에서 시작된 근대화(Modernization)가 중부유럽과 동부유럽을 거쳐 아시아로 확산됐기 때문이다.

    서구의 '근대 국가(Modern State)'를 지향한 문명성의 파장은 엄청났다. 

    서세동점의 시기, 도쿠가와 막부시대의 일본은 명치유신(明治維新)을 통해 가장 먼저 외관상의 근대화에 성공했다. '화혼양재(和魂洋才)', 일본은 자국의 것을 모체로 하되 서양의 유용한 것들만 받아들이겠다는 구호를 외쳤다.

    서구에 끝까지 저항한 중국은 두 차례에 걸쳐 벌어진 아편전쟁을 계기로 서양의 열강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편 대금과 전쟁 배상금, 난징조약과 텐징조약 체결 이후 중국의 문호는 사실상 전면 개방됐다.
     
    우리 조선은 가장 늦은 근대화를 맞았다.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의 통상 요구와 병인양요(丙寅洋擾),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1875년 운요호 사건,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이후 수차례의 침범과 침탈을 계기로 강제적인 문호개방이 이뤄지게 됐다.

    그렇게 아시아의 근대화는 서구의 강제적 접합에 의해 시작됐다.

     

  • 1979년 리콴유 전 총리 방한 당시 악수를 나누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도 눈에 띈다. ⓒ청와대 제공
    ▲ 1979년 리콴유 전 총리 방한 당시 악수를 나누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도 눈에 띈다. ⓒ청와대 제공

     

    #. '모던 아시아 1.0'의 탄생(The Birth of the Modern Asia 1.0)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근대화의 발원지인 유럽에선 자신들이 확립한 근대성(Modernity)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문화와 예술 뿐만이 아니었다. 자율성과 다양성을 중시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정치-경제-사회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쳤다.  

    종북좌파 세력이 동경하는 북한의 '짬뽕 전체주의(全體主義)', 퇴폐 성문란과 동성애(同性愛)가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도 이 때쯤이다.

    반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실체와 본질의 모호화로 진통하고 있던 서구와는 달리, 아시아는 그들이 벗어나려는 모더니즘(Modernism) 속으로 파고들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중국의 경제부흥 초석을 닦은 덩샤오핑(鄧小平),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확립한 이승만(李承晩)과 고도성장을 모색했던 박정희(朴正熙), 그리고 이번에 타계한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가 '모던 아시아 1.0'을 탄생시킨 대표적 지도자다.   

    이후 수십년이 지나 이들이 쌓은 업적이 재조명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약 10년 만에 전쟁 발발 이전의 경제 규모를 회복한 일본. 미국을 위협할 정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중국. 6.25 전쟁의 참극을 극복하고 세계 10위권 안팎의 경제력을 갖추게 된 대한민국. 지난해 1인당 GDP 5만6,113달러로 세계 8위에 등극한 싱가포르. '모던 아시아 1.0'을 주도했던 강력한 지도자들이 없었다면 지금도 아시아는 서구에 휘둘리며 빈국(貧國)이라는 고통에서 헤메야만 했을 것이다.

     

  • 지난 2013년 6월27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공식환영행사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조선일보 DB
    ▲ 지난 2013년 6월27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공식환영행사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조선일보 DB


     

    #. '모던 아시아 2.0'의 서막(Rise of the Modern Asia 2.0)

    '모던 아시아 1.0'의 마지막 기수(旗手)였던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의 타계로 아시아 근대화 1세대들의 대장정은 막을 내리게 됐다. 이는 곧 '모던 아시아 1.0'의 종언(終焉)을 의미한다.

    이제 자연스럽게 세계의 시선은 그들의 뒤를 잇는 2세대 지도자들에게 쏠리고 있다.

    총리직을 걸고 미-일 안보조약을 개정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일본 총리의 외손자 아베 신조(安倍晉三). 중국의 혁명원로 시중쉰(習仲勳) 전 부총리의 아들로 이른바 태자당의 지지를 받고 있는 시진핑(習近平). 대한민국 근대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의 장남인 리셴룽(李顯龍). 

    이들은 모두 아시아 근대화 1세대 기수들의 후손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들이 펼치는 아시아의 합종연횡(合從連衡)과 길항외교(拮抗外交)에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서구의 영향력에 맞서 아시아를 하나로 묶는 전략적 가치를 꿈꿨던 1세대 지도자들의 리더십. 그들의 탁월한 혜안과 선견지명, 내외의 어떠한 압박에도 물러서지 않고 국가의 반석을 닦기 위해 혼신을 쏟았던 1세대 지도자들의 후손에게 시대는 또 다른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외교 관례상 최고의 예우를 받으며 다음달 미(美)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나서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모던 재팬 2.0'.

    지난 29일 막을 내린 보아오 포럼(Boao Forum for Asia)에서 '일대일로'(一帶一路ㆍ육해상 실크로드) 구상을 내놓은 시진핑 중국 주석의 '모던 차이나 2.0'.

    실용주의 노선과 친(親)기업 경제정책은 물론, 질서 유지를 위한 강력한 법치 기조를 통해 리더십을 과시하고 있는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의 '모던 싱가포르 2.0'.

    그렇다면 박근혜 대통령의 '모던 코리아 2.0'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 '2014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홍보대사 위촉식에 참석한 윤병세 외교장관과 배우 이영애. ⓒ뉴데일리 정재훈 기자
    ▲ '2014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홍보대사 위촉식에 참석한 윤병세 외교장관과 배우 이영애. ⓒ뉴데일리 정재훈 기자


    #. '새벽 같이 출근해 밤 늦게 퇴근' 대체 왜? 

    지난 28일 오후 박근혜 대통령이 리콴유 전 총리의 국장(國葬)에 참석하기 위해 전용기인 '공군 1호기'에 몸을 실었다. 대한민국의 외교 책임자인 윤병세 외교장관과 주철기 외교안보수석 역시 기내 한켠에 짐을 풀고 일정을 준비하는 모습이었다.

    기자도 이날 싱가포르 특별취재를 위해 대통령 전용기에 탑승했다. 기자의 눈에 비친 외교부 고위 공무원들과 청와대 참모들의 모습은 한 마디로 분주함 그 자체였다. 혹자는 싱가포르에 도착한 29일 새벽까지 노트북을 들여다봤고, 다른 이는 정신없이 문서들을 체크하며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싱가포르 숙소에 마련된 프레스센터에서는 김성우 청와대 홍보수석과 민경욱 대변인이 뛰어다니며 향후 일정과 계획을 기자들에게 전달했다. 윤병세 장관과 주철기 수석은 싱가포르 현지 관계자들과 접촉하는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참으로 바쁜이들이다. 국내 기자들 사이에서도 청와대와 외교부의 강도 높은 업무는 유명하다. 윤병세 장관은 장관으로 취임하기 전 외교부에 근무했던 시절부터 이미 잠을 3시간 이상 자지않고 일하는 '워커홀릭(Workaholic)'으로 불렸다.

    제네바 주재 공사로 일할 당시에는 상대적으로 덜 바쁜 직책인데도 불구하고 '저녁 도시락'을 따로 싸가지고 다니면서 일을 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외교부 안팎에서 윤병세 장관에게는 '윤주사'라는 딱지가 붙었다.

    청와대도 만만치 않다. 비서진 중 많은 이들은 이르면 오전 6시, 늦어도 7시 반까지는 출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퇴근 시간은 일정치 않다. 하지만 오후 8시 이전에 청와대를 나서는 이들은 상당히 드물다는 후문이다. 체력적으로 많은 부담을 안고 있다는 얘기다.

    수석도 예외가 아니다. 앞서 윤두현 전 홍보수석은 기자들과 오찬을 함께 하며 "업무가 많이 힘들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그리고 실제 윤 수석은 설 연휴 전 '육체적으로 힘들다'며 김기춘 비서실장에게 사의를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내부 뿐만이 아니다. 외부의 수많은 이들에게 국정운영에 도움이 되는 얘기를 듣고 정보를 취합해야 할 외교부 장관과 청와대 수석은 때 아닌 '새벽불 보기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밤샘 근무가 효율적 업무로 이어질지는 과연 의문이다. 

     

  • 주철기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연합뉴스 DB
    ▲ 주철기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연합뉴스 DB


    #. '갈팡질팡' 외교안보, 믿을 수 없는 장관·참모

       
    밤샘 업무에 여념 없는 외교부 장관과 청와대 수석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외교안보가 산으로 가고 있다"는 지적이 쏟아지는 상황이다.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의 뒤늦은 가입, 주한미군의 사드(THAADㆍ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 대해서는 꿀먹은 벙어리. 한마디로 이렇다 할 성과가 없다.

    <동아일보>는 한국이 지난해 하반기에 일찌감치 AIIB 참여를 결정했다면, 2대 주주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는데도 결정을 미루다가 경제적 손해를 봤다는 지적과 중국과 미국의 압박 사이에서 경제적 실리를 챙겼다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정치권에서는 "지난해 7월 서울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한국에 AIIB 참여를 직접 요청했을 때 빠른 결정을 내렸다면 AIIB 내 지위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결국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눈치만 보다가 최상의 득(得)을 얻을 수 있는 호기를 놓쳤다는 얘기다.    

    사드 배치에 대한 입장도 마찬가지다. 현재 국방부 주변에선 사드의 주한미군 배치에 대해 한-미 양국 간 공감대가 형성됐다는 관측이 퍼지고 있다. 또한 다음달 초 방한하는 애슈턴 카터 미국 국방부 장관과 한민구 국방부 장관은 한-미 국방장관 회담을 갖고 사드 배치 문제를 본격 거론할 것으로 보인다. AIIB 가입으로 이미 균형은 깨졌다. 두 핵심 안건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저울질하던 상황과는 달라졌다. 더이상 사드 배치와 관련해 중국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정부는 '전략적 모호성'을 일관하고 있다.

    결단력은 어디 갔는지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다. 박근혜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주철기 수석과 외교부의 총책임자인 윤병세 장관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시간만 죽이고 있다. '모던 코리아 2.0'은 정체돼 있다.

    외교부 직원들과 청와대 비서진은 새벽 일찍 일어나 한밤 중에 퇴근하는 매너리즘(Mannerism)적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결과가 대체 무엇인가? 핵심 업무에 있어 생산성과 창의성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상황은 안 봐도 훤한 비디오다. 대통령의 눈 앞에서 '밤잠을 줄여가며 열심히 일 했다'는 티를 내기 위한 '그들만의 리그'일 뿐이다. 겉으로는 우아한 척하며 물 밑에서는 요란스럽게 갈퀴질을 하는 백조와 다름없다.

    '모던 코리아 2.0'의 진전에 발목을 잡은 이가 또 한명 있다. 바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다. 떠났다고 끝이 아니다. 마지막까지 이 사람, 저 사람 자신의 입맞에 맞은 이들을 다 꽂아넣고 최선을 다한척 물러난 듯한 모양새를 취한 김기춘 전 실장이 2년 동안 뭘 했는지 알 수가 없다. 윤병세, 주철기, 김기춘 이들은 모두 박근혜 정부 출범부터 함께한 초창기 멤버다. 하지만 이들이 박 대통령의 주변에 있던 2년이란 세월 속에선 '공허한 메아리'만 들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