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과 철저한 접촉 차단, 입장 밝히기 꺼려해..국회 통과 하루만에 수정 논의
  • 장장 929일 만에 세상에 빛을 본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금지에 관한 법률)이 통과된 다음날인 4일 이 법을 처음 제안한 김영란 전 대법관은 해외로 출국했다.

    김영란법이 통과가 임박하면서 모든 기자들은 김 전 대법관과 접촉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는 한동안 휴대전화도 받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노출을 차단했다.

    김 전 대법관의 남편인 강지원 변호사는 <조선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오늘 아침 일찍 국제회의를 참석하기 위해 공항으로 갔다. 다음 주 중반에 돌아온다"고 말했다.

    강 변호사는 또 "김 전 대법관은 법안 제안자로서 수개월 전부터 인터뷰도 하지 않고 자신의 표현이 언론에 나가길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 ▲ 김영란 전 대법관 ⓒ 조선일보 DB
    ▲ 김영란 전 대법관 ⓒ 조선일보 DB

    김영란 전 대법관은 2011년 6월 국민권익위원장 당시 현직 검사들이 연루된  '스폰서 검사', '벤츠 여검사' 사건이 벌어지자 이른바 '김영란법'을 추진했다.

    당시 법원은 검사들이 고액의 해외 연수비나 고급 승용차를 받았지만, 직무연관성이 없다는 이유로 잇달아 무죄 판결을 내려 국민적 공분을 일으켰다.

    하지만 1년여간의 준비를 거쳐 2012년 8월 국민권익위가 처음 발표한 이 법안은 국회에 계류되면서 수많은 진통과 변화를 겪어야 했다.

    정치권 관계자는 "이번에 통과된 김영란법이 김영란 전 대법관이 법안을 처음 냈을 때의 의도와는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 법안으로 규제 대상이 되는 세력들의 각종 무력화 시도가 이어지면서 본래의 입법 취지가 상당히 퇴색됐다는 우려다.

    정치권에서는 법안 통과 하루도 지나지 않아 개정론이 불거지고 있다. 규제대상이 지나치게 편협적이고 부정청탁의 기준도 모호하다는 지적들이다.

    실제로 최근 일부 언론들은 "김 전 대법관이 법안 통과 전날, 지인들에게 '국민 세금으로 월급 받는 사람까지 대상으로 하려던 것인데 범위가 이렇게 확장됐다. 할말이 많다'고 말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남편 강지원 변호사는 "김 전 대법관이 (법안에 대해)언급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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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상민 법사위원장이 3일 오후 국회 법사위 전체회의에서 김영란법의 가결을 선언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이상민 법사위원장이 3일 오후 국회 법사위 전체회의에서 김영란법의 가결을 선언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이른바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금지에 관한 법률)이 성안·발표된지 929일 만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법원은 지난 2010~2011년 국민적 공분을 불러 일으킨 '스폰서 검사' '벤츠 여검사' 사건 등에 대해 직무관련성이 없다는 이유로 잇달아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그러자 김영란 당시 국민권익위원장은 직무관련성이 없더라도 100만 원 이상의 금품·향응 받으면 대가성에 대한 입증 없이 형사 처벌 가능하도록 하는 법안을 추진했다.

    국민권익위가 2012년 8월 16일 성안해 발표한 법안은 2년을 훌쩍 넘는 기간 동안 변신을 거듭했다.

    당장 이 법안이 통과되면 규제 대상이 되는 공직자들로 가득찬 정부 내에서는 이를 무력화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았다. 법무부의 강경한 반대 속에서 법안은 형사 처벌이 아닌 과태료 부과로 일시 후퇴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잡음이 끊이지 않자 정홍원 국무총리가 이듬해 7월 3일 이성보 국민권익위원장, 국민수 법무부 차관을 불러 직접 중재에 나섰다. 그 결과 직무관련성 있는 금품 수수는 형사 처벌하되, 관련성이 없으면 과태료를 부과하기로 하는 반쪽짜리 중재안이 마련됐다. 이 중재안은 같은 달 29일 정부입법안의 형태로 국무회의에서 의결돼 국회로 넘겨졌다.

    미적거리는 것은 국회도 매한가지였다.

    소관 상임위인 정무위는 국회가 법안이 제출된지 9개월이 넘도록 심의에 착수하지 않았다. 그 사이 터진 세월호 사고에 국회는 기능 마비 상태로 빠져들었다. 이대로라면 2016년 총선까지 법안은 상임위에서 잠자고 있다가 국회의원 임기 만료로 자동 폐기되는 수순이 뻔한 듯 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김영란법을 살려낸 것은 세월호 사고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5월 19일 눈물의 담화를 하면서 국회에 김영란법의 처리를 주문했다.

    박 대통령의 담화가 기폭제가 되면서 7월 10일, 당시 여야 원내지도부인 새누리당 이완구 원내대표·주호영 정책위의장·김재원 원내수석부대표와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원내대표·우윤근 정책위의장·김영록 원내수석부대표는 유병언법·정부조직법과 함께 김영란법을 우선적으로 처리하기로 하는 합의를 했다.

    하지만 세월호 정국을 마무리짓고 국민안전처를 신설하는 유병언법과 정부조직법이 통과된 뒤에도 김영란법은 표류를 거듭했다. 100일 간의 정기국회에서 여야는 12년 만에 예산안을 법정 시한 내에 처리하는 쾌거를 이뤘지만, 김영란법 처리는 불발됐다.

    이에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마지못해 올해 1월 심의를 재개한 정무위는 김영란법에 사립학교 교직원과 언론사 임직원을 포함하기로 하는 수정안을 마련해 법안심사소위를 통과시켰다. 이 과정에서 공직자가 자신의 가족·친족과 이해충돌 관계에 있는 직무를 수행할 수 없도록 하는 '이해충돌방지 조항'은 은근슬쩍 사라졌다.

  • ▲ 김영란법 심의를 위한 법사위 전체회의가 3일 오전부터 오후까지 계속된 가운데, 논의가 공전되자 이상민 법사위원장을 사이에 두고 새누리당 홍일표 간사와 새정치민주연합 전해철 간사가 설전을 벌이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김영란법 심의를 위한 법사위 전체회의가 3일 오전부터 오후까지 계속된 가운데, 논의가 공전되자 이상민 법사위원장을 사이에 두고 새누리당 홍일표 간사와 새정치민주연합 전해철 간사가 설전을 벌이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그러자 새누리당 이완구 원내대표가 "김영란법 적용 대상에 언론인을 포함하는 것을 반대한다"며 제동을 걸고 나섰다. 이완구 원내대표는 새정치연합 우윤근 원내대표와의 주례 회동에서도 이러한 주장을 굽히지 않아, 김영란법 처리에는 다시 브레이크가 걸렸다.

    이는 이완구 원내대표가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되고, 검증 과정에서 김영란법과 관련한 뜻밖의 '녹취록 파문'이 터지면서 씁쓸한 뒷맛과 함께 해결됐다. '녹취록 파문'이 남긴 것은 선뜻 김영란법을 반대할 수 없게 된 정치인과 언론, 그리고 비등해진 국민 여론이었다.

    여야 지도부가 2월 임시국회 중 김영란법 처리를 수 차례 공언하기에 이르자, 새누리당과 새정치연합은 잇달아 의원총회를 열면서 김영란법과 관련된 의견을 수렴했다. 반대 의견이 적지 않았지만, 비등한 국민 여론 앞에서 양당 원내지도부는 '끝장 토론'이라는 형태를 통해 협상 권한을 위임받을 수 있었다.

    자신들이 한 말에 얽매인 여야 원내지도부는 2월 임시국회의 마지막 본회의가 열리는 3월 3일 전날 저녁에 만나 마라톤 협상 끝에 합의안을 마련했다.

    이 과정에서 가족·친족의 범위는 배우자로 대폭 쪼그라들었다. 반면 논란이 된 '직무관련성 없어도 형사 처벌' 조항은 끝까지 살아남는데 성공했다.

    남은 것은 본회의가 열리는 당일 오전 법사위 전체회의에서의 통과, 그리고 오후 본회의에서 통과였다. 법사위 전체회의는 진통을 거듭하며 오후 5시까지 계속돼 하마터면 여야 원내지도부의 당초 시나리오는 어그러질 뻔했다.

    하지만 결국은 법안의 적용 대상에 사립학교재단 임직원을 포함하는 형태로 수정되면서 법사위의 문턱을 넘는데 성공했다. 이처럼 '벼랑 끝의 끝'까지 가서도 김영란법은 변신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법제화됐다.

    '직무관련성 없어도 금품 수수시 형사 처벌'이라는 본질은 지켜냈지만, 변신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김영란법이 많은 것을 잃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정치권 관계자는 "여야 원내지도부 합의 과정에서 가족의 범위가 너무 좁혀졌다"며 "최근 전직 해군참모총장이 아들을 통해 뇌물을 받은 것이 드러났는데, 배우자만 빼놓고 부자·형제 등이 적용 범위에서 모두 빠진 것은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와는 반대로 변신 과정에서 반드시 포함됐어야 할 부분이 누락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다른 정치권 관계자는 "시민단체 대표가 론스타로부터 뇌물을 받아 구속된 일이 있지 않았느냐"며 "언론인과 사립학교 교직원까지 포함됐는데 시민단체 관계자가 포함되지 않은 것은 아쉬운 일"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