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金鍾泌의 마지막 강연,
     "일본인들에게 솔직하게 말한다"

    "외국의 폭도가 황후를 살해하는 일이 일본의 皇居에서 일어났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총론 사과, 각론 변명」으로는 이웃나라의 마음을 풀 수 없다."

  • 趙甲濟   

<2005년 韓日수교 40주년 기념 요미우리新聞 강연회>
   
   2005년 여름, 한일국교 수교 40주년을 맞아 열린 요미우리 신문 강연회에
1962년 「金-오히라 메모」로써 韓日수교 협상의 가장 큰 장애물이던 청구권 액수를 타결한
金鍾泌 前 총리가 한국 측 연사로 나섰다.
정계를 은퇴한 뒤 최초의 본격적 연설이었는데 그동안 가슴에 묻어 두었던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직설적으로 토로했다. 

   일본 측 연사인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前 총리도 『40년간 友情을 나누어 온 사이이지만 처음 듣는 말이었다. 아픈 곳도 있었지만 善意를 깔고 한 충고에 감동했다』고 말했다.

특히 金총리가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이런 일이 일본의 皇居에서 일어났다고 상상해 보라』고 말했을 때는
 청중석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나카소네 前 총리는 취임 직후인 1983년 1월에 일본 총리로서는 최초로 公式 訪韓을 하여
한국어로 연설하고 한국어로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를 부르던 일을 털어놓으면서
『일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나라는 한국이다』는 점을 강조했다.
나카소네 前 총리는 원고 없이 이야기했다. 세계정세에 대한 넓은 안목과 깊은 역사적 통찰력을 느끼게 하는 그의 말은 의외로 쉬웠다. 
   독서의 양이나 韓日 간의 넓은 交友 관계, 정치 歷程의 기복, 그리고 인간적인 깊이에서 두 나라의 政界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두 사람의 연설은 그런 경지를 느끼게 해주었다.

79세의 金 前 총리와 87세의 나카소네 前 총리는 정계를 은퇴한 입장이어서 그런지
공직에 있을 때는 듣기 힘들었을 내용도 솔직하게 말했다.
두 政客의 자연연령을 합치면 166년, 정치경력을 합치면 약 100년의 연륜과 경륜이 녹아 있는 듯한 연설이었다.
그 全文을 소개한다.(趙甲濟 기자)
      
  •    戰中세대의 꿈
       
       여러분들에게 준비한 말씀을 드리기 전에 먼저 양해를 구하려고 합니다.
    제가 하는 말은 여러분들의 귀를 아프게 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일본에 대하여 좀 알고 좋아하는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저까지도 이런 것들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이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들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존경하는 나카소네 총리, 와타나베 요미우리 사장, 그리고 방청객 여러분! 
       올해는 1905년 소위 을사보호조약으로 한국의 자주권이 일본에 의해 박탈된 지 100년,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으로 한국이 독립을 찾은 지 60년, 1965년 韓日 수교가 이뤄진 지 40년이 되는 해입니다. 韓日수교 40주년이 되는 시점에서 그 교섭에 관계했던 본인에게 이런 발언의 기회를 주신 데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한국과 일본 두 나라뿐 아니라 중국과 미국의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하겠습니다. 미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오늘과 어제에 대한 반성과 논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陸士 동기생 중 약 40%를 한국전쟁 때 잃은 戰中세대입니다.
    우리는 金日成이 스탈린과 毛澤東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韓國전쟁 때 소대장·중대장으로 참전하여 특히 희생이 많았습니다. 
       다행히 살아남은 우리 청년 장교들은, 후손들에게 더 이상 이런 分斷과 가난과 隸屬(예속)의 짐을 물려줄 수 없다고 다짐하면서, 국가改造의 꿈을 안고서 朴正熙 장군을 지도자로 모시고
     5·16 군사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뒤 산업화와 민주화를 핵심으로 한 조국 近代化의 과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戰中세대로부터 「근대화의 성공」이란 위대한 유산을 이어받은 우리의 젊은이들은
    이제 한반도의 자유통일과 국가 先進化로 나아가는 길을 달리고 있습니다.
    21세기 어느 시기에 한반도는 반드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旗幟(기치)하에서
    통일된 인구 8000만 명의 선진국으로 자리 잡을 것이란 확신을 저는 가지고 있습니다. 

       올해 광복 60년을 맞는 한국의 이런 번영은 1953년의 상호방위조약에 따른 韓美 安保동맹과 1965년의 修交(수교)에 의한 韓日 우호관계를 토대로 하여 이뤄질 수 있었습니다. 
       한국은 分斷으로 사실상 섬이 되어 대륙과 단절되었지만 더 넓은 자유진영과 해양문화권에
    소속됨으로써 유라시아 대륙을 석권한 국제공산주의의 확산을 한반도의 중간선에서 막아내고
    일본의 안전과 번영에도 적지 않은 寄與를 하였습니다. 

       저는 韓日 國交정상화 교섭에 관계하여 43년 전 오히라 당시 外相과 함께 「金-오히라 메모」라고 불리는 합의를 했습니다. 교섭과정에서 제가 만났던 일본의 지도자들도 태평양전쟁을 경험한 戰中세대 출신들이었습니다. 
       전쟁의 비참함과 평화의 소중함을 체험적으로 알게 된 兩國의 戰中세대는 두 나라 사이에 건설적인 協力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東北亞의 평화와 안정을 확보하여 후손들에게는 반드시 恒久的인 번영의 유산을 물려주자고 以心傳心으로 다짐했던 것입니다. 
       
       일본의 對韓 무역黑字 2400억 달러
       
       우리 두 이웃나라는 古代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빈번한 문화적·人的 교류를 통해서 東洋문명의 일원이 되어 세계사에 남을 만한 창조와 건설의 업적을 남겼습니다만, 침략과 지배, 전쟁과 반목의 시기도 길었습니다. 
       1965년 韓日수교로 시작된 새로운 40년은 兩國 간의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協力과 교류의 時期였다고 평가될 것입니다. 韓日국교 修交가 이뤄졌던 1965년 兩國의 상호 방문자는 1만 명도 되지 않았습니다. 작년 兩國 간 방문자는 하루에 1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올해는 兩國 방문자수가 500만 명을 돌파할 것 같습니다. 

       兩國 무역규모는 작년에 678억 달러에 이르렀고, 일본은 244억 달러의 對韓 무역黑字를 기록했습니다. 한국에 있어서 日本은 제1의 수입국이고, 제3의 수출국입니다.
    日本은 지난 40년간 한국과의 무역에서 약 2414억 달러의 누적 무역黑字를 올렸습니다.
    또한 일본 영화가 한국에서 상영되고, 「욘사마」·「韓流」라고 하여 한국의 배우가 일본에서
    굉장한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최근 시마네 縣(현)의 「다케시마의 날 조례 제정」으로 비롯된 兩國 사이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지난 40년간 착실하게 成長한 兩國 국민들 사이의 교류와 協力의 기반은 흔들리지 않고 작동하고 있습니다. 독도 문제로 한국에서 反日시위가 일어났던 올해 상반기 관광 통계에 따르면, 일본인 입국자 수는 줄기는커녕 前年 同期보다 20% 이상 늘었고, 일본으로 간 한국인 수도 크게 늘었습니다.
       정부 對 정부의 관계를 뛰어넘는 이 국민과 국민 사이의 교류와 협력이야말로 東北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보장할 우리 두 나라의 공동자산입니다. 兩國의 지도층은 정치나 외교보다도
    앞서 가고 있는 두 나라 국민 사이의 경제적·문화적·人的 친선 협력의 바탕을 깨뜨리지 않고
    소중히 가꾸어 나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兩國의 지도층부터가 먼저 정확한
    歷史인식을 공유해야 할 것입니다. 
       
       本家에 대한 分家의 침략
       
       古代에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기술·문화가 일본 문명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저는 일본 저널리스트 사쿠라이 요시코氏가 최근 著書에서 한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요지는, 『인종적으로 몽골과 韓國은 일본인의 本家이다. 分家인 일본인은 항상 本家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동시에 本家인 한국인은 일본열도에 진출하여 찬란한 문명을 만든 分家 사람들의 진취성을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兩國民의 인종적·지리적·역사적 밀접성이 그러한 상호존중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일본 측의 노력이 무엇보다도 바람직할 것입니다.

       올해 일본은 러일전쟁 승리 100주년을 맞았습니다만, 한국인에게 있어서는 여러분의 그 승리가 식민지로 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카소네 총리께서도 최근 요미우리 신문 기고문에서 「일본은 이 전쟁의 승리에 취하여 明治시대의 苦鬪(고투)를 잊고 교만해져 결국 제국주의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지적했습니다.
       한국은 러일전쟁이 끝난 5년 뒤에 일본에 합병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일본의 詩人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지도상에서 조선국을 새카맣게 먹으로 덧칠해 가면서 가을바람 소리를 듣는다』고 슬퍼했습니다.

       일본은 한국을 병합한 데 이어 만주로 진출하였고, 그 침략의 慣性(관성)을 통제하지 못하고
    중국 대륙으로까지 戰線을 확대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 지도부는 러일전쟁 때 自國을 지원하였던 영국·미국과는 멀어지고, 나치 독일과 파쇼 이탈리아와는 가까워졌으며, 이 외교의 실패는 태평양전쟁을 自招(자초)함으로써 일본은 역사상 처음으로 全國的 규모의 패전을 경험하였습니다. 일본인들을 참화 속으로 몰아넣은 일련의 아시아 침략 과정은 한반도에 대한 일본 정부의
    그릇된 역사인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加害者의 논리를 버려야
       
       일본의 明治維新(명치유신)은 아시아 최초의 근대화라는 의미가 있으나 동시에 富國强兵을
    이룩한 일본이 제국주의 路線으로 흘러감으로써 한국·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주었습니다. 일본이 이런 실패의 길을 걷게 된 근본원인은 古代史에 대한 역사인식과 문화적 本家인 한국과 중국에 대한 고마움을 잊어버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일본이 한국인의 마음을 풀지 못한다면 아시아와 화해할 수 없을 것이며, 국제사회의 지도적 위치에 오를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웃나라의 존중을 받지 않는 국가가 어떻게 세계의 지도국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일본의 일부 인사들은 일본의 한반도 및 만주 지배가 불가피했다는 이유로서 조선과 만주가
    일본의 「생명선」이었다느니, 조선에 대한 개입이 淸으로부터 조선을 독립시켜 주려는 의도였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일본의 안전을 위해서는 이웃나라를 식민지로 만들 수 있고, 이웃나라를 군사력으로 유린해도 괜찮다는 이런 생각은 加害者(가해자)의 논리입니다.
    식민지배와 침략행위에 의해 피해를 입은 한국과 중국인들에게 이런 식의 변명은 상처를 도지게 할 뿐입니다. 

       「일본의 생명선」이란 관념 때문에 왜 이웃국민들이 죽어 가야 하며 국가의 자주성을 빼앗겨야 합니까. 일본은 외부의 지배와 침략을 받아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특히 지도층 인사들은 强者·지배자·加害者의 관념과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고 저는 봅니다.
     이런 시각은 일본이 유엔안보리의 상임이사국이 되고 지도적 역할을 짊어지는 데 있어서 결정적 장애가 될 것입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여러분들의 영웅이지만 한국인들에게는 침략의 발상자, 즉 征韓論者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과 아시아 국가 사이엔 국경을 넘으면 영웅이 逆徒가 되고, 逆徒가 영웅이 되는 그런 역사가 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인에겐 明治의 元勳이지만 한국인에게는 침략의 元兇입니다. 

       저는 여기서 일본의 가혹한 한반도 통치를 상기시켜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본인들은 創氏改名으로써 한국인들이 목숨처럼 중히 여기는 姓을 빼앗아 갔습니다.
    한글을 못 쓰게 하였습니다. 정말 민족의 魂(혼)을 말살하려고 하였습니다. 
       
       閔妃 살해
       
       제가 이렇게 말하면 많은 일본 사람들은 『우리는 한국에 대한 식민지배에 대하여 이미 사과할 만큼 했지 않은가』라고 말할 것입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한국인들은 일본 천황과 총리의 사과에 대해서 평가하면서도 그보다 훨씬 횟수가 많았던 소위 妄言(망언)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총론은 사과, 각론은 변명과 부정」이란 것이 한국인의 느낌일 것입니다. 

       나카소네 총리께서는 1986년에 후지오 文部相이 韓日合倂을 옹호하자 그를 파면하신 적이 있습니다만, 天皇과 총리 등의 진실된 사과를 무효로 만들어 버리는 일본 일부 지도층의 발언이
    계속되는 한 진정한 韓日 협력은 어려울 것이란 점을 말씀드립니다. 
       후지오 문부상은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지 않았다고 해도 러시아가 결국은 한국에 손을 댔을 것이기 때문에 일본의 지배는 침략이라고 할 수 없다고 强辯(강변)했습니다. 

       올해는 마침 조선 高宗의 황후인 閔妃가 일본의 미우라 고로 公使 일당에 의해 참살된 지 110년이 되는 해입니다. 미우라 公使의 지휘하에 일본의 폭도들은 王宮으로 난입하여 침실에서 皇后를 살해하고 가솔린을 부어서 死體를 불태웠습니다.

       그 이듬해 신변의 위협을 느낀 高宗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란하였습니다.
    한국이 러시아를 끌어들인 것이 아니라 일본의 그런 행동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일본의 역사학자 이노우에 기요시란 분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閔妃 살해는 세계 어느 나라의 침략외교에서도 없었던 暴虐(포악)한 것이었다.
    그 후 反日투쟁이 민중 속으로 깊게 확산되었다>

       이런 일이 일본의 皇居에서 일어났다고 상상해 보시면
    한국인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분노가 얼마나 깊은 것인가를 짐작하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5월 閔妃 암살에 관계했던 폭도들의 후손들이 한국에 와서 閔妃의 무덤에 참배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많은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의 良識이 살아 있음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거 100년을 뒤돌아보면 韓日 양국은 相剋(상극)의 역사에서 시작하였지만 1965년의 韓日수교를 계기로 하여 갈등하면서도 공존공영하는 단계로 발전해 왔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韓日 국교수립을 주도하였던 朴正熙 대통령과 저는 한국이 경제발전에 성공하여 군사적·외교적으로도 自立·自主하는 나라로 우뚝 서는 것이 對等하고 생산적인 韓日관계를 지속시키는 열쇠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국내외의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경제우선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결국은 튼튼한 안보를 뒷받침했고, 민주화의 토양을 마련했습니다. 북한에 대해서도 한국은 결정적 優位에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韓日국교정상화가 이뤄졌던 1965년의 한국은 1인당 국민所得이 100달러 정도밖에 되지 않는 極貧國이었습니다. 오늘날의 한국은 GDP 기준으로 세계 제11위의 경제규모, 年間 2500억 달러를 수출하는 세계 12위의 무역强國으로 성장하였습니다. 
       한국은 1997년에 外換위기를 겪은 바 있으나 국민들의 희생적인 노력으로 곧 再起하여 지금은 外換보유고가 약 2000억 달러를 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1970년대 朴正熙 대통령이 오일쇼크를 극복하면서 정력적으로 추진하였던 重化學공업화 전략이 성공하여 지금 한국은 첨단정보산업 부문에서도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반도체 D램 생산량·선박 建造量·초고속 인터넷 가입 비율은 세계 1위, 인터넷 이용률은 세계 2위, 電子제품 생산량은 세계 3위, 철강 生産量은 세계 5위, 자동차 生産量과 국가 情報化 指數는 세계 6위, PC 보급대수는 세계 8위에 도달하였습니다. 이런 경제적 성취와 함께 한국은 정치적 자유부문, 국가의 투명성, 삶의 질 부문에서도 선진국 수준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이미 一流 수준으로 올라선 경제·과학·군사 부문에 이어서 정치적·정신적 부문의 先進化까지 이룩함으로써 일본에 이어 非서구국가로서는 두 번째로 세계의 先進國 대열에 합류하는 것이 韓國人 모두의 비전이 되고 있습니다. 
       
       민족적 血債
       
       朴正熙 대통령이 이룩한 한국의 近代化는 일본의 明治維新, 鄧小平의 중국 개방정책과 함께
    아시아의 3대 성공사례로 꼽힐 것입니다. 韓·日·中의 이 성공적 改革은 이 세 나라의 지도층이
    西歐에서 발전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무조건적 수용을 거부하고 東道西器, 또는 和魂洋才의 철학으로써 선진문물을 자기 나라의 토양 속에서 主體的으로 變形시키고 응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戰國시대 齊나라 管仲(관중)에서 시작되는 이러한 동양적 實用정치의 思想은 놀라운 합리성과 과학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미래에도 有效한 東아시아의 위대한 정신적 자산인 것입니다.
    북한의 金正日 정권만은 망한 공산주의를 교조적으로, 또 사대적으로 추종함으로써 후진성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주민들을 굶기면서도 핵무기 개발을 강행함으로써 인류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반도에 통일국가가 들어서면 東아시아에서 평화가 유지되고 활발한 교류하에서
    문화와 예술이 꽃핀다는 것을 역사 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7세기 말 한반도를 통일한 新羅와 壬申의 亂을 통해 집권한 天武 천황下의 일본은 과거의 敵對
    관계를 버리고 긴밀하게 교류하였습니다. 

       일본이 古代국가의 기틀을 세우는 데는 먼저 古代국가를 완성했던 신라로부터 배운 것이 참고가 되었다고 합니다. 반면 한반도가 분열되면 주변국가의 개입을 불러 국제 전쟁터가 됨으로써 東아시아에 불행이 찾아온다는 것은 한국전쟁과 러일전쟁 등이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한국이 자유진영의 前哨(전초)기지이자 일본 안보의 방파제 역할을 했던 지난 60년간
    한국의 발전과정에 일본의 많은 협력이 있었습니다.
    저는 누가 뭐래도 이런 일본의 협력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韓日 국교 수립에 의한 對日청구권 자금 8억 달러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한국의 基幹(기간)산업과 인프라 건설에 투입되었으며,
    일본 기업으로부터 들여온 선진 기술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큰 助力이 되었습니다. 
       浦項제철의 경우 초기에 투자된 약 1억3000만 달러의 청구권 자금은 「民族的 血債」로 불리면서 이 회사를 세계적 기업으로 키우는 데 기여했습니다. 韓日교류는 施惠(시혜)니 從屬(종속)이니 하는 일방적 낱말로써는 설명될 수 없는 양면성을 띠게 되었고, 결국은 양국의 相互 이득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韓·日·中의 GDP, 미국 능가
       
       일본과 한국에 이어 중국이 놀라운 고도 경제성장을 계속하면서 東北亞는 이제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지역이 되었습니다. 구매력(PPP: Purchasing Power Parity)을 기준으로 할 때
    한국·日本·중국, 이 세 나라의 國民총생산은 약 12조 달러에 달해 11조 달러의 미국을 능가하게 되었습니다. 日中 무역액은 약 2000억 달러로서 사상 최초로 美日 무역액을 앞질렀습니다. 
       韓中 무역액도 794억 달러를 기록하여 韓美 무역액을 초과하고 있습니다. 작년 일본은 250억 달러의 對中 무역 적자를 기록했습니다. 미국도 중국에 대해서 1650억 달러의 무역적자를 보았습니다. 한편 한국은 중국에 대해서 약 200억 달러의 무역흑자, 일본에 대해서는 240억 달러의 무역적자를 냈습니다. 
       이렇게 하여 韓·日·中, 아시아 3國 관계는 밀접한 관계로 발전하였고, 여기에다가 미국을 더하면 이 4國은 일종의 태평양 4國 경제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韓·日·美·中 이 네 나라의 GDP를 합산하면 세계 전체의 반을 넘어섭니다. 

       올해 악화된 韓日·日中의 외교관계는 이렇게 밀착된 경제적 구조를 뛰어넘을 수 없어 그 긴장이 완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中國도 年間 약 2000억 달러의 무역흑자를 自國에 선물하는 美國과 日本을 상대로 敵對정책을 유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東北亞의 협력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첫 작업으로서 저는 총리 시절 아시아금융기구, 즉 AMF(Asia Monetary Fund)의 창설을 제안한 바 있었습니다. 저는 이 기회에 태평양 4개국 경제공동체의 持續的(지속적) 번영을 위한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합니다. 

       첫째, 東北亞의 韓·日·中 세 나라의 共存共榮을 위해서는 반드시 미국의 참여가 필요합니다.
    美國을 제외한 채 東北亞의 번영과 평화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韓美동맹과 日美 안보협력체제는 한반도 통일 이후에도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제1차 세계대전의 교훈을 지적하려고 합니다. 大戰 이전의 유럽은 경제적 교류는 활발했지만 이를 관리할 安保협의체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암살되는 예기치 못한 불상사를 통제하지 못하고, 여러 나라들이 원하지 않은 전쟁에 연쇄적으로 휘말려 들었던 것입니다.이 교훈을 바탕으로 韓·日·美·中의 태평양 4大國 사이에 위기를 관리할 수 있는 기구가 존재해야 하며, 특히 국가 지도자 사이의 정기적인 대화 체제가 견고하게 만들어져야 할 것입니다. 

       셋째, 지난 150년간 민주주의 국가와 민주주의 국가는 전쟁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 주시길 바랍니다. 東北亞의 번영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한국과 일본의 민주주의가 성숙하고, 중국의 민주화가 자리잡고, 북한의 독재정권이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국·미국·일본이 域內의 민주화를 촉진시켜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이 지역의 평화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자유의 擴散
       
       한국에서의 최근 反日시위에 대해서 韓日 양 국민들이 여유 있는 대응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인들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분노하면서도 정부의 세련되지 못한 對日 정책에 대해서는 공개적인 비판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양 국민들의 이런 성숙한 자세가 외교마찰을 완화시키면서 교류와 협력을 지속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東北아시아의 항구적인 평화는 金正日정권의 민주화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金正日 정권의 핵무기 개발과 人權탄압, 그리고 일본인 및 한국인 납치행위의 原因은 이 정권의 본질인 독재성입니다. 하지만 金正日 정권은 쉽게 붕괴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측불가능한 金正日 정권을 상대로 해결책을 추진함에 있어서 그 방법이 평화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에 세계의 고민이 있습니다. 
       지금 6者회담은 회담을 위한 회담에 머물고 있습니다. 기능하지 않고 있습니다.
    핵무기로써 세계를 위협하고 있는 金正日 정권에 대하여 무엇을 기대할 것이 있다고 모든 것을
    회의를 통해서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면서 그들에게 시간의 여유를 주고 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다가 오히려 북한 정권으로부터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강요당하지나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北韓 핵개발 문제를 하루속히 유엔안전보장이사회로 가져가서 국제사회가 단결된 모습으로 문제해결에 나서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국제공산주의자들의 침략을 저지했던 한국전쟁이 韓國의 힘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과 같이 한국의 통일은 韓國人의 힘만으로써는 어려울 것입니다. 한반도 分斷과 同族상잔의 비극은 日帝의 한반도 지배와 제2차 세계대전의 戰後처리가 불러온 결과입니다.
    일본에 책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한국이 主導할 南北韓 통일과정에 일본이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것은 이런 역사적인 빚을 갚는
    일도 될 것입니다. 
       
       일본에 대한 不信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분노와 한국에 대한 일본인들의 경멸감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던 1965년에 한국과 일본은 대등한 국가관계를 맺었습니다. 이 국교정상화에 관계했던 한 사람으로서 저는 국교수립에 즈음한 朴正熙 대통령의 담화문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朴대통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우리 국민 일부 중에 韓日교섭의 결과가 굴욕적이니 低자세니 심지어 매국적이라고까지 極言(극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이 진심으로 우리가 또다시 일본의 침략을 당할까 두려워하고 경제적으로 예속이 될까 걱정을 한 데서 나온 것이라면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어찌하여 그들은 그처럼 자신이 없고 피해의식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日本이라면 무조건 겁을 집어먹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비굴한 생각, 이것이야말로 바로 굴욕적인 자세라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나는 이 기회에 일본 국민들에게도 한 마디 밝혀둘 일이 있습니다. 과거 일본이 저지른 罪過(죄과)들이 오늘의 日本 국민이나 오늘의 세대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역시 믿을 수 없는 국민이다」 하는 對日 不信감정이 우리 국민들 가슴속에 또다시 싹트기 시작한다면 이번에 체결된 모든 협정은 아무런 의의를 지니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이 기회에 거듭 밝혀 두는 바입니다』 

       다행스럽게도 韓國人의 일본인에 대한 열등감과 패배의식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불행하게도 일본의 일부 지도적 인사들은 한국과 중국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함으로써 일본을
    不信케 하는 言動을 계속해 왔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두고 싶습니다.
    「말해야 되는 것과 가슴속에 묻어 두어야 하는 것을 구별할 수는 없는가」라고 말입니다. 

       創氏改名과 한국어 말살정책에 대한 변명, 강제 동원된 從軍위안부의 존재에 대한 부정, 징병·징용된 사람들에 대한 무시, 韓中 양국 민들에게 고통을 안겨 준 戰犯들의 위패가 있는 야스쿠니 神社에 대한 일본 국가 지도부의 참배, 獨島 영유권 주장, 日帝의 침략행위를 변명하는 교과서의 채택 문제 등 일본의 일부 지도적 인사들은 아직도 東아시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아물지 않고
    있는 역사적 상처를 도지게 하는 행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최근 일본 시마네 縣이 「다케시마의 날」 조례 제정으로 韓日관계를 악화시킨 적이 있었습니다. 이번 교과서 검정 과정에서 일본의 공무원들이 개입하여 교과서 제작자 측이 記述한, 「獨島가 韓日 간의 분쟁지역」이란 표현을 「獨島는 일본의 영토」라는 식으로 바꾸도록 작용했다는 말도 들었지만 사실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이 자리에서 한국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獨島문제를 깊게 언급할 필요는 없지만 몇 가지만 지적해 두려고 합니다. 
       
       獨島문제는 未해결이 해결책
       
       일본이 1905년에 와서 이 섬을 자신의 영토에 편입했다는 주장은 말을 바꾸면 그 전에는 일본 영토가 아니었다는 自白에 다름 아닙니다. 일본 정부는 獨島가 「역사적」으로 일본 것이었다고 주장하는데, 그 역사란 것은 1905년 이후를 의미합니다. 
       한국은 6세기 신라 시대부터 獨島를 영유, 관리해 왔기 때문에 별도로 영토편입을 선언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다만, 空島정책을 쓰다가 개척정책으로 바꾼 1900년에 대한제국 정부는 칙령 제41호로써 獨島(당시 명칭은 「石島」)를 울릉군수의 관할범위로 명시하였습니다. 
       일본의 영토편입 조치보다도 5년이나 빨랐습니다. 이에 따라 1906년에 일본의 시마네 縣이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통보해 왔을 때 대한제국은 이 칙령에 따라 우리 땅임을 분명히 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조선왕조실록 및 비변사 謄錄(등록)과 같은 국가 문서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明記되어 있고, 官撰 영토지도에도 나타납니다. 1877년 明治정부는 기록에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 또는 「일본영토 외의 지역」으로 적었습니다. 일본의 官撰 영토지도에서도 獨島는 일본 땅이 아닌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셋째, 일본이 러일전쟁 중에 獨島를 빼앗아 간 것은 5년 뒤 韓國倂合의 첫 조치였습니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開戰하자마자 조선을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외교권을 박탈해 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獨島를 시마네 縣으로 편입시킨 행위는 한반도 병합의 一步였습니다. 따라서 일본이 獨島 영유권을 제기하면 할수록 한국인들은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불행했던 과거」를 떠올리게 되어 있습니다.
       獨島의 한국 영유는 이처럼 역사적·지리적·문헌적으로 확실합니다.
    일본 정부는 한국과 전쟁을 하지 않는 한 獨島를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이 돌섬을 놓고 전쟁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를 이런 식으로 제기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합니다. 일본은 獨島 영유권 주장을 과감히
    포기하든지 그렇게 할 수 없다면 현상을 인정하고 지금처럼 미해결 상태로 놓아 두는 「미해결의 해결」은 불가능한 것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이 이상의 모독은 없다
       
       저는 2001년 韓日 양국 頂上회담에서 합의하여 양국 학자들 사이에서 진행 중인 역사공동 연구가 꾸준히 持續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기간 내의 합의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이런 對話의 持續 자체가 양국간의 異見을 좁히고 역사관을 正立시켜 가는 데 실마리가 될 것입니다. 
       저는 야스쿠니 神社에 안치된 태평양전쟁 戰犯의 위패를 다른 곳으로 分祀(분사)할 수는 없는가 하고 전부터 일본의 지도자들에게 말해 왔습니다. 지금 상태에서는 한국과 중국 사람들의 怨念은 수그러들지 않을 것입니다. 참배를 중단할 것인가, 分祀할 것인가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거 日帝가 戰時 총동원체제를 강화해 가고 있던 시기에 있었던 創氏改名과 징병·징용, 그리고 從軍위안부 동원이 朝鮮人들의 자발적 의사에 의해 이뤄졌다는 발언보다도 더 지독한 侮辱(모욕)은 없을 것입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사실이 아닙니다. 

       저도 청년기 때 저의 이 눈으로 보았습니다. 朝鮮 農村의 가난한 처녀들이 일본의 공장에서 일한다는 말에 속아서 끌려간 뒤에 從軍위안부가 되어 많이 죽었고,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은 극히 일부였습니다. 이토 마사노리(伊藤正德)라는 戰史작가가 쓴 책에도 朝鮮人 출신의 從軍위안부들이 뉴기니까지 끌려갔다가 죽어 가는 장면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韓國과 中國은, 明治維新으로 먼저 근대화했던 일본인들의 우월감과 자존심을 만족시켜 주었던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韓國과 中國은 對等한 입장에 서서 日本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와 독일의 경우 나폴레옹 전쟁, 普佛전쟁,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등 네 차례의 전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화해했고 지금은 EU 안에서 공동의 번영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韓國에 대하여 壬辰倭亂과 식민지 지배의 고통을 안겨 주었던 일본은 한반도 통일을 위하여
    고난의 길을 걷고 있는 한국에 대하여 성의 있는 협력을 함으로써 東北亞에 영원한 평화와 번영의 구조를 정착시킬 책임이 있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드럽고 謙讓하고 여유 있는 일본인」을 바란다
       
       明治維新 이후 일본을 여행한 서양 사람들은 귀국한 뒤에 『일본 사람들은 부드럽고, 謙讓(겸양)하고, 마음에 여유가 있다』라고 소개했다고 합니다. 오늘의 일본인들에 대해서도 외국인들이 이런 인상을 가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인들이 먼저 주변국들을 대하는 자세부터가 부드럽고, 謙讓하며, 여유 있는 모습이어야 할 것이고 이런 노력은 여러분들을 존경받는 세계인으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항복한 후 북한지역에서는 일본인들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받으면서 철수했으나 남한에서는 평온하고도 무사하게 귀국했습니다.
    남한과 북한의 이 차이를 비교해 보면 여러분들께서는 크게 생각하는 바가 있을 줄 압니다.
    여류작가 후지하라 데이의 작품 「흐르는 별은 살아 있다」에 당시의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一讀을 권하는 바입니다.

       최근 한 일본 정치인의 말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는 중국에 대해서는 분열정책을 써야 하고, 중국인들의 DNA 속에는 돈 숭배 사상밖에 없다고 極言하면서 『나는 今後에도 중국인들이 싫어하는 것을 계속해서 이야기할 것이고 그리하여
    「惡名 높은 일본인」의 역할을 오히려 명예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일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정치인이 「文藝春秋」의 여론조사에 의해 차기 총리 후보 1위로 뽑혔다는 점에 적지 않게 놀랐습니다.

       그러나 과거를 돌아보면 실수도 많았지만 이 세상은 나쁜 사람들보다는 좋은 사람들이 더 많아서인지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나아지는 發展의 道程을 걸어왔습니다.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역사적·인종적 인연으로 해서 영구히 좋은 친구, 좋은 이웃, 좋은 파트너로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관계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제 兩國의 戰中세대는 거의가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습니다. 넘어야 할 高地는 아직 있으나 그곳은 저와 같은 老兵이 나타날 무대는 아닐 것입니다. 다만, 남은 생애 중에 우리가 졌던 역사의 짐을 다음 세대에게는 넘기지 않도록 微力이나마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여러분들께서도 韓日, 日韓 두 나라가 共存共榮의 장래를 약속할 수 있도록 같이 노력하고 함께 전진하시지 않겠습니까. 장시간 경청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