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파 당 지도부 해명하랴, 초선 당대표 '덜컥' 제안 챙기랴…당황과 민망의 연속
  • 정치권은 '말의 성찬'이 펼쳐지는 장이다.

    하루에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말을 쏟아내는 것도 모자라, 페이스북·트위터·블로그 등 SNS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알린다.

    원내의 주요 정당은 수석대변인·당 대변인·원내대변인·부대변인 등 말만을 전문으로 하는 다양한 직책을 두고, 자당의 입장을 옹호하며 상대 당을 향해 포문을 연다.

    박근혜 정부 3년차. 차기 대권에 관심이 모아지고, 여야가 내년 총선과 내후년 대선을 앞두고 새로운 진용을 짜는 요즘에는 수위 높은 일침(一鍼)이나 튀는 발언으로 주목을 끌려는 정치인들이 더욱 속출한다.

    이럴때면 당 대변인실은 정신이 없다. 당 지도부의 발언에 무게를 싣기도 해야하지만, 여론의 반응이 좋지 않은 것들을 응급조치하는 '구조대' 역할도 자처해야 한다.

    이들 대변인들이 다급해지는 상황, 당황해하는 상황, 민망해하는 상황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핵심 당직자의 '덜컥' 발언부터 뜻밖의 언론 보도까지, 다양한 사례를 살펴본다.


  • ▲ 새누리당 김영우 수석대변인.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새누리당 김영우 수석대변인.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최고위급 당직자의 '덜컥' 발언… 뒷수습은 대변인 몫

    대변인이 가장 바빠지는 상황 중의 하나는 최고위급 당직자의 돌발 발언이 나왔을 때다.

    정치인들 중에서는 평소 준비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즉흥적인 제안이나 발언을 하는 기분파가 있다. 일개 의원일 때는 기사화가 잘 되지 않으니 문제될 것이 없고, 혹시 기사화가 되더라도 자기 발언에 자기가 책임지고 해명하면 그만일 뿐, 대변인이 나설 일은 아니다.

    하지만 덜컥 발언을 즐겨하는 기분파 의원이 핵심 당직자가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다선 의원으로 여러 번에 걸쳐 당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면, 그 스스로 당직에 있을 때와 당직에 있지 않을 때를 가리기 때문에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당 대표가 처음'이라거나 '원내대표가 처음'인 경우는 반드시 한두 번쯤은 문제를 야기하곤 한다.

    새정치연합 문재인 대표는 13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이완구 당시 국무총리 후보자가 부적격이라는 내용의 발언을 이어가던 중, 발언 말미에 "정치 공세라 여겨진다면 중립적이고 공신력 있는 여론조사 기관을 통해 여야 공동으로 조사하자"고 제안했다. 주요 당직자들이나 자리에 함께 한 최고위원들과도 사전에 협의되지 않은 '덜컥' 제안이었다.

    수세에 몰려 있던 새누리당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국무총리마저 여론조사로 뽑자는 것은 포퓰리즘의 극치" "삼권분립을 뒤흔드는 반민주적 발상"이라는 공세가 쏟아졌다.

    반대로 새정치연합 대변인들은 하루 종일 문재인 대표의 '덜컥' 발언을 해명하기에 바빴다. "이완구 후보자는 자격미달"이라는 내용을 논평하러 왔던 박완주 원내대변인은 문재인 대표의 '여론조사 제안'에 대한 질문이 쏟아지자 "모든 걸 여론조사로 하면 정치가 사라진다"고 인정하면서도 "대표의 여론조사 제안은 액션 플랜이 아닐 것"이라고 두둔했다.

    파문이 가라앉지 않자 김영록 수석대변인은 이례적으로 이날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브리핑을 하며 "국회가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국민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취지로, 여론조사는 그 방안의 하나"라고 해명해야 했다. 취재진과의 질의·응답 과정에서는 "여론조사를 최종 의사결정 수단으로 하자는 뜻은 아니다"라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 ▲ 새누리당 민현주 원내대변인.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새누리당 민현주 원내대변인.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뭐라고 나왔는데?"… 정치권의 모든 현안에 즉석에서 답해야 하기도

    대변인은 정치·경제·문화 등 우리 사회의 각종 현안에 대해 논평하기 위해 하루에도 두세 차례 국회 기자회견장을 찾는다. 비공개 최고위원회의 등 당의 최고위급 결정 과정을 브리핑하기도 한다. 원내대변인은 쟁점 법안에 대한 입장 등 원내 현안을 설명하기 위해 역시 기자회견장을 자주 찾는다.

    하지만 '살아 움직이는 생물'인 정치의 속성상, 취재진의 관심은 브리핑하는 내용이 아닌, 다른 이슈에 쏠려 있는 경우도 많다. 이런 경우, 대변인은 미처 자신이 파악하고 있지 못했던 사항에 대해서 즉석 질의·응답에 답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새누리당 이군현 사무총장은 지난달 16일 한 라디오에 출연한 자리에서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명예이사장의 여의도연구원장 임명은) 살아 있는 카드라고 봐야 한다"고 밝혔다.

    이틀 전, 김무성 대표최고위원은 신년 기자회견을 하면서 서청원 최고위원 등 친박(親朴)계의 반발을 고려해 '박세일 카드'를 철회할 듯한 의사를 비쳤었기 때문에 이는 정치권에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수습·봉합 국면으로 가는 듯 했던 새누리당계 계파 갈등이 재점화될 수 있는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어린이 안전은 우리의 최우선 책무' 등 평이한 현안을 브리핑하러 기자회견장을 찾았던 새누리당 김영우 수석대변인은, 이날 오전 가장 먼저 기자회견장을 찾은 새누리당 대변인이라는 이유로 이에 관한 질문을 맞아야 했다.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사무총장께서 뭐라고 하셨는데?"라고 되물은 김영우 수석대변인은 취재진으로부터 라디오 발언을 전달받은 뒤, 신중하게 단어를 골라가며 천천히 답했다.

    김영우 수석대변인은 "그저께(지난달 14일) 김무성 대표는 당의 평화를 깰 생각이 없기 때문에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을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며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본다는 것은, 고집도 철회도 아닌 상태에서 결론이 어떻게 날지 모른다는 뜻"이라고 다소 모호한 입장을 밝혔다.

    이 경우는 고위급 당직자의 발언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었던 경우이지만, 다음 사례처럼 발언 사실 자체는 알고 있었지만, 기사가 다른 맥락으로 나가면서 대변인이 당황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복수의 매체는 26일 새정치연합 문재인 대표가 박근혜 대통령과의 영수회담을 제의했다고 보도했다.

    헌법재판소의 간통죄 위헌 결정과 관련해 브리핑을 하러 왔다가 이와 관련된 질문을 받은 유은혜 대변인은 "확정적으로 제의하신 것은 아닌데…"라고 말끝을 흐리며 "기사가 어떻게 나왔느냐"고 물었다.

    곁에 있던 보좌진이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검색해 보여주자, 유은혜 대변인은 "그냥 '제의'라고만 나갔네. 그런 것은 아닌데…"라며 "여러 가지 여건이 성숙되면 (영수회담을) 제의할 수도 있고, 할 의향도 있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유은혜 대변인은 "영수회담을 하게 되면 성과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그런 여건이 아니지 않느냐"며 "그런 여러 가지 여건이 갖춰지면 영수회담을 할 수도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달라"고 밝혔다.

  • ▲ 새정치민주연합 서영교 원내대변인.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새정치민주연합 서영교 원내대변인.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논평 잘 봤다"… 당 입장 대변(代辯)했을 뿐인데

    대변인은 당의 입장을 말그대로 대변(代辯)한다. 여야의 대립이 첨예해지고 정국이 경색되면, 앞장서서 상대 당을 공격하는, 공세의 첨병을 맡는다.

    문제는 그 스스로 의원의 한 명으로서, 이렇게 공격하다가도 상임위에서, 본회의에서, 또 어딘가 다른 곳에서 그 공세의 대상과 마주칠 일이 많다는 것이다. '당의 입장을 대변했을 뿐'이라는 것은 잘 알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좋을 수야 없는 게 인지상정.

    우여곡절 끝에 이완구 국무총리가 인사청문회와 임명동의안을 통과하고 국회를 다시 찾은 24일. 5개월간 여야 협상의 파트너로 호흡을 맞췄던 새정치연합 원내지도부는 이완구 총리를 반갑게 맞았다.

    특히 우윤근 원내대표는 모두발언을 하던 중 눈물까지 글썽였다. 이를 바라본 이완구 총리도 눈시울이 붉어져 손수건을 꺼냈다. 안규백 원내수석부대표도 호응하는 등 시종 따뜻하고 감동이 넘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 새정치연합 서영교 원내대변인이 뒤늦게 합류했다. 이완구 총리는 서영교 대변인과 반갑게 악수하면서도 "논평은 잘 봤다"며 뼈있는 농담을 건넸다. 악수하다가 이 말을 들은 서영교 대변인은 다소 멋쩍은 표정을 지어야 했다.

    서영교 원내대변인은 이완구 총리가 후보자로 인사청문회를 받던 시기, "여론의 추이는 이미 물건너 간 상황" "후보자가 스스로 반성하며 거취를 고민해야 한다"는 등의 논평을 했다.

    12일 오후 새누리당이 단독으로 인사청문특위를 열어 심사경과보고서를 채택한 뒤에는, 격앙된 당의 분위기를 반영해 더욱 강력한 논평을 냈다. 이날 오후 서영교 원내대변인은 이완구 당시 후보자를 향해 "비리 의혹의 종합선물세트이며, 안 되는 부적격 이유가 13가지나 되는 골든벨 당사자"라고 직격탄을 날렸었다.


    ◆한 마디, 한 대목만 부각하는 언론의 속성에 당황하기도

    국회 속기록과 기사는 다르다. 속기록은 있는 사실을 그대로 강약의 포인트를 주는 일 없이 전달하지만, 기사는 가장 화제가 될 만한 순간과 대목에 집중한다.

    선수(選數)가 많고 여러 당직을 두루 거친 경험 있는 정치인은 자신의 발언 중 어느 대목이 보도될지를 본능적으로 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최고위원이 지난달 14일 신년 기자회견을 하면서 이른바 'K-Y 수첩 파문'에 대한 취재진의 질문이 나오자 "중요하지 않은 문제(수첩 파문)만 보도될까 걱정"이라며 "(신년 기자회견 중) 경제에 할애한 것이 부각돼 국민 앞에 잘 알려지길 바랐는데…"라고 한숨을 쉰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아니나다를까, 신년기자회견에 대한 주요 매체의 보도는 김무성 대표의 예상 그대로였다.

    핵심 당직자의 '긴 말씀' 중에서 한 마디만 떼내어 보도하는 언론의 속성 탓에, 대변인은 나중에 해당 발언이 나오게 된 맥락을 길게 설명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복수의 매체는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가 27일 청와대의 비서실장·정무특보 인사에 유감을 표했다고 보도했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이날 "국정원장 하신 지 얼마 안 되는 분이 실장으로 가셔서 조금 유감"이라며 "현직 의원이 대통령 특보가 되는 것에 대해서도 문제 의식이 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정무수석으로부터 인사 내용을 통보받은 것도 "(인사 발표가 있기 1시간 전인) 오후 1시"라고 불만을 표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같은 날 오후 국무위원 인사청문회 일정을 브리핑하러 기자회견장을 찾았던 민현주 원내대변인은 이에 관한 질문을 받고 "정말 그런 게 아니었다"며 "내내 덕담을 하다가 그 한 부분, 한 마디만을 했을 뿐인데 그것만 (기사가) 나가더라"고 설명했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이병기 신임 비서실장과 2002년 대선 때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과 대선 후보 정무특보로 한솥밥을 먹은 적이 있다. 2007년 대선 후보 경선 때도 박근혜 캠프에서 함께 일했다. 누구보다 절친한 사이라는 것이 민현주 원내대변인의 설명이다. 실제로 이날 유승민 원내대표는 "이병기 실장이 소통을 상당히 잘하실 것으로 기대한다"며 "당·정·청이 대화하고 박근혜 정부가 성공하는데 큰 역할을 하실 분"이라는 덕담을 길게 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현주 원내대변인은 유승민 원내대표가 청와대로부터 인사 내용을 뒤늦게 통보받아 불만을 표했다는 언론보도에 대해서도 "취재진이 '몇 시에 통보를 받으셨나'라고 물어 '오후 1시'라고 답하신 게 전부"라며 "앞뒤로 아무런 사족도 없었고 그 한 마디 뿐이었는데, 그게 어떻게 불만을 표한 것이 되느냐"고 해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