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여성 임원, 자녀에 ‘올인’한 전업주부의 진솔한 고백록
  • ▲ 엄마의 작은 혁명 책 표지.ⓒ 사진 출판사 제공
    ▲ 엄마의 작은 혁명 책 표지.ⓒ 사진 출판사 제공

    25년간 성공적인 직장생활을 하며 승승장구 했지만 정작 집에서는 소외되었던 김상임 엄마. 아이 한 번 잘 키워보겠다고 헌신했건만 내 맘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고, 아이마저 자유를 찾아 떠난 이은아 엄마.

    이 책은 워킹맘으로, 전업맘으로 인생의 황금기를 보낸 두 엄마가, 새롭게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선 여정을 담백하게 그린 ‘엄마들이 젊은 세대에게 전하는 이야기’이다.

    두 엄마는 각각 워킹맘과 전업맘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꿈을 찾기 위해 나서면서 삶의 변화를 경험했다. 이 경험은 일과 가정, 자신의 삶이 균형을 찾으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원동력이 됐다.

    대한민국 엄마들이 셀프코칭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고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도록 다양한 코칭 툴을 본문에 담았다. 엄마의 꿈이 왜 중요한지, 그 꿈을 어떻게 이룰 것인지, 어떻게 행복한 삶으로 변화할 수 있는지 『엄마의 자기혁명』을 통해 찾길 바란다.

    나는 정말 멋모르고 결혼을 했다. 사회생활을 채 일 년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결혼했고, 27살에 첫 애를 출산했다.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된 것이다. 처음 임신을 모르고 건강검진을 했다.

    많은 산부인과 의사들이 건강한 태아를 보장할 수 없다며 간접적으로 유산을 권유했다. 그때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중절 수술은 좋은 병원에서 해야 한다기에 사람들이 추천해 준 병원에 예약을 하고 수술하러 갔다. 병원에서는 100% 확신할 수는 없지만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도 있다며 수술을 만류했다. 대신 나는 8개월간 무척 가슴을 졸였다.

    결혼할 때도 회사가 뒤집어질 정도로 핫이슈였는데 출산은 더더욱 그랬다. 그래서 더 철저하게 나를 관리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임신하면 졸음이 온다느니, 낮잠을 자야 한다느니 하는 말은 나에게 사치였다.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정신줄을 놓지 않고 더 집중해서 업무를 했다. 당시 주 업무가 광파일 시스템 관리였다. 서류를 전자파일로 스캐닝해서 보관하는 업무였다. 전자파가 태아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것 같은 생각에 걱정거리가 늘어났다.

    신문을 덮고 또 덮어도 세어 나오는 전자파를 차단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많은 걱정 속에 잉태한 그 순간부터 출산하는 날까지 매일 건강한 아이를 출산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출산하는 날 아이가 정상인지를 묻고 실신한 기억이 있다. 다행히 아이는 건강했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보니 문제는 출산이 아니라 육아였다. 내가 택한 전략은 시어머니에게 조르기 작전이었다. 처음에는 아주 당황하는 기색이셨다.

    우리는 맞벌이를 하고 싶다고 말씀드리고 계속 간곡히 부탁드렸다. 솔직히 ‘저는 애를 키울 자신이 없습니다’라며 엄살을 떨었다. 실제 그랬다. 아이를 가까이 한 적도 없고 워낙 활동적인 성향이 강한 나는 하루종일 집에서 애만 키우고 남편을 기다리면서 산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었다.

    시댁은 시아버지가 8대 독자로 자손이 아주 귀한 집안이었다. 아들을 출산한 둘째 며느리가 기특해 보이셨을 것이다. 몇 번을 부탁드렸다. 너무 뻔뻔스럽게 부탁을 드리니 나중에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애를 봐주시겠다고 했다.

    3주간의 출산휴가를 마치는 날 파주에 있는 시댁에 애를 떼어놓고 오면서, 가슴이 쓰라리고 눈물이 한없이 줄줄 흘렀다. 자꾸만 애가 눈에 밟혔다. 슬픈 감정에 빠진 것도 잠시 출산휴가를 마치고 회사에 다시 출근하면서 전쟁은 시작됐다. 새벽에 남편과 밥을 챙겨먹고 달음질치며 출근했다.

    업무 숙련도도 낮은 신입이라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시절이었다. 주중에는 회사 일에 녹초가 되고 주말이면 육아에 필요한 의·식·주 용품을 바리바리 싸들고 시댁으로 달려가는 생활을 이어갔다.

    몸이 고단할 땐 ‘내가 지금 뭐하는 건가’ 하는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나에겐 주말이 더 힘든 시간이었다. 자식을 시어머니에게 맡겨 놓은 이상 자유로울 수 없었다. 잘 보여야 우리 아들에게 잘 해주실거라는 생각, 애를 본다는 것이 육체적으로도 너무 힘든 일임을 알기에 보상을 해 드려야 한다는 생각, 가능하면 좋은 먹거리를 애한테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생각 등으로 심신을 혹사하면서 주말을 보내야만 했다.

    휴식이 없다보니 신경이 예민해지는 일이 잦아졌다. 칭얼대는 아들을 받아줄 수 없었고 너무 당당하게 며느리 역할을 강조하는 시댁에 가끔 화가 나기도 했다. 괜스레 화살이 남편에게 가기 일쑤였다. 아직 세상물정을 모르는 내가 참아내기 힘든 순간들이 늘어났다.

    그러면서 그 어린 불쌍한 아들에게 화를 내고 감정을 노출하는 횟수가 늘어갔다. 치닫는 스트레스를 감당할 수 없을 때는 심하게 야단치고 가끔 체벌을 가하기도 했다. 이성을 잃었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참다 참다 어느 순간에 폭발하는 나를 제어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자꾸 늘어났다.

    어린 아들에게 화풀이를 해댔다. 그러면서 회사는 회사대로 업무가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야근도 잦아졌다. 정말 힘들었고 신경이 날카로워져 가까운 사람들에게 자주 히스테리를 부렸다. 사면초가의 상황이 이어졌다.

       ― <엄마가 준 마음의 상처, 엄마가 치유해주어라> 중에서( 책 본문 17~18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