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 특집 다큐, 엉터리 '수정주의' 사관 가득 "교묘한 선전선동 방송"

  • KBS는 대체 어느 나라의 공영방송인가?
    KBS가 지난 7일 방송한 다큐멘터리 <광복 70주년 특집 '뿌리깊은 미래' 1편 - 생의 자화상>이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다뤄 논란이 일고 있다.

    57분 분량의 이 다큐멘터리는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탄생과 3년간 지속된 6.25전쟁을 그리면서, [건국]이나 [대한민국]이란 단어를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 벌어진 전쟁이었음에도 불구, 이 다큐에선 대한민국의 피란민들을 [남녘 사람]이라고 지칭했다.

    대구 10.1폭동을 묘사하면서 미군정이 시행한 강제적 미곡 수매(收買)가 시민 봉기의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편협한 시각을 드러냈다.

    최근 재조명 받고 있는 흥남철수작전에 대해서도 "당시 부두에 민간인들이 남아 있었다"는 내레이션과 함께 수초간 미군의 흥남부두 폭파장면을 내보내, 남겨진 피란민들이 사망했을 것이라고 시청자들이 상상하도록 유도했다.

    가장 심각한 대목은 "(전쟁 발발 직전) 총격전은 38선 부근에선 으레 있던 일이었다"고 기술한 부분이다.

    얼핏보면 별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6.25전쟁이 북한의 남침에 의해 발발한 침략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희석시키는 표현으로, 전쟁의 책임이 대한민국과 미국에게 있다는 [수정주의(revisionism, 修正主義) 사관]을 프로그램에 삽입시킨 교묘한 수법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세금처럼 내는 시청료를 강제징수 해서 운영되는 KBS가 대한민국이란 존재 자체를 악랄하게 부정하는 셈이다.
    방송사 이름에서 대한민국을 뜻하는 Korea를 빼고 <남녘방송>이라고 개명하고, 시청료 징수도 그만둔다고 해도 이런 프로그램을 내보낼 수는 없을 것이다.



  • ◆ 용도 폐기된 '수정주의' 사관 가득 "미군은 나쁜 놈?"


    [대한민국의 군사적 자극이 6.25전쟁을 촉발시킨 원인 중 하나]라는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의 주장은 전교조와 국내 역사학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6.25 전쟁은 북한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 전쟁이자 내전'이라는 강정구 동국대교수의 주장도 같은 맥락에서 풀이된다.

    [수정주의]는 미국 위스콘신-매디슨대 역사학과의 윌리엄 애플먼 윌리엄스(William Appleman Williams) 교수가 1958년 주창한 이론이다.

    냉전의 원인이 미국의 팽창주의에 있다고 주장한 수정주의 학파는, 6.25전쟁이 미국과 이승만 정권의 [자극] 때문에 일어났다는 왜곡된 주장을 펼치면서, 국내 좌파 진영의 집중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중에서도 6.25전쟁에 대해 노골적으로 남침 유도설을 주장한 브루스 커밍스는 대표적인 수정주의 계열 학자로 꼽힌다.

    그러나 수정주의는 1980년대 말 공산권의 붕괴와 함께, 이들의 주장이 왜곡됐음을 보여주는 실증적 자료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엉터리로 판명됐다.

    1950년 8월 27일 소련의 스탈린이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인 클레멘트 고트발트에게 보낸 극비 전문을 보면 "6.25전쟁에 미국과 중국을 끌어들여 유럽에서 사회주의를 강화할 시간을 벌자"는 대목이 나온다.

    이를 두고 김동길 베이징대 역사학부 교수는 "미국이 마셜정책으로 서유럽 국가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면서 동유럽 국가들이 동요하자 스탈린이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인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스탈린김일성에게 전문을 보내 [남침]을 승인하는 한편, 이같은 사실을 중국에는 비밀로 할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이같은 증거들이 불거지면서 수정주의는 학설로서 용도폐기됐지만, 유독 국내에서 만큼은 수정주의와 맞닿아 있는 [민중사관]이 역사 교과서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등, 여전한 세를 과시하고 있다.

    이와 관련, 정경희 박사(전 탐라대 교수)는 "국내 중·고교 역사 교과서 집필에 민중사학자들이 참여하면서 북한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가 많이 들어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지난 7일 방송된 KBS 다큐도 [민중사관]수정주의 학파의 궤변에 영향을 받은 역사교과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한민국 경찰과 미군을 부정적으로 언급하고, 반대로 공산군에 의한 피해는 거의 다루지 않는 등 사실상 반미(反美) 정서를 내포한 내레이션이 57분 내내 이어졌다.

    그리고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 미국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서서히 알게 되었다.

    하얀 가루를 몸 구석구석에 뿌려줬다.
    DDT였다.
    DDT가 농약으로도 쓰이지 않을 만큼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피난갔다 돌아온 이들이 한강다리가 파괴돼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이들을 찾아내 심문하기 시작했다.
    공산군에게 협조했다는 것이 그들의 죄명이었다.
    누군가 나를 가리키며 빨갱이라고 외치면 그대로 검거됐다.

       - KBS의 교묘한 선전선동 다큐 <뿌리 깊은 미래> 1편 - 생의 자화상 중에서


    KBS 다큐를 시청한 허동현 경희대 교양학부 교수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 프로그램은 6.25전쟁이 소련과 중공의 후원을 받은 북한의 기습 남침이라는 것을 누락했다" "'총격전은 38선 부근에선 으레 있던 일이었다'는 표현은 북한의 전쟁 책임을 희석하고, 6.25전쟁을 쌍방간 책임이 있는 내전으로 보려는 수정주의 사관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주장에 대해 연출자인 김형석 피디는 "전쟁이 북한의 책임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기 때문에 넣지 않았다"고 변명했다.

    하지만 김형석 피디는 [누구나 아는 사실]이란 무책임한 방어책 아래 <백년전쟁> 스타일의 [악마의 편집]을 교묘하게 숨겨넣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북한군의 침공으로 전쟁이 발발했다]는 상식적인 표현 대신, [전쟁이 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는 애매한 표현으로, 도대체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지 모호하게 만들어 버리는[술수]를 부렸다.



  • ◆ 박헌영 주도한 '대구 10.1폭동'이 미군 때문?

    KBS 다큐에는 대구 10.1폭동에 대한 얘기도 나온다.
    대구 10.1폭동은 남로당(남조선노동당)의 수장 박헌영(남한에 남겨 놓은 그의 사생아 원경 스님은 박원순 서울시장의 가장 강력한 멘토)이 1945년 10월 말부터 1946년 4월초 수차례에 있었던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덮으려고 일으킨 폭동으로, 수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야기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에선 [대구 10.1폭동]이라는 언급은 전혀 없이, "미군정의 미곡수매로 굶주린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고 묘사해, 폭동의 책임을 슬쩍 미군에게 전가하는 [고도의 기만선전술]을 선보였다.

    광복 후 쌀과 생필품의 자유거래가 허용되자 시장에는 활기가 넘쳤다. 상인들은 이대로 열심히만 하면 먹고살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쌀의 자유판매가 독이었다.
    사람들이 쌀을 매점매석해 쌀값이 폭등한 것이다.
    일년도 안 되는 사이 10배 이상 올랐다.
    미군정은 물가안정을 명목으로 일정량의 쌀을 강제로 거두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이대로는 못살겠다는 아우성이 들려왔다.
    사람들의 곡물섭취량은 갈수록 낮아졌고 굶주림은 일제 강점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쌀을 살 엄두를 내지 못해 배를 곯던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3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참여한 이 시위는 미군정과 경찰에 의해 진압됐다.

    경제안정화를 위한 미국의 선택은 원조 물자였다.
    원조물자는 밀가루와 같은 곡물에서 의복 비료 가축까지 그 종류가 실로 다양했다.
    우리가 죽지 않고 살려면 원조물자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 KBS의 교묘한 선전선동 다큐 <뿌리 깊은 미래> 1편 - 생의 자화상 중에서


    KBS 다큐는 "쌀의 자유판매가 독이었다. 매점매석으로 쌀값이 10배나 폭등했다"는 말로, 쌀값 폭등이 자유시장경제의 부작용인 것처럼 표현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이 박헌영남조선노동당(남로당)이 일으킨 대표적인 [유혈 폭동]이라는 사실은 슬쩍 생략하는 수법을 사용했다.
    한 마디로 미군정이 쌀을 강제로 거둬들여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봉기에 나섰다는 교묘한 선전선동을 한 셈이다.

    과연 그럴까?

    결론적으로 9월 총파업10월 대구폭동은 1946년 7월 남로당(남조선노동당)이 미군정에 타협적이었던 자세를 철회하고 채택한 유혈폭력투쟁 노선, [신전술]의 결과물이었다.

    이지영 <조갑제닷컴> 기자가 쓴 <해방 전후 북한 최고 실력자였던 스티코프의 일기>라는 제하의 기사를 보면, 당시 소련군정이 9월 26일, 28일 (박헌영에게)두 차례에 걸쳐 파업 투쟁 방향을 지시하고 투쟁기금 200만엔을 지급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당시 소련군정의 최고 책임자인 연해주 군관구 정치담당 부사령관 겸 군사평의회위원이었던 테렌치비치 스티코프(1907∼1964년)가 작성한 일기에 적혀 있는 대목이다.
    스티코프는 북한정권수립(1948년) 과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정권수립 이후에도 특명전권대사를 맡는 등 북한의 최고 실력자였다.
    아니 사실상 북한의 소련총독이었다.
    김일성은 그의 꼭두각시였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박헌영[조선공산당이 사회단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에 대해 소련당국에 문의했고, 북한총독격인 스티코프 [테러와 압제에 반대하는 대중적인 시위와 항의집회를 조직할 것]을 9월 11일과 9월 16일에 지시한 것으로 나와있다.

    이같은 기록은 9월부터 시작된 대구의 대대적인 총파업은 [스탈린(소련)-스티코프(북한총독)-박헌영(남조선노동당)]의 지휘 계통에 의해 발생된 정치폭동임을 역사적 사실로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011년에 나온 일부 국사 교과서들은 10월 대구폭동을 혁명적인 [민중봉기][농민 저항운동]으로 물타기해서 기술하고 있다.

    한편 일부 상인과 지주의 매점매석으로 식량 위기가 오자 미군정은 강제로 쌀을 사들이는 수매제를 시행하였다.
    농민들은 강제 수매를 공출로 받아들였고, 이는 9월 총파업과 10월 봉기와 같은 저항 운동의 중요한 쟁점이 되기도 하였다.

       - 천재교육 발간 <한국사 교과서> 314페이지


    삼화출판사가 2011년 펴낸 교과서에도 "노동자들도 열악한 노동 조건과 빈곤에 허덕이는 가운데 미 군정의 정책에 불만이 커져갔다. 이는 미곡 수집제 폐지, 토지 개혁 실시, 식민지 교육 철폐, 미 군정 퇴진 등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로 확대되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상기한 교과서 내용들은 지난 7일 방영된 KBS의 교묘한 선전선동 다큐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폭동의 배경과 원인을 미군정의 [미곡 수집제 실시]로 돌리고 있다.

    미군 정보보고서에 따르면, 대구 10.1 폭동으로 경찰 38명, 공무원 163명, 민간인 73명이 사망했고, 부상 1천명, 행방불명 30명, 파괴된 건물 776동 등 큰 피해가 발생했다.
    이 폭동으로 공산당(남조선노동당)도 연말까지 검거된 당원이 7천명이 넘고 1,500명이 구속됐다.

    이 폭동을 시발로 대한민국 전체에 미군정을 반대하는 시위가 확산됐고, 빨치산의 시작인 [야산대]가 조직됐다.



  • ◆ 전시작전권 환수 주장에 정당성 부여

    KBS 다큐에 등장한 "전쟁이 나자 UN군이 들어왔고, 한국은 군 작전권을 그들에게 넘겼다"는 대목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아무런 설명 없이 작전권을 넘겼다고 표현함으로써, 당시 유엔군에게 군 작전권을 넘긴 것이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받아들여지도록 만들었다.
    이는 노무현 대통령이 들고 나온 전시작전권 환수 주장에 정당성이 부여되도록 유도하는 논리와 일치하고 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6.25전쟁 중 이뤄진 [작전지휘권 이양]이 미군을 상대로 이뤄졌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당시 작전지휘권은 미군이 아니라 6.25전쟁에 참전한 모든 외국군을 통합 지휘하는 UN군사령관에게 이양된 것이다.

    6.25전쟁 발발 이후 UN 안보리 결의에 따라 미국을 필두로 영국과 호주의 해공군 지원이 시작되면서 참전 외국군 간에 작전권 조율 문제가 제기 됐다.

    김영호 국방대학교 국제관계학부 교수에 따르면, 당시 UN은 <한국지원협조위원회>를 만들어 외국군에 대한 지휘 통제를 하려고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한시가 급한 사정상 원활한 지휘를 위해 미국이 (UN의 위임을 받아) 통합군사령부를 구성하고 작전을 지휘하는 것으로 안이 수정됐고, 미국은 UN군 사령관 임명권까지 확보하게 됐다.

    당시 북한군의 기세에 국가패망의 위기를 느낀 이승만 대통령은 보다 강력한 미군의 군사적 개입을 원했고, 때마침 UN군사령부의 모든 작전지휘권을 행사하게 된 미8군사령부가 대구에 설치되자 정일권 총참모장에게 [UN군사령부의 지휘를 받으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이후 맥아더 UN군 사령관이 무쵸 주한미국대사를 통해 이승만 대통령의 뜻을 받아들여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행사토록 하겠다]는 의사를 담은 서한을 전달하면서 양국간 작전지휘권 이양에 대한 합의가 정식으로 이뤄졌다.

    6.25전쟁은 미군 뿐만이 아니라  UN 안보리 승인 하에 여러 나라가 참전한 [세계대전]이다.
    통합군사령부가 설치된 대한민국도 전쟁 당사국이자 UN군의 일원으로 함께 싸워야 했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UN 회원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통령이 서한을 통해 작전지휘권을 이양함으로써 절차적 요건을 갖추어 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영호 교수는 작전지휘권 이양은 훗날 한미 군사관계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 있다.
    첫째는 한미동맹의 성립과 유지에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둘째는 동일 작전통제권 하에서 임무를 수행해 옴으로써 한국군이 미군의 선진 군사제도와 운영 방식을 도입하고 체득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됐다는 점이다.

    KBS 다큐가 전작권 이양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을 설명하지도 않고 슬쩍 "그냥 넘겼"고만 언급한 것은 정말 교묘한 수법이다.
    이 역시 미군을 일종의 [점령군]으로 여기도록 만드는 왜곡된 역사관에서 비롯된 [악마의 편집]으로 풀이된다.
    이 다큐를 보면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 대한민국을 수호한 미국이 되레 전작권을 앗아가고 주권을 유린한 압제자(壓制者)로 비쳐진다.

    "일본을 항복시킨 미군이 이 땅에 들어왔다. 미국이 들어오면서 많은 것들이 바뀌어갔다"
    는 내레이션도 마찬가지.
    이는 연출자(김형석)가 미군의 개입을 지극히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 부두 폭파 영상, 남아있는 흥남피란민 몰살 암시?

    UN군은 기름과 탄약 포탄을 버리고, 이후 그것들을 폭파했다.
    이때 흥남엔 미군이 북에 원자폭탄을 투하할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돌았다.
    살고 싶으면 미군과 함께 떠나야 했다.
    미군과 함께 배를 타야 했다.
    당시 흥남에 모인 민간인 수만(숫자만), 수십만 명이었다. 

    미군은 떠나면서 부두를 폭파시키기로 결정했다.
    부두 곳곳에 폭탄이 설치됐다.
    철수 준비를 모두 끝낸 미군이 먼저 배에 오르고, 이어 민간인들도 배에 탔다.
    흥남에 남은 민간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후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부두 폭파 영상)

       - KBS의 교묘한 선전선동 다큐 <뿌리 깊은 미래> 1편 - 생의 자화상 중에서


    1920년부터 1949년까지 한반도의 함흥·흥남 지역을 관장하던 당시의 <성 베네딕도회> 덕원수도원의 수도자들은 공산 치하에서 선교 활동의 제약을 받았고, 1949년 모든 수도자와 신부들이 체포되거나 추방 혹은 학살됐다.
    박해를 받은 건 개신교 신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 중 다수가 흥남항을 통해 부산이나 거제도로 거처를 옮겼다.

    실제로 "흥남 부두에서 <메러디스 빅토리> 호로 탈출한 상당수의 북한 피란민들이 그리스도교 신자였다"는 게 흥남철수작전을 국내에 널리 알린 안재철 <월드피스자유연합> 대표의 주장이다.

    안재철 대표의 주장 외에도 빌 길버트(Bill Gilbert) <워싱턴 포스트> 기자(<기적의 배> 저자)와의 인터뷰에 응한 많은 증인들은 "당시 흥남으로 모여든 피란민 중 상당수가 그리스도교 신자였고, 이들은 공산 치하에서 사는 삶이 어떠한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를 두고 흥남 전투 참전용사들은 "북한사람들이 발로 투표하고 있었다"고 묘사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흥남철수 직전, 영화 국제시장에도 등장하는 미군 통역관 현봉학 박사가 함흥에 있던 북한 주민들을 흥남으로 가는 기차에 태우기 위해 한 장로교회를 방문했을 때다.
    현 박사가 도착했을 당시 50명의 신자들이 지하실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현 박사가 신자들에게 미군들이 그들을 안전한 곳으로 탈출시킬 것이라고 말하자, 이들 중 한 사람이 "모세가 우리를 구하러 오셨다"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나머지 신자들은 그 외침을 받아 가락에 맞춰 반복했다.

    당시 함흥과 흥남 등지에 거주하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사실상 순교할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군이 피란민들을 태워 흥남항에서 탈출한다는 기적같은 소식이 전해지자, 각지에 흩어져있던 수많은 인파가 얼어붙은 산과 들을 넘어 흥남 부두항에 집결하게 된 것이다.

    KBS 다큐에 나온 것처럼 당시 흥남 주민들은 미군의 원자폭탄 폭격설과 뜬소문이 두려워 자리를 박차고 나선 것이 아니다.
    수많은 증언들처럼 [안전하고 자유로운] 삶을 찾기 위해 탈출을 감행한 것이다.
    하지만 다큐에선 이들이 북한을 떠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떠난다는 식으로 분위기를 유도했다.
    심각한 역사 왜곡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세계 전쟁 역사상 가장 큰 규모로 이뤄진 인도적인 해상 철수작전을 극찬하기는 커녕, 철수선에 타지 못하고 남겨진 피란민들은 미군의 흥남부두 폭파로 죽었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는 화면을 내보냈다.

    흥남에 남은 민간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후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 ◆ 대한민국 구성원, 둘로 나누는 악의적 편집

    이외에도 지난 7일 방송된 KBS 다큐는,
    "유권자가 서툴면 투표는 불공정하게 진행될 수도 있다"고 밝혀 5·10총선거 결과가 불공정하게 진행됐다는 인식을 갖게 하고,
    한강교 폭파에 대해서도 "피난민들이 열심히 건너고 있던 한강다리가 폭파됐다. 그것은 군관계자의 지시였다"는 내레이션으로 묘사, 마치 한강다리를 폭파하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 군 관계자들이 한강다리를 폭파해 수백명의 피란민이 즉사한 것으로 오인하도록 했다.

    또한 ▲[대한민국 국민] 대신 [남녘 사람]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고의로 대한민국의 존재를 지우는가하면,
    ▲흥남 피란민들의 탈출 동기를 엉뚱한 곳으로 돌리고,
    ▲9·28 수복 후 실시된 부역자 처벌을 법적 기준도 없이 무자비하게 이뤄진 것으로 기술하는 등,
    시종 비뚤어지고 왜곡된 연출을 시도했다.

    이처럼 객관성을 잃은 다큐멘터리가 전국민을 상대로 시청료를 강제로 부과-징수하는 공영방송 KBS에서 방영됐다.

    이런 말도 안되는 작태에 대해 내부에서도 비판의 소리가 높다.

    KBS공영노조(위원장 황우섭)는 11일 성명서를 내고, "이 프로그램은 일제로부터 해방된지 70년,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세워진지 67년을 맞아 기획된 프로그램 치고는 우리 역사에 대해 너무 부정적인 내용 일변도"라고 꼬집었다.

    이 프로그램은 광복 이후 우리의 역사는 가난과 질곡, 억압의 역사였고 그로인한 고통은 철저하게 국민들이 당했으며 그 원인은 대부분 3.8선 이남에 진주한 미군과 남한 단독선거로 정권을 잡은 당시 정치인들에게 있는 것처럼 묘사했다.

    그리고 프로그램의 시작과 끝에 ‘(고통을 당한) 그들이 우리였고, 우리가 바로 그들 이었다’는 자막을 넣어 대한민국의 구성원들을 둘로 나눠 서로를 분열시키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고 있다.


    KBS공영노조"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프로그램 곳곳에서 반미, 반 대한민국 내용으로 채워 편협된 목적의식을 가진 다큐멘터리로 보인다"며 "우리나라 최초의 총선거를 불공정한 선거가 될 수도 있다고 하더니 1948년 대한민국이 탄생한 내용은 아예 빼버렸다"고 밝혔다.

    애국가가 나오는 장면도 현재의 애국가 아닌 올드 랭 싸인 멜로디에 가사를 붙인 애국가를 삽입했고, 교육제도를 설명하면서 등장한 학교의 명칭은 [조선대학] 간판을 부각시킨다.
    프로그램 내내 당시 대한민국을 만들고 이끈 지도자는 찾아볼 수 없다.


    KBS공영노조 "우리 모두가 피땀 흘려 가꿔온 대한민국의 존재를 부정하고 비판하는 내용의 다큐멘터리를 방송한 의도가 무엇인지, 이를 기획한 제작진과 게이트 키핑을 담당해야할 경영진에게 묻고 싶다""이 시점에 진정 우리가 조명해야할 광복과 건국 특집의 내용은 어떤 것이 담겨야 하는지 면밀하게 재검토할 것을 요청한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KBS 사정에 정통한 한 방송계 인사는 이렇게 한탄했다.

    오죽했으면 내부에서조차 이런 비판의 소리가 나오겠느냐.
    이번 다큐는 버전 2.0으로 업그레이드된 <백년전쟁> 시즌2나 진배 없다.


    이 인사는 '다큐 자문단의 실체를 밝히라'는 날카로운 지적도 가했다.

    엔딩 크레딧을 보면 작가와 연출자 등의 이름만 언급돼 있을 뿐, 다큐멘터리 제작에 자문을 해 준 전문가들 명단이 빠져있다.
    <백년전쟁>에 도움을 준 대학교수들이 집중성토를 당한 것을 교훈 삼아 이번에는 두더쥐처럼 다큐 밑에 숨은 듯하다.

    대체 누가 이런 엉터리 다큐를 만들도록 말도 안되는 자료를 제공하고 감수를 했는지, KBS 경영진은 반드시 밝혀야 할 것이다.


    한편 14일 오후 8시에 방송될 <광복 70주년 특집 '뿌리깊은 미래' 2편>에서는 50년대 대한민국의 재건 과정과 교육열을 다룰 예정이다.




  • [사진 = KBS 방송 화면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