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겐 정신분열적 경향이 빚어내는 환상-환청마저 생명을 향한 것"
  • "모심"인가 "무릎꿇기"인가?




    1. 글머리

    요즘 몸이 번잡한 일상에 매여 있어, 김지하 선배를 찾아 뵐 엄두가 나지 않는다.
    문득 그분이 내게 던져 준 화두만 맴돌 뿐이다.

    "시김은 모심에서 나온다"


    이 글은 김지하 선배가 던져준 화두에서 출발한다. 


  • ▲ 시인 김지하.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어디일까?ⓒ뉴데일리 사진DB
    ▲ 시인 김지하.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어디일까?ⓒ뉴데일리 사진DB



    나보다 무려 20년 정도 연세가 많은 분을 버르장머리없이 [선배]라 칭하는 까닭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 분이 내게  "자네랑 나랑은 항렬이 같아"라고 말씀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 분의 할아버님은 동학 2대 교주 최해월을 끝까지 지킨 동학꾼이었으며,
    나의 할아버지는 전남 고흥의 동학꾼 책임자로서 1894년 마지막 전투까지 참여한 [동학 전사]였기 때문에,
    [같은 항렬]이라 말씀했다.

    필자 주 :
    동학의 마지막 전투는 전남 장흥 전투다.
    공주 우금치 학살 이후 쫓기던 동학꾼들이 다시 결집해서 치른 이 최후의 전투는 전남 장흥에서 벌어졌다.

    다른 하나는 그 분의 (얼핏 들으면 두서없이 들리기 십상인) 이야기 속에 들어 있는 [매우 소중한 화두]를  [보다 친숙한 것]으로 제시하기 위함이다.

    [김시인이 던진 화두]보다는 [김선배가 던져 준 화두]가 훨씬 더 친숙하지 않은가?
    [선배]가 도달한 화두라면, "우리, 일상을 꾸역꾸역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도 접근할 수 있다"라는 용기를 낼 수 있는 것 아닐까?

     

    2. 원한인가 시김인가?

    김지하 선배의 가장 위대한 작품은 그의 담시도 아니며, 그가 부활시켜 낸 판소리 전통도 아니다.
    그의 인생 자체가 그의 가장 훌륭한 작품이다. 

    필자 주 :
    그의 담시는 우리말 운율을 활용한 통렬한 사회비판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의 대표작은 <오적>이 아니라, 그의 처연 맹렬한 서정시 <서울길>, <황톳길> 등이라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


  • ▲ 영화 <뷰티풀 마인드> 포스터ⓒ뉴데일리 사진DB
    ▲ 영화 <뷰티풀 마인드> 포스터ⓒ뉴데일리 사진DB

    영화 <뷰티풀 마인드>(A Beautiful Mind)는 평생 정신분열에 시달리면서도 "지금 이 순간은 진짜인가? 아니면 환각/환청인가?"라는 질문을 매 순간 물음으로써 정상성을 유지한 천재 수학자 존 내쉬를 그렸다.
    김지하 선배에 비하면 존 내쉬는 약과다.

    김지하 선배는 정신분열-우울-고문후유증-주변 동지들의 횡령(감옥에 갇힌 김지하 선배에게 세계 각지에서 답지한 천문학적 지원금을 주변 동지들이 가로챘다)-배신-음모에 시달리면서 정상성을 유지/강화시켜 왔다. 

    편집자 주 :
    당시 박정희 정권에게 김지하는 남아공의 만델라와 같은 존재였다.
    운동권 내부에선 그가 감옥에서 옥사하길 바라는 분위기도 있었다.
    이른바 [김지하 열사]를 만들어 반 박정희 투쟁의 불쏘시개로 쓰겠다는 계략이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1980년대 중반 학생들의 분신자살 투쟁이 잇달을 때,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고 일갈하는 글을 쓰고 나선 것도 이런 전후사정이 있기에 가능했다.

    나는 이같은 가혹한 조건을 이겨내고 정신의 건강을 회복한 사람에 대해 김지하 선배 외에는 들어 본 적 없다.
    이는 위대한 인간 승리이다.
    이같은 위대한 정신력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의 평생의 숙적은 [원한] 즉 [세상을 부숴버리겠다]는 파괴욕이다.
    그의 일생은 [원한]에 대한 투쟁이었다.
    그는 [원한]과 칼끝을 겨누며 이렇게 말하며 살아 왔다.

    "네가 뭔데, 나를 지배하려 해?
    내가 나의 인생을 왜 너,
    ['세상을 부숴버리겠다'는 피바다 원한]에게 바쳐야지?
    꺼져!
    생명은 너 따위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비교 자체가 우스꽝스러울만큼,
    훨씬 더 아름답고 고귀한 거야!"


    세상에 대한 원망-억울함-좌절감을 삭이는 것…
    김지하
    선배는 바로 이에 관한 최상의 예술가이다.
    세상에 대한 원망-억울함-좌절감을 삭여 반전시켜 [삶을 오롯이 보듬어 안는 태도]에 도달하는 것…
    김지하 선배는 바로 이에 관한 최상의 연금술가이다.

    그는 이 태도를 [시김]이라 부른다.
    [삭힘]과 통하는 뜻이다.

    이 태도는 그의 인생 곳곳에 증명되어 있다.
    예를 들어 그가 감옥 속에서 보았던 가장 중요한 두 개의 환상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5년 동안 절대 고독 속에 살았다.
    독방에 집어 넣고,
    행여 옆방과 벽을 두들겨 [소통]할까, 좌우로 수십 개의 방을 비우고,
    행여 위 아랫방과 벽을 쳐서 [통화]할 까, 상하로 수 십개의 방을 비웠다.
    그런 독방에서 5년 살았다.

    그때 그는 두 개의 환상을 본다.

    하나는 천지사방에서 꽃비가 내리면서 [생명..생명...생명...]이라는 소리가 들리는 환상이었다.

    절대 독방, 절대 고독에 갇혀 청춘이 썩어가는 사람의 눈에,
    피바다 대신에, 꽃비...
    "세상을 부셔버려. 너의 힘이면 아예 가루로 만들 수 있어!"라는 유혹 대신에,
    베토벤의 합창교향곡과 같은 [생명 예찬]이 들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그에게는, 정신분열적 경향이 빚어내는 환상/환청마저 생명을 향한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상서로운 상아빛 흰색으로 빛나는 하얀 길이 지평선까지 꼬불꼬불 이어지는 환상이었다.

    김지하
    선배는,
    "그때 본 하얀 길이...
    [시김]이었어...
    원한과 억울함을 삭여서 삶을 오롯이 보듬어 안는 태도....
    내 눈에 보이는 아득한 하얀 길이 그런 의미란 걸,
    그 때 그 순간 알 수 있었지..."

    라고 말한다.

    절대 독방에서 썩어가는 청년의 눈에, 탈옥을 위한 길이 보이는 대신에,  "원한과 억울함을 뛰어넘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이다"라는 깨달음이 [하얀 길]의 환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시김]김지하 선배가 가르치는, 인생을 위한 전략이요, 생명을 위한 예술이다.
    "인생은 원한과 억울함에 의해 지배당하기에는 너무나 소중하고 아름답다"라는 깨달음과 태도가 [시김]이다. 

     

    3. 피바다인가 [생명의 강]인가?

    나는 김지하 선배의 [시김]에서 문득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의 [생명의 강]을 연상했다.

  • ▲ 영국의 보수주의 철학자이자 정치사상가 에드먼드 버크ⓒ뉴데일리 사진DB
    ▲ 영국의 보수주의 철학자이자 정치사상가 에드먼드 버크ⓒ뉴데일리 사진DB

    버크는, 2백년 전에, 요즘 우리가 [보수주의]라 부르는 정치철학을 만든 사람이다.
    그는 프랑스 혁명의 자코뱅주의 (대량 처형을 통해 [합리적 질서]를 한 방에 만들겠다는 관점)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때 그의 비판을 후세 사람들이 [보수주의 정치철학]으로 이름 붙였지만, 그 자신은 자신의 사상에 대해 어떠한 이름도 붙인 바 없다.

    프랑스가 나은 위대한 역사학자 퓌레(Furet)는 이런 취지로 말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쟈코뱅주의에서 두 아이가 나왔다.
    하나는 공산 전체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나치즘/파시즘 전체주의이다.

    얼핏 보면 극좌극우,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이는 이 두 개의 흐름은 실은 거울 이미지의 쌍둥이다. 둘 다,
    "집단(계급 혹은 민족) 투쟁을 통해 피바다를 만들면, 이승에서 한 방에 천국을 건설할 수 있다"

    고 세뇌한다.
    현대문명의 악마성, 전체주의자코뱅주의에 그 뿌리가 있는 것이다."


  • ▲ 프랑스 혁명 당시 일상화된 단두대 처형 모습. 사람 목을 커다란 작두로 댕강 잘라버리는 피바다가 [자유-평등-평화]란 이름 아래 자행됐다.ⓒ뉴데일리 사진DB
    ▲ 프랑스 혁명 당시 일상화된 단두대 처형 모습. 사람 목을 커다란 작두로 댕강 잘라버리는 피바다가 [자유-평등-평화]란 이름 아래 자행됐다.ⓒ뉴데일리 사진DB

    에드먼드 버크자코뱅의 멘탈을 [피바다 정치투기꾼 근성]으로 규정한다.
    버크는, [피바다를 통해 세상에 대한 원한을 푸는 한편 권력과 부를 움켜 쥐겠다는 것이 프랑스 혁명 주도 집단의 멘탈]이라고 통렬하게 비판한다. 

    에드먼드 버크는 이런 취지로 말한다.

    "지금 뭐하는 짓이야?
    자의식을 가진 개인들은 나무나 흙이나 벽돌이 아니야!
    사람을 재료로 써서 피바다 곤죽을 만들어,
    이 곤죽으로 [천국과 같은 사회질서]를 엔지니어링한다고?
    이는 미친 짓이야!
    자의식을 가진 개인들이 나고, 살고, 죽고 또 나고, 살고, 죽고 하는 과정이 이어진,
    거대한 [생명의 강]이 안 보이는 거야? 
    인간은 [세대유전 속의 존재]야!" 


    [피바다 정치투기꾼 근성]은 세상에 대한 원한을 새파랗게 벼려서 만들어진다.
    [무슨 댓가를 치르고라도 세상을 부숴버리겠다]는 원한,
    독 오른 원한이 [피바다 정치투기꾼 근성]을 낳고, [피바다 정치투기꾼 근성]전체주의를 낳는다.

    에드먼드 버크는 전체주의의 원형(archetype, 즉 프랑스 혁명의 자코뱅)에서,  아직 현대문명의 전체주의로 완성되지 못 한 [싹] 단계의 악마에서, 그 본질적 유전자--세상에 대한 가없는 파괴욕망--를 정확하게 식별했던 것이다.

    그래서 에드먼드 버크 사상이 위대하다.
    또한 그래서 김지하 선배 역시 버크 못지 않게 위대하다.

    버크가 평생  [세상을 부숴버리겠다는 가없는 원한] 멘탈을 상대로 싸웠다면,
    김지하 선배는 평생 자신의 내부에 꿈틀거리는 이 파괴적 욕망을 [숙적]으로 삼아 싸웠다.
    버크가 벌인 싸움의 무대가 서유럽의 정치문화였다면,
    김지하 선배가 벌인 싸움의 무대는 그 자신의 영혼 공간이었다.

    정치사상가의 무대는 정치문화/사회심리가 되어야 하고,
    시인의 무대는 영혼 공간이 되어야 하는 법 아닌가?  


     

    4. [시김]이라는 위대한 태도는 어디서 나오는가?

    삶에 어찌 원한-억울함-질투-시기가 없을까?

    그런데 어떻게 이 원한-억울함-질투-시기가 삭히고 삭혀져 [삶, 생명을 오롯이 보듬어 안는 태도, 즉 시김]으로 뒤바뀔 수 있는 것일까?

    이는 동물의 사체에 구더기가 슬어 온갖 악취를 풍기며 썩은 다음에 금 덩어리와 다이아몬드로 변하는 것보다 더 경이로운 과정이다.   



    그래서 김지하 선배에게 문득 물었다.

    "시김은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 ▲ 김지하의 원한은 [시김과 모심] 속에 녹아 들었다.ⓒ뉴데일리 사진DB
    ▲ 김지하의 원한은 [시김과 모심] 속에 녹아 들었다.ⓒ뉴데일리 사진DB

    김지하 선배는 평소 그분답지 않게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뗐다.

    "시김의 심리적 기초는 모심이야...
    이거, [김지하의 말]이라고 밝혀줘.."


    영혼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무엇이 먼저 오고, 무엇이 따라 오는 것인지, 그 순서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시김에 앞서 모심이 존재한다"김지하 선배의 이야기는 그냥 나온 소리가 아니다. 
    평생 [원한-억울함]을 상대로 위대한 전쟁(시김)을 실천해 온 개인 실존의 가장 내밀한 고백이다.
    시김에 관한 최상의 연금술사가 자신의 가장 소중한 연금술 노하우를 공개한 것이다.

    김지하 선배에게 [모심]이란 생명 존중을 뜻한다.
    생명을 존중하기에 세상을 부술 수 없으며,
    생명을 존중하기에 세상이 [에둘러 가는 것]을 인정하게 되며,
    생명을 존중하기에 남의 성취 역시 나의 성취만큼 기꺼운 것이 된다. 

    필자 주 :
    [억울함]이란, 에둘러 감에 대한 불평이다.
    나의 인생은 짧은데, 세상은 구비구비 에둘러간다.
    나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억울한 일이 생기게 마련이다.
    [질투](jealousy)란, 나의 성취를 남이 빼앗아 가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이다. 
    [시기](envy, covet)란, 남의 성취에 대해 침을 흘리는 것이다.


    시김의 뿌리는,
    첫째, 생명이 개인-개체 단위로 존재한다는 깨달음,
    둘째, 나고 살고 죽는 [자의식을 가진 개인]들이 이루어내는 세대유전이 거대한 [생명의 강]을 이룬다는 깨달음,
    셋째, 이같은 깨달음과 함께하는 생명 존중이다.

    이 깨달음, 이 [소중히 여김]김지하 선배는 [모심](serving)이라 부른다.

    나고 살고 죽는 개인들이 세대유전을 통해 만들어내는 [생명의 강]을,
    마음 속에서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것"으로 [모시는 태도]가 바로 [모심]이다.
    이는 버크 사상과 곧장 통한다.

    유신 시대 서대문 형무소 절대독방에 갇혀 있던 김지하는,
    세상을 홀랑 태우고 남을 원한과 억울함을 [시김]하여,
    버크(Burke)
    보다 더 버크스러운 깨달음에 도달했다. 

    시김은 모심에서 나온다...
    시김은 모심에서 나온다...

     

  • ▲ 버크보다 더 버크스런 깨달음에 도달한 김지하. 그에게서 우리는 영혼의 힘의 위대함을 읽는다.ⓒ뉴데일리 사진DB
    ▲ 버크보다 더 버크스런 깨달음에 도달한 김지하. 그에게서 우리는 영혼의 힘의 위대함을 읽는다.ⓒ뉴데일리 사진DB



    5.  [모심]인가 [무릎꿇기]인가?

    종교의 핵심은 [돌아서서 기댐](귀의)이다.
    일상이 빚어내는 욕망-원한-억울함-시기-질투로부터 [돌아서서] 신앙에 [기대는 것]이 종교의 본질이다.
    그래서 위대한 종교의 뿌리는, 실존 가장 깊은 곳의 경험에 놓여 있다.
    실존의 가장 깊은 차원에서는, 일상의 욕망-원한-억울함-시기-질투가 힘을 잃기 때문이다.

    [기댐]을 위해서는 [무릎꿇기](경배, Abendung)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사람 중에는 오금(무릎 뒤 오목한 곳)이 뻣세서 무릎이 잘 안 굽혀지는 혈통이 있다.
    영혼이 뻣세고 반항적인 혈통이다.
    이런 혈통은 특별한 인연이 있지 않는 한 종교에 귀의하는 것이 어렵다.
    종교에는 도그마(dogma, [왜?]를 물어서는 안 되는 근본 명제)라는 제단이 있으며,
    무릎꿇기는 바로 이 제단 위에서, 이 제단을 향해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의 대표적 도그마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예수는 [신의 아들]이다.
    "예수는 예민하고 우울하고 선량한, 영성 넘치는 유태 청년이다"라고 하면 엄청난 모독이다.

    2) 신-성령-예수는 각각 다른 존재이면서도 같은 존재이다(3위1체).
    "신-성령-예수는 각각 다른 존재이다"라고 하면 이 역시 엄청난 이단이다.

    3) 성모 마리아는 성행위 없이, 성령에 의해 예수를 잉태했다.


    게다가 신앙은 [조직](교단-종단-교회-사찰)에서 [동료]와 함께 수련해야 한다는 점 또한, 영혼이 뻣세고 반항적인 혈통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특성이다. 
    예를 들어 선종을 확립한 6조 혜능의 경우, "저 무식한 놈이 사부의 법통을 받았다"라고 분개한 사형제에 의해 맞아죽는 것을 피하기 위해 야반도주를 했다.
    불교가 종교인 까닭은, (도그마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철학적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부처-교리-승단(삼보)에 대한 지극한 믿음 및 경배(무릎꿇기)가 있기 때문이다.

    종교에 있어 무릎꿇기는, 
    지고의 존재, 지상의 가르침에 대한  [절대적 굴복]이며,
    사실상 [성직자 및 동료 신앙인으로 구성된 커뮤니티]에 대한 [절대적 복종]이다.  

    그런데 [모심]은 다르다.
    [모심]은 [충성]이기 때문이다.
    참된 [충성]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진다.

    첫째, 충성은 선택이고 약속이다.
    [귀의]가 아니다.

    둘째, 충성의 주체는, 충성을 통해 온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충성과 상관없이) 이미 그 자신으로서 [거의] 온전한 존재이다.

    셋째, 충성에는 (천국이나 해탈과 같은 종류의) 보상이 필요하지 않다.
    내가 아끼고 사랑해서 나의 선택에 의해 나의 존재 전체를 바친 만큼 별도의 보상이 필요하지 않다.

    넷째, 충성의 대상은, 내게 무엇인가를 베풀어 줄 수 있는 절대적 힘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존재이다.

    나는 [무릎꿇기]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럽다.
    그러나 내 영혼의 혈통은 뻣세고 반항적이어서, 경배가 아닌 모심(충성)만 알 뿐이다.
    언젠가 종교 기관이 [무릎꿇기]의 경로 외에도 [충성]의 경로를 가르친다면, 그때 나의 거친 영혼은 종교에 귀의하게 될 것이다.
    그 전까지, 나는 오직 [생명의 강] 그 자체에 충성을 바칠 뿐이다.
    그 것만을 모실 뿐이다.

    내 눈에 보이는 [생명의 강]이, 
    김지하
    선배가 보았던 꽃비-하얀 길과 같은 것이라 믿는다면,
    지나치게 당돌한 짓일까? 



  • ▲ 김지하는 우리에게 어떻개 [생명]을 모실 것이냐고 묻는다.ⓒ뉴데일리 사진DB
    ▲ 김지하는 우리에게 어떻개 [생명]을 모실 것이냐고 묻는다.ⓒ뉴데일리 사진DB


     


    6. 어떻게 [생명]을 모실 것인가?


    생명이라 불리는 것의 뒷모습은 진실이다.
    진실이라 불리는 것의 앞모습은 생명이다.

    생명존중의 핵심은 공감(sympathy, empathy)이고,
    진실추구의 핵심은 냉철-엄정(coolness, hardness)이기에,
    생명과 진실이 [같은 것의 두 얼굴]이라는 점을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그러나 진실은 생명에 대해 무심한 듯 보이지만, 오직 진실만이 [생명 번영의 길]을 가리킨다.
    또한 오직 생명체 중에 가장 경이로운 생명체인 인간만이 진실을 알아보고-알아내고-쫓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진실존중을 모른 채 생명존중, 생명존중이라 주어섬기는 것을 두고 나는 [생명타령]이라 부른다.

    "무엇이 생명이 번영할 수 있는 길인가?'를 알지 못 한 채,
    심지어 "무엇이 생명의 본질적 특성인가?'라는 것을 알지 못 한 채,
    그저 "살려 주세요!" 혹은 "살려 냅시다!"라고 울부짖는 것은 경멸스런 버러지의 행태일 뿐이다.

    무작정 "행복한 삶을 만들어 주세용~"이라 떠드는 자들이 버러지처럼 여겨지는 까닭은,
    첫째, 삶이 끝난 지점에 죽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가운데에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바람직하게는, 한 사람의 죽음은, 그의 삶의 완성점이 되는 편이 좋다.
    그래서 군인이 꿈꾸는 죽음은, 전장터에서 이루어진다.
    군인의 길, 전사의 길이란 [죽이는 것과 죽는 것], 그 둘로 이루어져 있다.

    무작정 "행복한 삶을 만들어 주세용~"이라 떠드는 자들이 버러지처럼 여겨지는 까닭은,
    둘째, 삶이란 역경을 이겨내 가는 과정이며, 마침내는 자신의 개체를 희생시켜 [자신보다 낳은 존재]를 만들려고 발버둥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삶이, 생명이, 이같은 [숙연하고 애처로운 고귀함]을 가지지 않은 것이라면,
    내가 골 비었다고, 생명을 섬길까?

    무작정 "행복한 삶을 만들어 주세용~ 제 인생을 책임지는 사회를 만들어 주세용~"이라 떠드는 자들이 버러지처럼 여겨지는 까닭은,
    셋째, [나]라 불리는 실존이 증발했기 때문이다.
    인생에 관한 의미-행복-책임은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에 있다.
    바로 그 점이 삶을 고귀하게 만든다.
    삶이란,
    감히 국가나 사회 따위가 책임져 줄 수 없는,
    또한 감히 국가나 사회 따위가 부당하게 억압해서는 안 되는 고귀한 프로세스인 것이다.

    인간 생명이란, 삶이란, 따듯하고 밝은 것이 아니다.
    따듯하고 밝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따듯하고 밝은 것으로 치자면, 구들장 아랫목이요 조명등 밑이다.

    인간 생명이 구들장과 조명등으로 요약될 수 없듯이, 생명-삶에는 우주의 모든 모습이 다 들어 있다.
    인간의 생명에는 그 이상(영혼 공간)도 들어 있다.

    이같은 냉철하고 엄정한 관찰로...
    진실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생명/삶이라는 '이해할 수 없도록 다양하고 기이한 것'에 끊임없이 접근해 간다...
    가까이 다가갈 수록 점점 더 이 기이한,
    [결코 완벽하게는 이해할 길 없는] 존재를 깊이 사랑하고 아끼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이 존재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이 존재(생명의 강)를 모신다.....
    어느 순간, 이 존재(생명의 강)의 뒷모습이 진실이라는 점을 발견한다....

    김지하 선배가 말하는 [시김과 모심]은 이제...
    [생명과 진실]
    , 두 얼굴의 존재에 대한 [운명적 사랑](amor fati)으로 재해석될 때가 되었다.



  • ▲ 김지하는 우리에게 어떻개 [생명]을 모실 것이냐고 묻는다.ⓒ뉴데일리 사진DB

    박성현 저술가/뉴데일리 주필.
    서울대 정치학과를 중퇴하고,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대 최초의 전국 지하 학생운동조직이자
    PD계열의 시발이 된
    '전국민주학생연맹(학림)'의 핵심 멤버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지도
    민주화보상법에 따른 보상도 일체 청구하지 않았다. 

    한국일보 기자, (주)나우콤 대표이사로 일했다.
    본지에 논설과 칼럼을 쓰며,
    두두리 www.duduri.net 를 운영중이다.

    저서 : <개인이라 불리는 기적> <망치로 정치하기>
    역서 : 니체의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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