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제의 책> [죄 많은 일본, 통일까지 방해할건가] 출간한 許文道 인터뷰

    “이승만은 천재적 超人! 그가 나를 교회로 부른다”

    “피값 100억불 내라” 日王 무릎꿇린 ‘國風’의 사나이


    ‘國風의 사나이’ ‘언론통폐합의 개혁가’ ‘知日派 민족주의자’로 유명한 허문도.
    80년대 국토통일원 장관을 지낸 그가 35년 만에 교회에 다시 나간다.
     “이승만 연구하다가 교회에 나가게 됐다”는 소문의 진상을 들어보려 그를 만났다.
    때마침 그는 작년 10월 [죄 많은 일본, 통일까지 방해할건가-청춘과 극일 민족주의]라는
    긴 제목을 책도 출간하였다. 이승만-기독교-극일-민족주의-통일 등 키워드 중심으로
    ‘허문도의 사상세계’를 잠깐 엿보는 대화를 축약 소개한다. <편집자>
  • ▲ 허문도 지음, 조선뉴스프레스 발행. 02-724-6796-7
    ▲ 허문도 지음, 조선뉴스프레스 발행. 02-724-6796-7
    토인비-막스 베버가 갈파한 ‘역사 추동의 주역’

“이승만은 인간을 넘어선 인간, 토인비가 말하는 ‘초인적 천재’가 바로 이승만입니다.”
‘이승만의 무엇 때문에 교회 나가게 되었느냐?’는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 대신 ‘이승만 해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다. 70대중반인데도 특유의 형형한 눈빛 뿜는다.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역사를 추동하는 활동의 원천이 사회 그 자체인 경우는
절대로 없고, 역사창조의 행위는 어떤 경우든 초인간적 천재인 개인이 행한다’는 사실(史實)을 실증해 보입니다. 조선 해체기에 나타난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역사를 창조하는 과정이야말로 토인비 이론의 실체적 초인임을 고비고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허문도가 교회 나간 것이 처음은 아니다. 대학 때도 다녔고 도쿄에서 10여년 살 때도 다녔다.
이승만에 대한 관심은 5공정부에 참여한 후, 미국의 압력과 일본의 꼼수에 시달리면서 이승만의 민족주체적 전략전술에 접하고서 자료도 많이 모았다. 이후 30년 가까이 그의 이승만 천착은 관련 학자들보다 넓고 깊고 전문성이 치밀하다
  • ▲ 뉴데일리 '이승만 포럼'에서 발표하는 허문도씨.
    ▲ 뉴데일리 '이승만 포럼'에서 발표하는 허문도씨.
    --이승만의 무엇이 ‘초인적’이며 어떻게 ‘초인적’이 되었습니까?
  • “대한민국 건국과정이 혁명이라 함은 미국과 소련등 강대국 이해에 맞서 이를 좌절시키고
    자신의 독립국가를 세운 불굴의 민족 아이덴티티, 레닌의 공산혁명 직후에 공산주의가 전체주의요 식민주의임을 선포하고 미국의 친소정책을 훈계하면서 투쟁한 독립운동, 휴전반대와 북진통일론을 통해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동맹 조인에 이르기까지 이승만의 전략전술은 단순한 ‘벼랑끝 카드’가 아니라 한민족의 절대공간 한반도 전체의 자유독립 완성이라는 예언자(預言者)적 소명의식에서 터져 나온 초인간적 역사행위였던 것입니다.”
    여기 예언자(預言者)는 미래를 점치는 예언자(豫言者)가 아니라,
    하늘의 뜻을 예탁 받은 자, 하늘이 선택하여 하늘의 사명을 실천케하는 하늘의 대리자이다.
    막스 베버는 ‘예언자의 존재가 역사 전진의 다이나미즘’이라고 밝힌바 있다.(막스 베버: ‘고대 유태교’, 1914)

    --그래서 교회에 나갑니까? 한성감옥에서 회심(回心:성령 받아 거듭나기)했던 이승만의
    영적(靈的) 파워 같은 초인적인 힘를 동경하는 기대감이랄까.... 
    “그것은 함부로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입니다. 아무나 성령 받습니까. 벼락처럼 임하는 영적파워는 하늘의 대리자로 선택받은 자의 몫입니다. 이 회심을 이승만은 여러차례 경험한 것 같습니다.
    부인 프란체스카의 증언처럼 그는 늘 기도하면서 영교(靈交)한다고 했습니다.
    하늘과의 영적 교류, 무엇이 하늘의 뜻인가를 날마다 확인하고 신념화하고 행하였던 것이지요.. 국내외로부터 집중공격하는  옹고집쟁이, 독선자, 독재자등 중상모략 정치선전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혼(魂)의 응전(應戰)’--초인(超人) 됨은 <진실에 대한 의지> 하나에 자신의 존재 전체를 걸어버리는 인간만이 가능합니다. 이승만이 그러했고 박정희도 그랬습니다.”

    이승만의 회심은 요한 웨슬레의 회심, 말틴 루터의 회심, 사도 바울의 그것에 비견된다고 했다.
    또한 ‘운동권 청년’시절부터 시작하여 대통령 재임 12년간까지 이승만의 행적은 동시대의 아데나워, 드골, 요시다 시게루(吉田茂)보다 그 성취의 크기와 본질에서 단연 독보적인 차원 높은 것이라 했다.

    “한국내 제일의 반일분자” 허문도가 만든 ‘한류의 출발’

    5공 초기 1981년 가을, 여의도에서 대대적으로 열렸던 ‘국풍(國風)’의 뜨거운 바람을 우리는 기억한다. 5일간 1천만명이 벌였던 민족축제 한마당, 그 창조자는 청와대 1급비서관 허문도였다.
    모든 공안기관들이 운동권 데모의 위협을 들어 반대하였지만 “저수지에 썩은 물처럼 고인 국민에너지를 폭발 시키자. 젊은 신바람을 일으키자.”고 밀어붙였다.
    그것은 5공기간 유치해 온 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으로 이어진다.
    허문도식 민족주의적 열정이 해낸 ‘한류의 출발’이었다.
  • ▲ 1981년 여의도에서 1천만명이 벌인 국민축제 '국풍'의 심벌마크.
    ▲ 1981년 여의도에서 1천만명이 벌인 국민축제 '국풍'의 심벌마크.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일본방문을 앞두고 벌인 한일협상에서 얻어낸 성과는
    허문도 전략의 성공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숨은 이야기라도 좀 밝혀 주시지요.
  • “5공출범 직후 전 대통령과 단독대좌에서 새로운 국정을 구상할 때 ‘대일 청구권 100억 달라’를 요구하자는 구상에 원칙적 동의를 얻었지요. 국가 분위기 쇄신을 위한 ‘국풍’ 축제와 더불어 정권교체기의 경제난국을 푸는 외화 확충이 시급한 상황에서 내 놓은 아이디어였습니다.”
    이 협상과정에서 일본 측은 ‘허문도 카드’에 붙잡혀 경악과 울화통을 쏟아냈다.

    “혈채(血債) 100억 달러를 내라” 민비의 피, 의병들의 피, 독립 운동가들의 피, 한민족을 무차별 학살하고 약탈 착취한 피 값은 “돈으로 계산할 수 없다”며 일본을 윽박질렀다. 
    “안보 무임승차(無賃昇車) 채무도 갚아라,  일본 안보는 한국이 지켜주지 않느냐, 아시아와 일본 평화의 보루 한국에게 방위비를 지불하라”는 질타에 일본은 버틸 수가 없었다. 
    바로 그 유명한 ‘안보 무임승차론’을 개발한 허문도, 여기에 맞장구 친 미국정부의 도움도 있었지만, 나카소네 수상은 별수 없이 두 손을 들어야 했다.
    일본 측은 “대동강 물장수냐?”며 허탈해 했다지만 장단기 차관 60억 달러로 결말이 났다.
    당시 일본 외무성은 ‘한국내 제일의 反日분자는 허문도’라는 낙인을 찍어버렸다.

    일왕, 최초의 사과문 발표...“6~7세기 일본 도와준 한국에 감사”

    1984년 9월6일 하네다 공항에 내린 전두환 대통령은 영빈관 현관 밖까지 나온 일본 천황 히로히토의 영접을 받았다. 사상 최초의 천황 영접이다.
    그날 저녁 일본 황실사상 최대 규모의 만찬에서 히로히토는 사과문을 읽었다.
    “양국간 불행한 과거에 깊은 유감을 표하며, 다시는 되풀이 되어선 안된다.”는 말은
    대한민국 건국후 사상 최초로 일본 천황이 머리 숙인 공식사과였다.
  • ▲ 1984년 9월6일 일본왕 히로히토(오른쪽)는 전두환 대통령에게 '불행한 과거'를 사과하고 건배하였다.
    ▲ 1984년 9월6일 일본왕 히로히토(오른쪽)는 전두환 대통령에게 '불행한 과거'를 사과하고 건배하였다.
  • 이 뿐인가, “지난 6~7세기 일본의 국가형성기에 귀국의 많은 지도를 받았다.”며
    히로히토는 한국대통령의 손을 잡고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한일고대사의 진실을 사상 처음 공개적으로 공식선언한 천황의 말은 일본사회 전체에 폭탄 같은 것이었다. 조선침략 지배의 역사적 근거로 써먹었던 ‘임나 일본부설’등이 천황 손에 의해 스스로 허물어지는 순간, 일본 정부와 군부, 학계는 패닉상태의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명치이후 날조한 식민사관의 기둥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 뒤에 지금까지 ‘임나 일본부설’은 쓰레기 취급 받는 신세로 변하고 말았다.
    이와 함께 특기할 것은 문공부 허문도 주도로 그때 일본에서 크게 열었던 <한일교류 5천년전>이다. 천황의 말과 이 전시회가 어울려 일본이 왜곡 조작해 왔던 한일 역사의 진상을 한눈에 밝혀주었고, 화려한 도록 ‘한일교류5천년’은 양국에서 인기를 끌면서 일본인들의 역사 바로 알기 교재로 큰 몫을 담당하였다.

    “언론 통폐합‘의 정신은 살아있다. 오늘의 언론계를 보라”

    ---‘허문도’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언론 통폐합>입니다.
    요즘 경제계를 비롯한 우리사회는 “허문도 같은 사람 또 안나오냐”며 언론의 횡포에 몸서리를
    치고 있는 형편입니다. 최근 통계로는 자칭타칭 언론 행세하는 매체가 무려 7,800여개로 나와 있습니다.
    “언론계 개혁문제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등 모두가 반대했습니다. 데모가 일어나 정권이 못 버틸 것이라고 겁먹었죠. 언론의 문제는 정권차원이 아니라 국가의 문제 아닙니까? 박정희 근대화의
    완결을 떠맡은 5공정권의 사명은 언론 개혁 없이는 성공할 수 없음을 설득하면서 앞장서야 했습니다. 식민지시대 저항민족주의에 찌든 언론의 부정(否定)적 에토스(Ethos)를 긍정의 에너지로
    바꾸지 않으면 정권이 아니라 박정희의 산업혁명이 무너지고 나라가 결단 날 판이었습니다.
    국가정신을 상실한 오늘의 언론계가 증명하지 않습니까.”

    언론 통폐합 스토리는 훗날 정리하겠다면서 [징비록(懲毖錄)]의 서애(西涯) 유성룡(柳成龍)이
    남긴 말 ‘이 기록은 나 죽은 뒤에 공개하라’ 했다는 대목을 인용함으로 얼버무렸다.
    현대판 징비록을 준비하느냐는 물음에도 딴청을 피운다.
    “역사에서 어떤 욕을 먹더라도 반드시 해야만 할 사명들이 그 시대마다 주어져 있는 법입니다.
    5공 정권에서 나의 보람을 찾는다면 ‘국풍(國風)과 60억불‘이라고 할까요.
     국가경영을 맡은 지도자는 국민의 창조적 기풍을 끊임없이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 ▲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건국 선포식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건국대통령.(자료사진).
    ▲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건국 선포식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건국대통령.(자료사진).

    “젊은이여, 이 책을 읽어라! 이승만 민족주의 살리자!”


  • --이번에 출간한 [죄 많은 일본-통일까지 방해할 건가]라는 책도
    <청춘과 극일 민족주의>란 부제처럼 오늘의 대한민국 젊은이들에게 아주 유익한
    민족주의 교재가 되겠습니다.
    “정치학자도 아니지만 단지 ‘일본의 극복 없이는 통일한국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국가에 봉직한 체험을 바탕으로 일본에 대해 우리가 꼭 알아둬야 할 것들을 정리한 책입니다.
     내셔널리즘은 국민정신이 불같이 타오른 상태의 것입니다.
    역사의 수모 체험에 무심한 국민은 똑 같은 수모 속에서 소멸될 가능성이 큽니다.
    수모 역사에서 역전(逆轉)의 에너지를 뽑아낼 줄 아는 민족만이 역사를 역전시키는 창조 파워로 흥륭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책 속에는 우리민족의 수모의 역사들과 극복의 이정표들이 가득 담겨있다.
    특히 명성황후 시해, 관동대진재의 조선인 집단 학살의 실증적 분석이 무섭도록 치열하다.

    경남 고성 출신인 허문도의 민족의식은 농촌계몽을 꿈꾸던 소년시절부터 싹이 트고,
    서울 농대 입학후 기독청년회(YMCA) 활동을 하던 때 ‘교회가 한국적인 것을 말살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구체화된다.
    그후 조선일보 기자, 동경대학 수학, 일본 특파원, 주일대사관 근무를 거쳐 5공에 입각하자마자
    내놓은 “우리것 살리기” 캠페인들은 많았다.
    문공부차관 시절엔 문배주, 삼해주, 두견주등 민속주 현대화를 비롯하여 민속경연대회를 열었고, 한국불교 문화 부흥도 적극 추진, 불교방송 사장까지 지냈다.

    이 시절 그는 미국의 파워 폴리틱스 한가운데서 ‘이승만의 민족DNA’를 재발견하고 이승만의 불가사의한 ‘불굴의 영적 리더십’에 끌려들었던 것이다.
  • ▲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건국 선포식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건국대통령.(자료사진).
    ---이 시대에도 ‘이승만 민족주의’가 요구된다면 그것을 어떻게 살려내야 하겠습니까.
  • “이승만의 건국투쟁은 반공투쟁과 하나였습니다. 공산주의는 인류의 적이라는 이승만의 선각은 미국조차 수십년 지나서야 따르게 되잖습니까. <이승만 민족주의>를 살려내는 길입니다.
    민주화를 내세운 미국의 제국주의적 강압과 사사건건 대결하여 이겼던 이승만의 초인적 리더십, 이승만의 자유신앙을 있던 그대로 드러내고 연구하면 기본인식이 달라집니다. 이승만 민족주의 연구서들이 많이 나와서 국민교육과 국가정신이 거듭나야 합니다.”

    ---교회에 나가면서 그런 희망을 보았습니까?
    “교회 쪽에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미국의 선동에 이끌려 이승만을 독재자로 몰아붙였던 과거를 잊었는지, 지금도 한쪽에서 또 북한 전체주의에 봉사하는 반기독교적 행태는 일제시대의 그것과 상통한다고 볼수 있지요. 역사 추동의 주역은 역시 소수 엘리트 몫입니다. 엘리트를 자처하는 지식인들과 언론인들이 조선강탈의 일본 엘리트들, 예컨대 무쓰 무네미쓰, 고무라 주타로, 이토 히로부미 정도의 침략엘리트 수준을 뛰어넘어 설 때에만 우리에게도 희망이 생깁니다.
    국가엘리트층이 백년이 가도 민족적 치욕에 전율할 줄 모르고서야 아베정권의 ‘한반도 분단지배’ 야심을 어찌 당해낼 수 있겠습니까.”
    그의 책은 초판이 금방 매진되고 판을 거듭하여 찍고 있다.                 <인보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