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국과 정부수립’도 報勳 대상이다
     
김영호 / 성신여대 교수·국제정치학

올해는 광복 70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일제로부터 해방되자마자 나라가 분단되고 뒤이어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으면서 분단이 고착화한 지도 70년이 됐다. 광복·분단 70년을 맞은 현시점에서 남북한을 비교해 보면 ‘성공한 대한민국’과 ‘실패한 북한’ 사이에 주민들이 누리는 자유와 인권과 삶의 질에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분단이라는 열악한 조건에도 대한민국은 광복 70년 만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가진 선진국으로 우뚝 섰다.
이에 비해 북한은 개혁과 개방을 거부하고 봉건적 세습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주민의 생활 수준과 인권의 모든 측면에서 실패한 사회로 전락했다. 북한 정권은 그 실패의 원인을 시대착오적 세습 체제 때문이 아니라, 분단과 미국의 ‘대북(對北) 적대시 정책’ 때문이라는 외적 요인으로 돌리고 있다. 그렇지만 분단이라는 똑같은 상황이면서도 오늘의 발전을 이룩한 대한민국을 보면 북한 정권의 주장이 전혀 설득력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광복 70년을 맞는 현시점에서 남북한 사이의 이러한 극명한 차이점을 보면서 국내의 치열한 정치노선 투쟁과 냉전이라는 국제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탄생한 ‘대한민국’을 다시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의 건국과 정부 수립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의 결과였다. 대한민국이 ‘국가보훈 기본법’을 제정해 나라의 독립을 위해 희생하고 공헌한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선양하는 것은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국가보훈 기본법’은 ‘대한민국의 건국과 정부 수립’에 기여한 사람들은 보훈(報勳)·선양 대상에 포함하지 않고 있다. 광복 70년을 맞아 국민에게 올바른 나라 사랑 정신을 함양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원리에 기초한 대한민국 주도의 통일을 이뤄 21세기 국운 융성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의 건국과 정부 수립’에 기여한 사람들에 대한 보훈·선양을 위한 법적 근거를 하루바삐 마련해야 한다. 이와 함께 이들을 위한 기념행사와 사업이 추진되고 기념 시설과 조형물을 세워야 할 것이다. 남대문과 광화문광장에 이르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중심지에 대한민국의 건국과 정부 수립을 기념하는 조형물 하나 없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국가보훈 기본법’의 보훈·선양 대상 범주는 네 가지다. 여기에는 ①일제로부터 조국의 자주독립 ②국가의 수호 또는 안전보장 ③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의 발전 ④국민의 생명 또는 재산의 보호 등 공무 수행을 한 사람들이 포함돼 있다. 그러니까 독립운동·호국·민주화·공무 수행 과정에서 희생됐거나 공헌한 사람들이 보훈·선양의 대상이다. 이들이 그 대상에 포함돼야 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독립과 호국 사이에 ‘대한민국의 건국과 정부 수립’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 그 대상에서 빠져 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독립운동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들의 목표는 대한민국과 같은 자유롭고 부강한, 번듯한 나라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군인들과 경찰들이 북한의 남침과 도발로부터 지키기 위해 희생한 그 나라는 바로 대한민국이다. 또한 자유민주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대한민국이 탄생했기 때문에 자유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희생이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건국과 정부 수립에 기여한 사람들이 당연히 ‘국가보훈 기본법’의 보훈·선양 대상에 포함돼야 한다.

최근 헌법재판소에 의한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과 대법원의 이석기 전 통진당 소속 의원에 대한 내란선동 유죄 판결에서 보는 것처럼 체제 도전이 심각하다. 이런 세력들에 대한 법적 단죄만으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의의 체제는 유지될 수 없다. 그 체제에 대한 확신을 더욱 확고히 할 수 있는 긍정적인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 이 점에서 국가보훈은 너무나 중요한 의미를 갖고, 국가보훈처가 내세우는 ‘명예로운 보훈’에 국민 모두가 공감한다. 박근혜정부는 ‘비정상의 정상화’를 국정 목표로 내세우고 있다. ‘국가보훈 기본법’의 이런 비정상 상태를 바로잡는 일이야말로 이런 국정 목표 실현의 출발점이 돼야 할 것이다.
[문화일보, 2015.1.27 시평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