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을 바로 알면 대한민국이 보인다

    소련의 흉계(3),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 
  • ▲ 최응표 뉴데일리 고문.
    ▲ 최응표 뉴데일리 고문.

최 응 표 /뉴데일리 고문 (한국사 바로 알리기 미주본부 대표)

소련의 한반도 장악음모 

 모스크바 3상회의 결의에 따라 ‘통일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1946년과 ’47년, 2차에 걸쳐 열렸던 미소공동위원회는 양동안 교수의 지적처럼, 38선의 철폐와 남북한 통일 정부를 바라는 간절한 민족적 기대 속에 열렸지만, 그런 희망이 실현될 가능성은 당초부터 없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2차 대전 후 소련이 점령한 지역에는 예외 없이 몇 년 사이에 공산정권이 세워진 과정을 면밀히 살피면서 미소공동위원회(약칭, 미소공위)를 살펴봐야 한다. 

미소공위에 임하는 미국과 소련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기본 입장부터가 달랐다.
미국은 일의 순서 상 경제통합과 정치적 자유보장이 선행돼야 참다운 민주적 임시정부가 구성될 수 있다는 관점에서 38선 철폐를 주장한 반면, 소련은 민주적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나면 그런 조건들의 조성이 뒤따르게 된다며 임시정부 구성문제를 우선적으로 토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양동안 교수, 다한민국 건국사) 

결국 미소공위에 대한 미국의 기본 정책은 한반도에 들어설 임시정부는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정부여야 한다는 것이고, 소련의 근본 속셈은 영구히 소련에 이익을 가져다 줄 공산위성국을 만드는 것이었다. 

1945년 9월 20일자 스탈린의 지령과 1945년 12월 25일자 소련 정치총사령관 슈킨 보고서가 증명하듯, 소련의 애당초 목적은 ‘통일된 한반도에 反소적인 정부 수립을 막고, 東歐(동구)에서처럼 한반도 통일 후에도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소련 위성국(공산국가)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1945년 12월 25일의 슈킨 보고서에는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의 지령(소련 점령지역인 북한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라)의 이행과정과 그 후속조치가 상세하게 들어 있다. 

스탈린의 지령과 슈킨 보고서는 신탁통치 결정 전 이미 북한진주 초기부터 38선 이북에 소련의 정치, 경제, 군사적 이익을 보장할 친소정권 수립을 추진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며, 특히 슈킨 보고서는 은밀하게 진행된 스탈린의 북한 장악 음모를 증명해주는 결정적 자료다. 

더욱이 스탈린의 지령과 슈킨 보고서가 12월 27일 모스크바에서 한반도 신탁통치를 결의하기 전에 만들어졌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사전에 나름대로 정치공작을 다 꾸며놓고 미소공위를 진행시킨 전형적인 공산당 식 속임수였다. 

미소공위는 한반도에 통일된 임시정부 수림을 위한 회담이다. 그런데 소련은 앞으로 한반도에 세워질 정부는 소련의 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 정부, 다시 말해 미래에 소련에게 불이익을 가져다 줄 어떤 정권도 한반도에 들어서서는 안 된다는 것, 그래서 앞에서는 미소공위를 진행시키면서 뒤로는 북한의 소련 위성국 만들기에 총력을 쏟고 있었다. 

슈킨 보고서 내용에 대해 명지대 이지수 교수는 ‘한반도 이북 지역에서 소련의 정치, 경제, 군사적 이익을 영구히 지킬 인물들로 구성된 정권을 구축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고 분석했다. 

소련군이 철수한 후에도 소련의 국익을 담보할 수 있는 ‘민족 민주주의’ 간부를 양성해야 한다는 슈킨 보고서 내용으로 보아 한반도에 임시통일정부를 수립해야한다는 소련의 주장은 공산당 식 전략이었고, 소련의 기본 속셈은 한반도 소비에트化였다.

“소련은 한국이 진정으로 민주적이고 독립된 국가이며, 소련에 우호적이어서 장차 소련에 대한 공격의 기지가 되지 않도록 하는 데 더 큰 관심이 있다”는 소련 측 대표 스티코프의 개막식 연설에서도 소련의 한반도 장악야욕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소련의 숨은 흉계는 김극후 교수의 ‘평양의 소련군정’에도 잘 들어나 있다. 

조지아대 윌리엄 스툭 교수는 이 대목이 모스크바의 관점에서 볼 때 문제의 핵심이라고 지적하며 소련에 의지하고 추종하는 독립정부를 한국에 수립하는 것 외에 그 어떤 해결책도 안보에 대한 소련의 우려를 해소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한민국 건국의 재인식)

1차 미소공위 개막식에서 한 스티코프 소련대표의 연설은, 미소공위의 결의에 따라 수립될 민주적 임시정부 구성에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정당과 사회단체만이 참여할 수 있다는 것과 통일된 한반도에는 反소적인 정부가 수립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요점이다.

여기서 민주적이란 공산, 사회주의적 개념의 용어이며, 임시정부 수립과정에 참여할 대상의 자격을 모스크바 결의를 찬성내지 지지 세력에 국한한다는 소련의 주장은 한반도의 소비에트 化를 의미한다. 

이런 흉계를 품은 소련을 상대로 한 미소공위는 당연히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북한을 상대로 한 회담의 열쇠도 미소공위의 실패에서 찾으면 그 정답이 나올 것, 그래서 국가미래를 위한 산교육은 역사에서 배운다는 것이 아닐까. 

앞에서 살펴본 대로 한반도에 통일된 정부를 수립한다는 미소공위의 목표에는 많은 장애물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주영 교수의 지적처럼 소련은 1945년 9월 20일의 스탈린 지령에 따라 북한에 사실상의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공산혁명을 추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북한에 이미 정부가 들어서고 공산화로 사회체제가 달라지게 되었기 때문에 남북통일 정부의 수립은 사실상 불가능했던 것이다.

미국은 모스크바 결정을 반대하는 정치세력도 자유민주주의 정신에 따라 한반도 통일임시정부 수립과정에 참여시켜야 한다는 순수한 입장이었던 반면, 소련은 소련의 지지 세력만으로 통일임시 정부를 세우려는 흑심, 다시 말해 한반도 장악음모 흉계를 속에 품고 임했으니 회담결렬은 예고된 결과였다.

2차 미소공위와 점령군 소련

1947년 5월 21일 2차 미소공위가 어렵게 열렸지만, 국제적 정치 환경은 1차 때 보다 더 나쁜 상황이었다. 소련의 협조 하에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려던 미국의 對소 정책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소련의 팽창정책이 도를 넘으며 그리스와 터기까지 넘보게 되자 미국은 소련의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 발표에 이어 6월에 소련 봉쇄정책을 보다 구체화한 마샬 플랜을 발표하면서 미국과 소련사이에 냉전이 시작되는 상태에서 2차 미소공위가 열리게 된 것이다.

트루먼 독트린과 마샬 플랜 이후 남한에 대한 미국의 강력한 경제원조 정책이 세워지고, 남한에서 미국은 결코 스탈린의 팽창정책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트루먼 대통령의 각오와 소련과의 협상이 실패 하더러도 유엔을 중심으로 하는 봉쇄정책의 연장선에서 한국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큰 그림이 그려지는 상황에서 열렸기 때문에 1차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대한민국 건국의 재인식, 김용직 교수편) 

한편 생각하면, 소련이 2차 미소공위까지 진행시킨 저의는 북한에 보다 확고한 소련 위성국의 기반조성을 위한 시간벌기와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서 약탈을 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지수 교수는 ‘제2차 세계대전과 소련의 한반도 정책’이란 논문에서 소련은 애초부터 북한을 자국 이익의 교두보로 삼아 그곳에 위성국을 수립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또 그런 목적이 실제로 성공했다며, 소련군 점령 직후부터 실시된 일련의 정책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모든 면에서 국가에 의한 전 사회 통제체제 확립, 반소 기득권세력의 경제기반 와해, 북한 사회의 사회주의 문화로의 편입 추구 등, 도저히 남한과 단일정부 구성을 염두에 두었다고 볼 수 없는 분리, 이질화 작업을 수행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 대표적인 예가 토지개혁(대내정책)과 미소공동위원회(대외정책)에서 들어났음을 밝히고 있다. 

1946년 3월 20일 1차 공위가 열리기 전인 1946년 3월 8일 소련은 이미 북조선임시위원회를 시켜 토지개혁을 단행했고, 소련은 북한에 진주하기 무섭게 공공연하게 약탈행각을 시작했다. 

전쟁으로 피폐된 조국의 복구와 식량부족을 위해 점령군으로서 소련군은 점령지 북한에서 주요 산업시설과 현지 자원을 전쟁배상금 명목으로 약탈해갔고, 심지어 38선의 경계를 위해 세웠던 목재 보호막까지 거두어 갔다. 

많은 양의 양곡과 세계적 규모인 수풍발전소의 독일제 발전기 5대, 흥남 비료공장의 일부 시설과 대유동 광산의 금석, 철산 광산의 모나즈 광석 등을 대거 약탈해 갔다.(이지수 교수 논문 참조)

이런 사실들로 미루어 보아 소련은 북한의 철저한 소비에트 화와 소련의 전후 복구를 위해 미소공위를 철저하게 이용했고, 미국은 소련의 그런 흉계에 농락당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소련은 미소공위가 진행되던 1946년 여름에 주요 산업 국유화 법령을 반포해 90% 이상을 무상으로 몰수해 정치적으로 반대세력을 몰락시켰고, 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 경제체제로의 진입을 꾀했다. 

미소공위에 대한 소련의 태도에 대해 이지수 교수는 “결과적인 해석이지만, 소련이 미소공위에 참여하면서도 북한에서 제반 개혁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던 사실을 순서를 바꾸어 설명하면 소련은 북한 내부에 공고한 친소정권을 구축하는 동안 미소공위의 대화에 응한 셈이다. 소련으로서는 미소공위에 참여한 것이 결과적이건 의도적이건 간에 일종의 ‘시간벌기’였던 셈이다.” 라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소련은 애초부터 미소공위를 이용해 북한에 영구적인 소련 위성국을 만들려는 속셈이었고, 그런 내부공작에 따라 소련은 철저하게 실속을 챙겼다. 

2차 미소공위에 임하는 소련의 입장은 1차 때와 하나도 달라 진 것이 없었다.
통일임시정부 수립과정에 참여할 정당, 사회단체의 자격을 여전히 모스크바 결의 찬성 내지 지지 세력에 국한 한다는 주장이다. 결국 2차 회담도 미소 양진영이 합의점을 찾지 못해 결렬되고 말았다. 

지금 북한의 속임수 전략은 소련의 사기술을 그대로 벤치마킹한 것이다. 그래서 대북정책은 미국의 대소정책에서 배워야 한다. 냉전의 종식은 대화나 유화정책의 결과가 아니라 미국의 대소 강경정책의 결과라는 점, 다시 말해 레이건의 ‘힘의 우위’정책의 결과란 뜻이다. 

그래서 미국의 대표적 진보신학자인 라인홀트 니버는 “도덕적 인간들 사이에서는 사랑이 유효할지 모르나 비도덕적 사회에서는 힘으로 힘을 제압할 수밖에 없다”고 했는지 모른다.

결론적으로 1,2차 미소공위와 소련의 흉계를 면밀히 살피면 대북해결책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사기꾼들의 사기술은 거의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레이건의 ‘힘의 우위’정책, 그 속에 대북 해결의 열쇠가 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