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李光耀가 朴正熙에게,
    "각하는, 언론과 여론을 무시하였기에 성공'

    最高의 찬사는 最高 인물로부터 나온 것이다.

    趙甲濟   

    李光耀(리콴유)의 평가

    朴正熙 대통령은 1979년 10월26일 생애 마지막 날 도고호텔에서 점심 식사를 하면서
     그  7일 전에 있었던 싱가포르 李光耀(리콴유) 수상과의 대화 내용을 소개했다.

    “이 수상이 그러는데, 공산당과의 싸움에서는
    내가 죽든지 적을 죽이든지 하는 두 길밖에 없다는 거야.
     어중간한 방법으로는 안 된다는 거야.”


  • 朴 대통령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만난 외국 지도자는 그와 가장 닮은 사람이었다.
    싱가포르 수상 李光耀(리콴유). 李 수상은 1979년 10월 16일에 訪韓했다.
    金聖鎭(김성진) 문공부장관이 ‘수행장관’이란 유례가 없는 직함을 가지고 리 수상의 안내를 맡아 1박 2일간 경주 일대를 돌았다.
     朴 대통령이 리콴유를 초청한 데는 ‘내가 건설한 대한민국의 모습을 한번 보여 주겠다’는 의욕이 있었다. 리 수상은 처음에는 초청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미국 허드슨 연구소 소장 허먼 칸 박사는 리 수상과 친했다. 김성진이 칸 박사를 초청하여 박 대통령을 만나게 했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意氣投合(의기투합)하여 말꽃을 피웠다. 칸 박사는 그 뒤 리콴유를 만나자 “박정희란 인물이 간단치 않은 사람이니 꼭 한번 만나 보라”고 권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리 수상에게 자신의 작품인 포항종합제철을 보여 주고 싶어했으나 자존심이 강한 리콴유는 경주의 문화유산을 보겠다고 했다. 외무부에서는 리콴유가 포항공항에서 내려 경주로 향할 때 浦鐵(포철)을 관통하는 도로를 주행하여 가도록 짰다. 리 수상의 옆자리에 타고 있던 金聖鎭 장관이 보니 리콴유는 벌써 눈치를 채고는 차창 밖으로 일절 눈길을 주지 않았다. 1박 2일간의 일정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갈 때도 포철을 지나게 되어 있었다. 김 장관이 “두 번이나 그렇게 하면 실례가 되니 경주에서 대구공항으로 가도록 노선을 변경해 달라”고 했다. 경호실에서 “안 된다”고 제동을 거는 것이었다. 김 장관은 崔侊洙(최광수) 의전수석을 통해서 대통령의 허락을 받아 냈다.

경주에서 대구로 달리는 길 양쪽은 화려한 가을 날씨 속에서 풍요로운 농촌풍경이 황금물결을 이루며 이어지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누런 벼이삭, 지붕개량을 끝낸 깔끔한 농가, 지붕위에 널린 빨간 고추. 리 수상은 비로소 차창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가끔 시계를 보았다. 이런 농촌이 어디까지 계속되는지를 재는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은 부러움과 오기가 뒤섞인 표정으로 상기됐다. 대구공항에 도착하여 비행기에 탑승한 그는 이륙한 뒤에 김 장관을 바라보고 말문을 땠다.

“貴國(귀국)의 농촌은 아주 실속 있게 잘 사는군요.”

그러고 나서 리콴유는 “이러한 발전의 비결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김 장관은 박정희의 지도력과 외국에 나가 있던 우수한 두뇌들을 귀국시켜 국내의 과학기술발전에 기여하도록 한 정책을 들었다. 崔亨燮(최형섭) 과기처장관이 미국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 과학자들을 찾아가서 애국심에 호소하고 좋은 연구시설과 대우를 약속하여 귀국시킨 사례들을 설명했다. 리콴유 수상은 진지하게 경청하더니 비행기가 서울에 닿을 때까지 사색에 잠기는 것이었다.

10월 19일 청와대에서 열린 환영만찬에서 리콴유는 박 대통령에게 이런 찬사를 보냈다.

“어떤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관심과 정력을 언론과 여론조사로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받는 데 소모합니다. 한편 다른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력을 오직 일하는 데만 집중시키고 평가는 역사의 심판에 맡깁니다. 대통령 각하, 만약 각하께서 눈앞의 현실에만 집착하시는 분이셨더라면 오늘 우리가 보는 이런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 김성진은 1991년에는 駐싱가포르 대사를 지내면서 그와 재회하게 된다. 1994년 1월 19일 김성진(당시 대우그룹 부회장)은 <月刊朝鮮>을 위하여 리李 수상과 인터뷰할 때 이런 질문을 던졌다.

    -- 만약 아시아에서 귀하를 제외하고 위대한 지도자를 세 사람만 든다면 누구를 꼽겠습니까?

    “먼저 鄧小平(덩샤오핑)을 꼽겠습니다. 그 노인은 정말 어려운 시대에 험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는 중국이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방향을 전환시켰습니다. 만일 등소평이 모택동 이후에 정권을 잡지 못했더라면 중국은 소련처럼 붕괴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 두 번째로는 누구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일본의 요시다 수상을 꼽을 수가 있습니다. 그는 한국전쟁과 냉전이 시작되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일본이 미국 편에 확실히 서도록 하였습니다.”

    -- 이제 마지막 한 사람이 남았습니다.

    “글쎄요. 세 번째 사람을 거론하게 되면 한국의 국내정치에 영향을 끼치게 될 것 같아서…….”

    리콴유(당시는 수상직에서 은퇴)는 ‘아시아의 3대 지도자에 들어갈만한 사람’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때 金泳三 대통령은 우리 현대사와 前 정권, 특히 군사정권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정치공세를 강화하고 있었다. 아시아의 3대 지도자에 현직 대통령이 싫어하는 박정희를 포함시켜서 괜히 한국·싱가포르 관계에 악영향을 주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리콴유가 그 김영삼 대통령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는 짐작만 할 뿐이었다.

    박정희와 리콴유는 서구민주주의에 대한 맹목적(혹은 사대적) 추종을 거부하고
    개발도상국의 현실과 동양문화의 토양에 적합한 자주적 정치체제를 만들려고 했던 점에서 같다. 리콴유는 개인을 기초단위로 하는 서구사회에서 자라난 민주주의는 가족을 기초단위로 하는
    동양사회에 그대로 移植(이식)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인권을 구현하는 방법에도 서구적 민주주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동양적인 길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미국이 인권을 무기로 삼아 한국, 중국, 싱가포르 같은 나라들을 압박하는 것은
    “다른 부문에서는 동양에 뒤지니까 자신들의 전매특허인 인권을 들고 나와서 괴롭히는 것일 뿐이다”고 했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의 변호사이기도 한 리콴유는 서구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논리로써 당당하게, 공격적으로 서구우월의식을 공격하고 있다는 점에서 방어적이었던 박정희와 차이가 있다. 싱가포르에서 자동차를 損壞(손괴)한 미국인 소년에게 笞刑(태형)을 가하자 미국 언론은 비판적이었으나 미국인들 중에서는 “잘했다”는 여론이 더 높았다.

    박정희가 방어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리콴유는 서구민주주의 자체의 보편성을 부정한 데 대하여 朴은 자유민주주의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 한시적 유보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1963년에 이렇게 쓴 적이 있었다.

    “엄격한 의미로서 혁명의 본질은 본시 근본적인 정치사상의 대체와 사회정치구조의 변혁을 뜻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런 점에 있어 한계가 제약되어 있고 그 혁명의 추진에 各樣(각양)의 제동작용이 수반되고 있다. 우리는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원칙으로 함에는 벗어날 수가 없다. 민주주의의 신봉을 견지하는 한 여론의 자유를 막을 수는 없다. ‘토론의 자유’ 속에 ‘혁명의 구심력’을 찾아야 하는 혁명, 그것은 매우 힘이 들고 어려운 길이다.”

    박정희는 남북분단과 주한미군의 존재라는 제약만 없다면 리콴유처럼 서구자유민주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우리식 정치이념을 만들고 싶어했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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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버드 대학의 스타 교수 출신인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닉슨 대통령과 함께 美中 화해를 성공시켜 세계의 전략 구도를 바꾼 사람이다. 그는 李光耀 싱가포르 전 수상에 대하여 이런 찬사를 보냈다.

    <나는 반세기 동안 세계의 많은 지도자들을 만날 수 있는 특혜를 누렸는데,
    이광요 전 수상처럼 많은 것을 가르쳐준 이는 없었다.>

    키신저는 이광요를 '달리 비교할 사람이 없을 정도의 지능과 판단력을 갖춘 사람'이라고 평했다. 그는 워싱턴의 파워 엘리트들이 이광요를 만나는 것을 하나의 자기 학습 기회로 삼았다고 했다. 이광요를 지도자(leader)일 뿐 아니라 사상가(thinker)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특히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이 세계의 본질과 아시아 문제에 대한 그의 분석을, '깊숙한 통찰력'이라고 극찬하였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