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값 요구’서 ‘죄수 석방’으로 요구 변화…일본인들의 '패러디'에 당황한 듯
  • ▲ 테러조직 ISIS가 공개한 두 번째 협박 동영상. 고토 겐지 씨가 들고 있는 것은 유카와 하루나 씨가 참수된 사진이다. ⓒISIS의 협박 동영상 캡쳐
    ▲ 테러조직 ISIS가 공개한 두 번째 협박 동영상. 고토 겐지 씨가 들고 있는 것은 유카와 하루나 씨가 참수된 사진이다. ⓒISIS의 협박 동영상 캡쳐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내전을 벌이고 있는 테러 조직 ISIS가 일본인 인질 2명 가운데 1명을 참수 살해했다. 살해된 사람은 ‘자칭 민간군사기업 CEO’라던 ‘유카와 하루나(湯川遙菜, 42세)’ 씨였다.

    테러조직 ISIS는 지난 23일 오후 2시, 몸값 2억 달러와 인질 간의 교환 요구시한이 지난 지 하루 뒤에 남은 인질 ‘고토 겐지(後藤健二, 47세)’를 내세운 영상을 공개했다. 이 영상은 유튜브 등에도 게재됐지만 지금은 대부분 삭제된 상태다.

    테러조직 ISIS가 유튜브와 SNS 등을 통해 퍼뜨린 협박 영상에는 고토 겐지 씨가 사진 한 장을 들고 나온다. 유카와 하루나 씨를 참수한 뒤 머리를 그의 등 위에 올려놓은 사진이다.

    고토 겐지 씨는 영상에서 자신의 이름과 테러조직 ISIS의 요구 조건을 영어로 설명했다.

    “유카와가 IS에게 살해된 사진을 봤을 것이다. 이들은 일본 정부에 경고를 했고, 나를 잡고 있는 사람들은 말대로 행동했다.

    그들의 요구는 보다 쉬운 것으로 변했다. 이제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테러리스트에게 자금을 보낸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들은 요르단에 수감된 ‘사지다 알-리사위의 석방을 요구하고 있다. 단순하다. 그들에게 사지다를 넘겨주면 나는 자유로워진다. 실제로 가능한 일이다.”


    일본 정부는 고토 겐지가 나온 영상을 확인한 뒤 대책회의를 갖는 등 부산하게 움직였지만, 뾰족한 대응책이 없어 무기력하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유튜브 동영상이 공개된 뒤 유카와 하루나가 살해된 것이 사실로 보인다는 의견을 내놨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 또한 25일 오전 기자회견에서 “시신 확인이 필요하지만 살해되지 않았다고 볼 만한 근거가 없다”며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아베 정부 관계자들은 ISIS가 석방 및 교환을 요구한 ‘사지다 알 리사위’를 구금하고 있는 요르단 정부와 긴밀하게 협력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도 구체적인 협의 내용은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테러조직의 협박에 굴하지 않겠다”는 뜻도 거듭 밝혔다.

    그런데 이번 협박 동영상을 살펴보면, 테러조직 ISIS의 협상 전술이 바뀐 게 아닌가 하는 대목이 보인다. 인질의 몸값이나 연합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게 아니라 ‘인질과 테러범의 교환’을 요구하는 대목, 그리고 인질 2명 가운데 1명만 살해한 뒤 협박을 하는 것이다.

    고토 겐지 씨가 두 번째 협박 동영상에서 했던 말 가운데 주목을 끄는 부분이다.

    “일본 정부 대표들이 요르단에 있다. ‘사지다 알-리사위’는 요르단 감옥에 수감돼 있다. 나를 구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 강조하고 싶다. 당신들이 ‘사지다’를 요르단 정부로부터 되찾아 보내주면 나는 바로 석방된다.”


    이는 테러조직 ISIS가 일본인 인질을 붙잡은 뒤 일본 정부의 동향을 세밀히 체크하고 있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중동 테러조직과 직접 대결한 경험이 거의 없다보니, 테러조직 ISIS가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고토 겐지 씨의 말을 들어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한 때는 테러조직이었던 PLO, PLFP, 하마스, 헤즈볼라 등의 모습이다.

    이들은 현재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정당 형태’ 또는 ‘사회협동조직’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는 이스라엘과 레바논 등을 상대로 온갖 테러를 저지르면서, 감옥에 수감된 자신의 동료를 풀어주면 테러를 중단하거나 인질을 풀어주겠다는 요구를 자주 했다.

    처음에는 이 요구를 거절하던 이스라엘 정부는 그러나 테러로 인한 민간인 희생자가 점점 더 많아져 여론이 나빠지자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와 ‘평화협정’을 맺는 동시에 수천여 명의 테러범들을 풀어준 바 있다. 하지만 조직의 리더급 테러범들은 석방된 경우가 거의 없다.

    테러조직 ISIS는 이스라엘과 일본의 군사력, 정보능력에 차이가 크고, 테러 조직을 대하는 태도가 다른 점을 익히 알고 있기에, 자신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리더급 테러범을 풀어달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 ▲ 테러조직 ISIS가 일본인 인질과 맞바꾸자고 요구한 테러범 '사지다 알'리사위'의 모습. 자살폭탄테러를 기도하다 체포되기 직전의 모습이다. ⓒ해외 테러연구 사이트 캡쳐
    ▲ 테러조직 ISIS가 일본인 인질과 맞바꾸자고 요구한 테러범 '사지다 알'리사위'의 모습. 자살폭탄테러를 기도하다 체포되기 직전의 모습이다. ⓒ해외 테러연구 사이트 캡쳐

    고토 겐지 씨가 테러조직 ISIS의 명령에 따라 석방해 달라고 요구한 ‘사지다 알-리사위’는 올해 44살의 여성으로 본명은 ‘사지다 무바라크 아트로스 알-리사위’다. 고향은 이라크다. 2005년 11월 요르단 암만에서 일어난 연쇄 자살폭탄 테러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돼 수감돼 있다.

    ‘사지다 알-리사위’가 가감했던 연쇄 자살폭탄 테러는 외교관들이 자주 찾는 요르단 암만의 특급호텔 3곳에서 터진 테러로 60명의 민간인 사망자를 냈다.

    ‘사지다 알-리사위’는 이때 남편과 함께 자살폭탄 테러를 벌였으며, 남편은 현장에서 즉사했다. 리사위는 폭탄이 불발돼 체포됐다.

    ‘사지다 알-리사위’는 2003년 이라크 침공 이후 팔루자 지역에서 테러조직 ‘유일신과 성전’을 창설했던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 측근과는 인척 관계라고 한다.

    ‘유일신과 성전’이 테러조직 ISIS의 전신(前身)이며, 이라크의 경우 대가족 단위로 부락을 이루는 경우가 많은 점을 생각해 보면, ‘사지다 알-리사위’와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 간에도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때문인지 ISIS는 2014년 12월 시리아 북부에서 포로로 붙잡힌 요르단 조종사를 살해하겠다고 협박할 때도 ‘사지다 알-리사위’를 석방하면, 조종사를 풀어주겠다는 제안을 한 바 있다.

  • ▲ 테러조직 ISIS가 일본인 인질 2명을 살해하겠다는 협박 동영상을 공개한 뒤에도 일본인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일부는 이처럼 온갖 패러디물을 만들어 전 세계 SNS에 뿌리고 있다. 이런 행동은 미국과 유럽 언론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SNS에 떠도는 사진 캡쳐
    ▲ 테러조직 ISIS가 일본인 인질 2명을 살해하겠다는 협박 동영상을 공개한 뒤에도 일본인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일부는 이처럼 온갖 패러디물을 만들어 전 세계 SNS에 뿌리고 있다. 이런 행동은 미국과 유럽 언론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SNS에 떠도는 사진 캡쳐

    ISIS가 일본인 인질 2명 가운데 1명만 살해한 것은 동아시아 사람들이 테러조직과 직접 맞부딪힌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을 활용하기 위한 행동으로 보인다.

    일본인 인질들이 ISIS에 붙잡혀 살해당할 위험에 처했다는 소식을 접 뒤 아베 정권이 보인 행동은 테러조직과의 협상을 단호하게 거절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협상에 적극 나선 것도 아니었다.

    일본 국민들의 경우에는 “그래서 뭐?”라는 식의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넷우익’과 같은 일본 네티즌들은 ISIS가 공개한 동영상을 캡쳐한 사진으로 ‘패러디 사진’을 만들어 온라인에 뿌렸다. 몇몇은 이 패러디 사진을 ISIS에게 직접 보내기도 했다.

    ISIS는 이처럼 자국민을 살해하겠다는데도 마치 “스릴러 영화를 본 듯” 반응하는 일본인들을 보면서 협상전술을 바꾼 게 아닌가 풀이된다.

    첫 동영상에서는 비교적 담당한 표정을 지었던 고토 겐지 씨가 두려움으로 굳은 표정을 짓는 모습은 협박 동영상으로 패러디를 만드는 일본인들에게는 또 다른 '재미'이겠지만, 군사력 강화를 추구하던 아베 정권에게는 '악몽'이 될 가능성이 높다. 

    25일 현재 아베 총리 등 일본 정부는 ISIS의 유카와 하루나 씨 살해를 “용서 못할 폭거”라며 강하게 규탄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다.

    버락 오바마 美대통령과 데이비드 캐머런 英총리가 ISIS를 규탄하며 일본 정부에 위로를 전했지만, 테러범과 만나지도 못한 아베 입장에서는, ‘물밑접촉’이라도 해서 인질을 구출해야 한다는 일본 내 좌파진영과 언론의 압력 때문에 미국, 영국과는 다른 행동을 취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