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봉학 박사‥미군 장성 설득해 14,000명 목숨 구한 '한국판 쉰들러'
  • 미 장성 설득해 피난민 1만4,000명 구한 현봉학 박사.ⓒ보훈처
    ▲ 미 장성 설득해 피난민 1만4,000명 구한 현봉학 박사.ⓒ보훈처

    1950년 12월 14일부터 24일까지 펼쳐진 흥남철수작전은 세계전쟁사에서 가장 큰 규모로 진행된 해상 철수작전이다.

    당시 미군은 철수작전을 통해 50만톤의 군수물자를 철수시킬 예정이 었으나 한 통역관의 설득으로 이를 포기하고 10여만명의 피난민을 철수하게된다. 

    보훈처는 당시 통역관으로 미군 장성을 설득한 현봉학 박사를 12월의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

    현봉학 의학박사는 1922년 함경북도 성진 출생으로 함흥고보와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했으며 광복 후 가족과 38선을 넘어 월남했다. 그 후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몬드 의대에서 학업을 수행한 후 귀국한 현봉학 박사는 민간인 신분으로 1950년 8월초 미군의 통역관에 임명됐다.

    이후 한국 해병대의 통역을 맡게 된 그는 해병대의 입과 귀가 돼 미군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으로 그들의 지원을 이끌어냄으로써 낙동강전선에서 진동리 및 통영전투의 승리에 일조하는 등 생명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전장을 누비며 통역을 맡아 우리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또한 전선시찰을 위해 사령부를 방문한 미 제10군단장 알몬드(Edward M. Almond) 소장과의 운명적인 만남은 민사부 고문으로 일하면서 흥남철수작전에서 진정한 인류애를 보여 주었다.

    당시 전황은 전쟁발발 한 달여 만에 낙동강까지 밀려났던 국군이 유엔군과 함께 북한군의 총공세를 막아내고 인천상륙작전과 동시에 38도선을 넘어 압록상과 두만강을 향해 북진을 계속했으나 10월 하순경부터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바뀌었다.

    ◇사상유래없는 장진호 전투 참패 '美 해병'‥흥남 통한 '해상철수'결정

  • 장진호 전투는 한국에서는 흥남철수의 배경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美해병대에는 가장 고전한 전투로 유명하다. 사진은 장진호 전투 당시 얼어죽은 美해병대 장병들 시신. ⓒ6.25전쟁 종전 60주년 기념 블로그.
    ▲ 장진호 전투는 한국에서는 흥남철수의 배경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美해병대에는 가장 고전한 전투로 유명하다. 사진은 장진호 전투 당시 얼어죽은 美해병대 장병들 시신. ⓒ6.25전쟁 종전 60주년 기념 블로그.


    장진호 일대에서는 8만 명의 중공군에 의해 2만의 미 해병1사단이 포위되었고 그 북쪽에 있던 미10군단 부대도 고립됐다. 그런데 중공군 못지않은 무서운 적은 밤에는 영하 30도 가까이 내려가는 날씨였다. 수많은 병사들은 처음 겪어보는 무서운 혹한에 노출돼 쓰러지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병사들도 동상으로 손발을 잃게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황초령을 넘어 철수하면서 해병대원들은 탈출로를 막아대는 중공군을 차례대로 격파하며 흥남으로 향해 앞으로 나갔다. 흥남철수작전은 중공군이 원산을 점령함에 따라 해상으로 철수하는 작전으로 흥남항을 통한 해상철수만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해상철수는 전쟁행위 중 가장 위험한 작전으로 흥남함에는 후송할 인력과 장비 또한 엄청난 규모로 10만 여명의 인력과 50만톤의 장비 및 물자가 선적을 대기하고 있었다. 또한 흥남항에는 많은 주민들이 몰려들었다. 그 들 대부분은 공산주의에 반대해 유엔군에 협조하거나 기독교인 등이 대부분으로 흥남항에서 승선하지 못하면 많은 희생이 뒤따를 수밖에 처지였다.

    ◇사방이 적‥"이대로 철수하면 저 사람들은 다 죽습니다"


  • 피난민으로 가득한 흥남부두. 저멀리 메리디스 빅토리 호가 보인다.ⓒ뉴데일리DB
    ▲ 피난민으로 가득한 흥남부두. 저멀리 메리디스 빅토리 호가 보인다.ⓒ뉴데일리DB

    작전을 책임진 알몬드 소장의 입장에서는 10만 여명에 달하는 미 제10군단 병력의 철수도 어려운데 민간인 철수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현봉학 박사는 알몬드 소장을 찾아가 “적이 사방에서 쳐들어오고 있는데, 이들 민간인들이 어디로 갈 수 있겠느냐?”고 여러번 간청과 설득했고 그의 열성에 감동한 알몬드는 결심을 바꾸어 군수물자의 철수를 포기하고 9만 8천여 명을 미국 商船(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 등의 수송선으로 거제도로 오게 했다.

    이 작전에 참가한 메러디스 빅토리아호는 정원이 2000명임에도 불구하고 1만4000여 명을 태워 구출해,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현봉학 박사는 전쟁의 참화 속에서 생사의 기로에 놓인 수 많은 주민을 구하는데 열과 성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민족애와 휴머니즘을 보여 주었다. 이처럼 피난민들의 흥남 탈출은 숨겨진 그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그를 두고 ‘한국판 쉰들러’로 부르고 있다.

    또한 그는 故현시학 제독의 형이기도 하다. 전쟁이 끝나고 일상으로 복귀한 그는 조국에서 의술을 베풀었는가 하면 보건부장관 고문을 역임했으며, 미국 의과대학에서 병리학 및 혈액학 교수 등으로 재직하면서 한미 의학계에 공헌 및 인류 의학발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2007년 11월 25일 자신이 근무했던 미국 뉴저지주의 뮐렌버그 병원에서 영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