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 일주일도 안 돼 관객 170만 돌파…국회 "정무위 예산소위에서…"
  • ▲ 영화 '국제시장' 중 흥남철수 장면.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 국제시장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하나의 이야기다. ⓒ영화 '국제시장' 장면 캡쳐
    ▲ 영화 '국제시장' 중 흥남철수 장면.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 국제시장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하나의 이야기다. ⓒ영화 '국제시장' 장면 캡쳐

    지난 17일 개봉한 영화 ‘국제시장’이 개봉 일주일도 되지 않아 관람객 170만 명을 넘어섰다.

    지금 10대들의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 우리 사회 주류인 486세대의 부모님들이 겪은 인생을 감동적으로 그린 영화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영화의 배경인 ‘국제시장’이 어떻게 생겨나게 됐는지는 잘 모른다.

    부산 남포동에서 부평동으로 길게 이어지는 ‘국제시장’은 1945년 광복 이후 고국으로 돌아온 재일동포들이 모여 만든 자그마한 장터에서부터 시작됐다. 이후 6.25전쟁을 겪으면서 피난 온 사람들이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군용식량, 의약품 등을 팔러 모이면서 커졌다.

    1953년 1월 30일 한 주점에서 일어난 불 때문에 시장 전체가 잿더미가 돼 많은 상인들을 아프게 했지만, 이후 시설 재건, 새마을 운동 등 여러 차례의 개수공사를 거쳐 지금의 ‘국제시장’이 됐다.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처럼, 가요 ‘굳세어라 금순아’의 2절 가사에 들어 있듯 이곳에는 흥남철수와 1.4후퇴 때 남쪽으로 피난 온 실향민들도 많았다.

    이 ‘국제시장’ 상인들조차 잘 알지 못하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은인(恩人)’이 바로 미군, 그 중에서도 美해병 1사단이다. 흥남철수를 할 수 있도록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 3개 사단을 막아낸 주인공이다.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 함경남도 장진호


    美해병대는 워싱턴 대통령이 이끌었던 부대가 모태이기에 자부심이 대단하다. 공식 창설일이 1775년 11월 10일이다.

    이들 가운데서도 1950년 6.25전쟁 발발한 직후 가장 먼저 한반도로 달려온 부대 가운데 하나인 美해병 1사단은 2차 세계대전 당시 과달카날 전투, 펠렐리우 전투, 오키나와 전투 등에 참전했던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 ▲ 美해병대의 백악관 경호부대원. 美해병대는 미국 건국과 비슷한 시기에 창설됐다. 한때는 '대통령 직속 부대'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현재도 美대통령이 타는 헬기는 '마린 원'이라고 부른다. ⓒ美국방부
    ▲ 美해병대의 백악관 경호부대원. 美해병대는 미국 건국과 비슷한 시기에 창설됐다. 한때는 '대통령 직속 부대'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현재도 美대통령이 타는 헬기는 '마린 원'이라고 부른다. ⓒ美국방부

    美해병 1사단은 낙동강 방어선 전투, 인천상륙작전, 원산상륙작전 등 굵직굵직한 전투 때마다 엄청난 전과를 올리며 아군의 사기를 북돋운 부대였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기억하기 싫은 전투가 있었다. ‘장진호 전투’다.

    美해병 1사단이 ‘장진호 전투’를 하게 된 배경은 이렇다. 1950년 10월 26일 美해병 1사단은 원산에 상륙한다. 하지만 이미 국군 1사단이 원산 후방의 적을 격파하고 북진한 터라 인민군과 별다른 교전은 없었다. 이에 유엔군 지휘부는 새로운 명령을 내린다. “원산은 후속 부대인 美육군 3사단에게 맡기고 장진호로 진격하라”는 것이었다.

    美해병 1사단장 올리버 P.스미스 소장은 그러나 날씨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 진격을 조금씩 미룬다. 함경남도에 있는 장진호 주변에는 10월 말에 이미 눈이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스미스 소장은 이런 기상에서 성급하게 진격하다가는 보급로가 무너지고 부대가 고립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美해병 1사단이 미적거리자 美10군단장 알몬드 중장은 벼락같이 화를 낸다. 알몬드 중장은 “서부 전선 부대와 사이에 공백을 없애려면 해병 1사단이 장진호 북쪽으로 진격해야 한다”며 스미스 소장을 다그쳤다. 스미스 소장은 어쩔 수 없이 장진호 북쪽으로 다가선다.

  • ▲ 2차 세계대전 당시 과달카날 전투에 참전한 美해병 1사단 장병들. 역전의 용사들이었지만 장진호의 혹한에 많이 희생당했다. ⓒ뉴질랜드 주재 美대사관 홈페이지
    ▲ 2차 세계대전 당시 과달카날 전투에 참전한 美해병 1사단 장병들. 역전의 용사들이었지만 장진호의 혹한에 많이 희생당했다. ⓒ뉴질랜드 주재 美대사관 홈페이지

    알몬드 중장은 이때 중공군 30만 명이 한반도에 진입한 상태였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유엔군 사령부도 기껏해야 3만여 명 정도가 참전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10월 하순, 서부전선의 유엔군은 중공군 18만 명의 공격을 받고 황급히 퇴각한다. 유엔군은 중공군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어떤 전력을 갖고 있는지도 파악하지 못했다. 전선(戰線)의 부대들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1.4후퇴로 이어지는 대규모 철수의 시작이었다.

    한편 1950년 11월 중순, 중공군 가운데 일부가 동부전선으로 숨어들었다. 예하에 7개 사단을 거느린 중공군 제9병단(兵團)이었다. 이들의 임무는 美해병대를 격파한 뒤 함흥-흥남 축선을 확보해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중공군은 제9병단에다 병력을 더 보강해 美해병 1사단의 주력이 모인 지역에 4개 사단, 철수할 도로에 4개 사단, 예비 병력으로 2개 사단을 준비시켜 놓고 있었다. 병력 수는 12만 명이 넘었다. 반면 美해병 1사단은 약 1만 2,000여 명.

  • ▲ 중과부적의 중공군에 맞서 돌파구를 찾기 위해 일시 후퇴하는 美해병 1사단. ⓒ6.25전쟁 기념사업회 블로그
    ▲ 중과부적의 중공군에 맞서 돌파구를 찾기 위해 일시 후퇴하는 美해병 1사단. ⓒ6.25전쟁 기념사업회 블로그

    전투는 1950년 11월 27일 오전 8시부터 본격적으로 벌어졌다. 이미 산발적인 전투를 통해 중공군에게 포위돼 있다는 것을 파악한 美해병 1사단은 포위망을 뚫기 위해 선제공격을 감행했지만, 중공군의 매복에 걸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부터 美해병 1사단의 전투는 ‘생존’을 위한 싸움이었다.

    美해병 1사단은 유담리, 하갈우리, 고토리에서 중공군과 북괴 인민군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쉬지않고 전투를 벌였다. 스미스 소장은 중공군과 전투를 벌이는 가운데서도 야전 활주로를 건설했다. 유엔군의 우월한 공군 수송력을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美해병 1사단이 중공군과 10대 1의 싸움을 벌이는 동안 알몬드 중장은 美10군단 예하 부대들에게 흥남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한다. 그리고 12월 1일, 비행장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부족한 탄약과 식량, 의약품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됐다. 부상자 4,300여 명도 후방으로 보냈다.

    남은 이들은 중공군과 계속 전투를 벌였다. 美해병 1사단은 엄청난 투지를 보이며 중공군을 물리쳤다. 고토리 전투의 경우 미군 사상자는 300여 명이었던 반면 중공군은 8,5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美해병대도 이기지 못한 개마고원의 동장군

  • ▲ 장진호 전투 당시 동사한 美해병대원의 시신들. 당시 美해병 1사단은 동료들의 시신을 모두 수습하지는 못했다. ⓒ6.25전쟁 기념사업회 블로그
    ▲ 장진호 전투 당시 동사한 美해병대원의 시신들. 당시 美해병 1사단은 동료들의 시신을 모두 수습하지는 못했다. ⓒ6.25전쟁 기념사업회 블로그

    美해병 1사단은 역전의 용사답게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투지를 발휘했지만 숫적 열세와 ‘동장군’을 극복할 방법은 없었다.

    개마고원 지역으로 주변이 해발 1,000m의 고지대인 장진호는 당시 낮 기온이 영하 20도 내외, 밤에는 영하 28~45도까지 떨어졌다. 일부 지역에는 60cm 이상의 눈이 쌓여 있었고, 눈보라가 칠 때는 가시거리가 15m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미군과 중공군 모두 이런 혹한지에서 전투를 해본 적이 없었다.

    이런 혹한 때문에 美해병 1사단이 갖고 있던 식량과 연료는 대부분 얼어붙고 땔감은 사용할 수가 없었다. 결국 해병대원들 가운데 동상을 입거나 사망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하지만 스미스 소장은 이 와중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중공군 포위망이 약한 부분을 계속 돌파하려 시도한다.

    이때 현장을 취재했던 전설적인 종군기자 ‘마가렛 히긴스’가 “퇴각하는 거냐”고 묻자 스미스 소장은 부하들을 향해 외친다.

    “후퇴라니? 젠장, 우린 지금 후퇴가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진격하는 중이야!”

  • ▲ 美해병 1사단을 이끌고 장진호 전투의 기적을 만들어 낸 올리버 P. 스미스 소장. ⓒ위키피디아 공개사진
    ▲ 美해병 1사단을 이끌고 장진호 전투의 기적을 만들어 낸 올리버 P. 스미스 소장. ⓒ위키피디아 공개사진

    美해병 1사단은 약 2주 동안 이어진 ‘장진호 전투’ 끝에 흥남으로의 철수에 성공한다. 하지만 美해병 역사상 유례가 없는 상처를 입었다.

    중공군 12만 명의 공격을 2주 동안 막아내며, 美10군단, 한국군 1군단 등 유엔군 10만여 명, 피란민 10만여 명이 190여 척의 군함과 상선으로 탈출할 시간을 벌어낸 美해병 1사단은 부대원 1만 2,000여 명 가운데 7,0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 중 3,659명은 동상으로 인한 사상이었다.

    美해병 1사단을 공격했던 중공군 제9병단의 상태는 더욱 심각했다. 12만 명의 병력 가운데 4만 5,000여 명 이상이 전사하고, 1만 2,0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병력 가운데 30% 이상이 동상을 입었다. 때문에 중공군 제9병단은 1951년 3월이 넘어서야 다시 전선에 투입될 수 있었다. 

    美해병 1사단의 ‘장진호 전투’는 이후 세계 3대 혹한전투로 일컬어지며, 전 세계에 알려졌다. 美해병대 내에는 ‘장진호 전투의 생존자(Chosin Few)’라는 모임도 생겼다.

    미군이 혹한지 전투에 대비하게 된 것이 ‘장진호 전투’ 때문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실제 과거 우리 군에도 보급됐던 ‘스키 파카’가 이 전투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美해군은 타이콘테로가급 이지스 순양함에 ‘쵸신(CG-65)’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 ▲ 장진호 전투 당시 본국으로 가지 못하고 함흥에 묻힌 美해병대원들의 묘지. ⓒ위키피디아 공개사진
    ▲ 장진호 전투 당시 본국으로 가지 못하고 함흥에 묻힌 美해병대원들의 묘지. ⓒ위키피디아 공개사진

    이 장진호 전투는 2007년 4월 다시 주목을 받는다. 美역사상 최고의 저널리스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는 뉴욕 타임스의 데이비드 핼버스탬이 장진호 전투를 상세히 담은 ‘콜디스트 윈터(Coldest Winter)’를 유작(遺作)을 남기고 떠났기 때문이다.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 그리고 국제시장


    미군에게는 ‘악몽’이었던 장진호 전투는 한국인에게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흥남철수’를 있게 해 준 ‘고귀한 희생’이었다.

    흥남철수 당시 알몬드 중장은 휘하 병력들에게 피란민은 태우지 말고, 美10군단과 한국군 1군단 등 유엔군 병력 10만여 명과 장비들만 철수시키라고 명령했다. 피란민 가운데 인민군 첩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알몬드 중장의 한국인 고문 현봉학 박사와 한국군 1군단장 김백일 장군 등이 “장비보다 민간인의 목숨이 더 중요하다”고 버텨 결국 장비와 탄약은 대부분 폭파시키고 대신 10만여 명의 피란민을 태워 철수하기로 결정한다.

    ‘흥남철수’를 있게 만든 주인공 美해병 1사단은 12월 15일 일부 병력이 철수한 것을 시작으로 끝까지 중공군을 막다가 12월 24일 마지막으로 철수했다. 

  • ▲ 흥남철수 당시 민간 1만 4,000여 명을 태우고 피난길에 올랐던 민간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 ⓒ해외 6.25관련 단체 사이트 캡쳐
    ▲ 흥남철수 당시 민간 1만 4,000여 명을 태우고 피난길에 올랐던 민간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 ⓒ해외 6.25관련 단체 사이트 캡쳐

    이 과정에서 민간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전설도 생겨났다. 당시 일본에서 전투기에 보급할 항공유를 싣고 왔던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흥남부두의 피란민을 보고선 두 말 없이 태웠다. 이렇게 남쪽으로 피난 온 사람이 1만 4,000여 명에 달했다. 남쪽으로 항해하는 중에 5명의 새 생명도 태어났다.

    이 흥남철수를 통해 유엔군 10만 5,000여 명, 피란민 9만 8,000여 명이 무사히 남쪽으로 내려왔고, 유엔군은 차량 1만 7,500대, 각종 물자 35만 톤을 가져올 수 있었다.

    흥남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온 사람들 가운데 장사를 시작한 사람들이 모인 곳 중 하나가 국제시장이다. 이 모든 과정을 축약해 이야기를 시작하는 영화가 바로 ‘국제시장’이다.

    이처럼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 그리고 국제시장은 모두 하나로 이어져 있다. 그럼에도 64년 뒤 한국 정치권에서는 이를 무시하고 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박승춘 보훈처장의 당연한 분노


    지난 11월 13일 국회 정무위원장실. 정우택 정무위원장(새누리당)을 찾아간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은 서류를 내팽개치며 분노했다고 한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게 말이 됩니까?”


    국가보훈처가 미국 측이 모은 기금에 보태 워싱턴 D,C의 알링턴 국립묘지에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세우려던 예산 3억 원을 국회 정무위원회가 “미국에 이미 같은 기념비가 3개나 있지 않느냐”며 전액 삭감했기 때문이다.

    국회 정무위는 이뿐만 아니라 유엔평화기념관 전시물 확보예산 20억 원도 전액 삭감했다.

  • ▲ 국회에 출석한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뉴데일리 DB
    ▲ 국회에 출석한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뉴데일리 DB

    한국 현대사를 생각한다면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의 분노에 찬 항의는 당연해 보였다. 하지만 국회 정무위의 새누리당 의원들 생각은 달랐다.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이 정우택 의원의 책상에다 서류를 내팽개치는 것에만 집착해 “사과하라”고 강력히 항의한 것이다.

    결국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은 국회 정무위 회의에 출석해 “죄송하게 됐다”며 고개를 숙였다.

    이 소식이 알려진 뒤 국민들은 새누리당 의원들에 분노했다. 국회 정무위가 예산 삭감의 이유로 내세운 기념비 3개는 미국인들이 성금을 모아 만든 것으로 한국 정부가 만든 기념비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비난 여론이 빗발치자 국회 정무위는 국가보훈처가 요구한 예산 가운데 절반인 1억 5,000만 원을 배정해줬다.


    한국도 미국도 잊지 않은 희생,
    우습게 보는 국회 정무위원들


    흥남철수, 그리고 국제시장을 있게 해 준 장진호 전투는 지금도 한국과 미국 양쪽에서 모두 회자되는 ‘전설’이다. 참전용사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어도 그들의 유산을 지키려는 노력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 ▲ 美해병 1사단 현역·예비역 장병들이 세운 장진호 전투 기념비. 그들의 희생 덕분에 살아난 한국에는 이런 기념비가 없다. ⓒ美국방부
    ▲ 美해병 1사단 현역·예비역 장병들이 세운 장진호 전투 기념비. 그들의 희생 덕분에 살아난 한국에는 이런 기념비가 없다. ⓒ美국방부

    2011년 4월 25일 ‘조선일보’는 美헐리우드 감독 에릭 브레빅과의 인터뷰 기사를 내놨다. 에릭 브레빅은 ‘혹한의 17일’이라는 영화를 제작 중이었다. 장진호 전투를 다룬 영화였다.

    에릭 브레빅 감독은 조선일보와 인터뷰에서 장진호 전투를 담은 영화를 제작하게 된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잊혀진 전쟁을 세상에 알리고 동료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린 용감한 병사들을 기리고 싶다. 전쟁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영웅주의는 배제하겠다.

    대신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진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가운데 피어나는 휴머니즘을 그리고 싶다. 북한 피난민 소녀가 美해병과 사랑의 감정을 싹 틔우는 장면은 전쟁에 대한 성찰을 제공할 것이다.”


    64년 전 이역만리에서 추위에 시달리며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지키다 숨진 美해병 1사단 장병들, 그들의 도움으로 흥남에서 철수해 새로운 인생을 개척한 피란민들, 그리고 그들의 삶터였던 국제시장.

    영화 ‘국제시장’이 상영 일주일도 안 돼 관객 170만 명을 넘었다는 점은 한국 국민들 또한 6.25전쟁과 그 속의 역사, 삶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국제시장’을 관람한 국민들이 장진호 전투에 대해 알게 되면 美해병 1사단 장병과 흥남철수의 주인공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 ▲ 1950년 말 흥남철수 당시의 상황. 이들 가운데 국제시장을 키워 온 피란민들도 섞여 있다. ⓒ6.25전쟁 기념사업회 블로그
    ▲ 1950년 말 흥남철수 당시의 상황. 이들 가운데 국제시장을 키워 온 피란민들도 섞여 있다. ⓒ6.25전쟁 기념사업회 블로그


    정무위원회 장진호 전투 기념비 예산삭감 관련 정정보도


    2014년 12월 23일자 「美해병 덕에 생긴 국제시장, “정우택 관람금지!”」 제하의 기사와 관련해, 확인 결과 정우택 정무위원장은 해당 사업의 실질 심사라 할 수 있는 예산안 심사 소위원회에 참여하지 않았고 오히려 최종 상임위 전체회의에서 해당 사업 예산을 반영시킨 것으로 확인돼 다음과 같이 바로 잡습니다.

    정우택 정무위원장은 장진호 전투 기념비 설립 사업 예산 삭감을 주도한 것처럼 보도하였으나, 이는 사실과 다른 것으로 확인됐다.

    국회법에 따른 국회 상임위원회의 예산안은 정우택 정무위원장이 주재하는 정무위 전체 회의에 상정되고, 보훈처장의 제안 설명과 전문위원의 검토보고를 들은 후 위원들 상호 간에 대체 토론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후 이 예산안을 보다 심도 있게 심사하기 위하여 예산안심사 소위원회로 회부되고, 여기에서 각 항목별로 세밀한 심사가 이루어지도록 위임을 한다.

    그 후 심사결과를 정무위원장이 주재하는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 보고하면, 정무위 전체회의에서 그 심사결과를 토대로 다시 심의를 한 후 최종적으로 의결하는 절차를 거치게 된다.

    장진호 전투 기념비 건립을 위한 예산의 삭감은 상기한 내부 프로세스 중 예산결산심사소위원들로 구성된 ‘예산안심사 소위원회 심사단계’에서 이뤄진 것이다.

    정우택 정무위원장은 오히려 예산안심사 소위원회의 심사 후에 정무위 전체회의를 열어 이러한 소위원회 심사결과보고를 받고, 전체 위원들 간에 논의를 거쳐 장진호 전투 기념비 예산(1.5억 원)을 반영하기로 최종 의결했다.

    정우택 정무위원장은 장진호 전투 기념비 건립 예산을 삭감하라고 주장하지 않았으며, 정무위원회 김기식 의원(새정치민주연합)에게 예산 삭감의 책임을 떠넘겼다는 부분도 당초 책임이 없으므로 사실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장진호 전투 기념비 건립을 위한 예산삭감의 성립과정은 국회 속기록에도 사실관계에 대한 명백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