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美대통령, 라울 카스트로 쿠바 정상, 자국 국민들에 성명 발표
  • ▲ 17일(현지시간) 오바마 대통령의 '쿠바와의 국교 정상화' 성명은 인터넷을 통해서도 생중계 됐다. ⓒ美백악관 생중계 화면 캡쳐
    ▲ 17일(현지시간) 오바마 대통령의 '쿠바와의 국교 정상화' 성명은 인터넷을 통해서도 생중계 됐다. ⓒ美백악관 생중계 화면 캡쳐

    피델 카스트로가 반란군을 이끌고 수도 아바나를 점령한 뒤 끊어졌던 미국과 쿠바의 관계가 53년 만에 정상화될 것으로 보인다.

    버락 오바마 美대통령은 17일(현지시간), 대국민 성명을 통해 “미국과 쿠바는 53년 만에 외교관계를 정상화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오바마 대통령은 정오 성명을 통해 미국의 ‘쿠바 봉쇄정책’이 실패했다고 밝혔다.

    “미국은 그동안 쿠바의 고립을 목표로 한 정책을 추진해왔으나 쿠바 정부가 자국민들을 억압하는 명분을 제공하는 것 외에는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지금이야말로 양국 관계를 진전시키는 데 실패한 ‘낡은 접근방식’을 끝내야 할 시기다. 우리는 이번 변화를 통해 미국과 쿠바 양국 국민들을 위한 새로운 기회들을 창출할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對쿠바 봉쇄정책을 없애고,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면서 양국이 각각 아바나와 워싱턴 D.C에 대사관을 열기로 했다고 밝혔다. 경제 제재도 없애고 여행 제한도 크게 완화할 계획이라고 한다.

    같은 시각 라울 카스트로 쿠바 대통령도 대국민 성명을 통해 미국과의 국교 정상화 계획을 국민들에게 밝혔다고 한다.

    라울 카스트로는 “쿠바와 미국 사이에 인권, 대외정책, 주권 문제 등에서 여전히 심각한 이견이 있지만, 양국은 세련된 태도로 이런 차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배워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오바마 美대통령과 라울 카스트로 쿠바 대통령이 이 같은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1년 동안의 ‘비밀협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국과 쿠바 관료들은 캐나다, 교황청 등에서 비밀협상을 진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도 개입했다고 주요 외신들은 전하고 있다. ‘해방신학’을 추종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오바마 대통령과 카스트로 대통령에게 양국 관계 개선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이 같은 비밀협상 덕분인지 양국의 관계 정상화 조짐은 지난 16일부터 공개됐다. 오바마 대통령과 라울 카스트로 대통령이 45분 동안 전화통화를 한 것이다. 이는 1961년 이래 처음 있는 대화였다고 한다. 

    미국과 쿠바의 국교 정상화가 세계의 이목을 끄는 이유는 양국의 국교 단절과 봉쇄정책이 시작된 이유 때문이다.

    1959년 1월 1일, 미국의 지원을 받던 지도자 바티스타가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도주한 뒤 피델 카스트로와 라울 카스트로 형제, 조력자인 체 게바라는 쿠바에 ‘공산정권’을 세운다.

  • ▲ 1959년 쿠바 수도 아바나 입성 당시 공산혁명군 리더들. 맨 왼쪽이 피델 카스트로, 가운데가 체 게바라다. ⓒ위키피디아 공개 사진
    ▲ 1959년 쿠바 수도 아바나 입성 당시 공산혁명군 리더들. 맨 왼쪽이 피델 카스트로, 가운데가 체 게바라다. ⓒ위키피디아 공개 사진

    쿠바의 ‘공산정권’은 바티스타 정부에서 일했던 군인, 경찰, 관료들을 무차별 학살하거나 강제수용소로 끌고 갔고, 민간인들의 토지와 자산을 몰수하기 시작했다. 이때 쿠바의 많은 중산층이 지리적으로 가까운 마이애미로 망명을 떠난다.

    ‘공산정권’은 자국 중산층들이 사라지자 외국계 기업의 자산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다. 1959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인 약탈을 시작한다. 대부분 미국 기업이었다. 미국 국적자들도 강제로 추방하기 시작했다.

    당시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쿠바 ‘공산정권’이 위험하다고 판단, CIA에게 쿠바 망명객을 훈련시켜 공산정권을 무너뜨리라고 명령한다. 1961년 4월 CIA의 훈련을 받은 쿠바인 1,400여 명은 피그스만(灣)으로 침공한다.

    하지만 불과 몇 달의 훈련을 받은 민간인들이 수 년 동안 소련의 도움으로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받은 쿠바 혁명군의 적수가 될 수는 없었다. 사흘간의 전투에서 쿠바 망명객 부대원 100여 명이 전사하고, 1,100여 명이 포로로 붙잡힌다. 미국은 이들의 석방을 위해 5,300만 달러의 몸값을 지불한다.

    이후 미국과 쿠바 간의 관계는 매우 나빠진다. 이때 쿠바는 ‘냉전 구도’라는 국제역학을 이용, 소련의 뒤에 숨는다. 소련은 미국의 턱 밑인 쿠바에 핵탄두를 탑재한 ICBM을 배치할 계획을 세운다. 이렇게 1962년 ‘쿠바 핵 위기’가 터지는 것이다.

    미국과 쿠바 간의 대결 구도가 계속되는 가운데 쿠바는 북한, 앙골라 등 해외 공산독재국가와 친분을 쌓으며, 소련의 명령에 따라 세계 곳곳에 군대를 파견한다.

    피델 카스트로는 50년 동안 독재를 하면서 자기만족에 빠져 살았지만, 국민들은 궁핍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냉전이 끝나고 소련의 지원이 사라지면서부터는 더욱 심해졌다.

    피델 카스트로는 90년대에 냉전이 종식된 뒤에는 궁여지책으로 외국인 관광객을 마구 불러들였다. 그 결과 곳곳에서 매춘이 성행하고, 불법 의료시술로 돈을 버는 곳들이 늘어났다.

    미국 마이애미나 플로리다로 도망치는 쿠바 난민들도 계속 늘었다. 美정부가 이들 모두를 난민으로 받아들이기에는 그 수가 너무 많았다.

    피델 카스트로는 2006년 동생 라울 카스트로에게 국가 평의회 의장직을 물려주고, 2011년에는 모든 권력을 넘긴 뒤 은퇴했다. 하지만 그의 독재 행위에 대한 어떤 반성이나 처벌도 없었다.

  • ▲ 2,000여 명의 쿠바 난민을 구출해 이동하는 美해군 상륙함 USS '위드비 아일랜드'. 쿠바 공산독재 정권은 그들 이외 다른 사람이 잘 사는 것은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 때문에 많은 난민들이 미국으로 도망쳤다. ⓒ위키피디아 공개 사진
    ▲ 2,000여 명의 쿠바 난민을 구출해 이동하는 美해군 상륙함 USS '위드비 아일랜드'. 쿠바 공산독재 정권은 그들 이외 다른 사람이 잘 사는 것은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 때문에 많은 난민들이 미국으로 도망쳤다. ⓒ위키피디아 공개 사진

    한편 오바마 대통령과 라울 카스트로가 ‘국교 정상화’를 선언하자 미국 내에서는 많은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플로리다와 마이애미 출신 상·하원 의원들은 “쿠바의 독재체제는 여전하다”면서 “쿠바 정권이 국민들에게 더 많은 권리와 자유를 허용할 때까지는 국교를 정상화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쿠바 이민자 출신인 마르코 루비오 상원의원(공화·플로리다)은 성명을 통해 쿠바와의 국교 정상화가 독재정권을 돕는 행위라며 강하게 비난했다.

    마르코 루비오 상원의원은 “(쿠바와의 국교 정상화는)쿠바 국민들의 인권을 개선하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쿠바가 카스트로 정권을 앞으로 몇 세대에 걸쳐 고착하는데 필요한 경제 제재를 미국이 해제하는 데 더 오래 걸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밥 메넨데즈 상원 외교위원장(민주당) 조차도 “오바마 대통령이 공산독재국가 쿠바를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은 순진한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현재 미국 내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쿠바 국교 정상화’ 정책에 적극 지지하는 사람들은 일부 의원과 국제 앰네스티 등 일부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