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총선 ‘대안 없어’ 아베 자민당 291석 승리…공명당 포함 326석 개헌선 넘어
  • 지난 14일 총선에서 압승한 뒤 웃고 있는 아베 신조 日총리. 그의 '롤모델'은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다. ⓒ英가디언 보도화면 캡쳐
    ▲ 지난 14일 총선에서 압승한 뒤 웃고 있는 아베 신조 日총리. 그의 '롤모델'은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다. ⓒ英가디언 보도화면 캡쳐

    지난 14일 일본에서 치러진 총선에서 자민당이 압승했다. 한국은 물론 중국 등 주변국에서는 일본의 총선 결과를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다. 아베의 자민당과 연립여당을 구성한 공명당까지 포함하면 개헌이 가능한 의석의 3분의 2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일본 중의원 의석은 모두 475석. 이 가운데 자민당은 291석을, 연립여당인 공명당은 35석을 차지했다. 합하면 326석으로 개헌 가능선 317석을 넘어선 것이다.

    일본 언론은 자민당과 공명당이 총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덕분에 상임위원장 독식은 물론 2018년까지 아베 정권이 유지될 수 있을 것이라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일본 언론은 이와 함께 야당인 민주당은 자민당과 아베 정권의 ‘대안’이 될 수 없는 콘텐츠의 부족, 무기력함 등이 원인이 되어 패배한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총선 준비를 제대로 못했다는 비판론도 제기되고 있다. 2009년 총선에서 308석을 얻었던 민주당은 이번 총선에서는 73석 밖에 얻지 못했다.

    일본 총선을 보는 한국 언론들은 역대 최저의 투표율(52%)에다 최대의 무효표(4%) 등을 부각시키면서, “아베 노믹스의 실패, 중의원 해산에 대한 비판이 많았지만, 야당이 아베 정권의 대안으로는 인정받지 못한 것 같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와 함께 아베 정권의 연립 여당이 ‘평화헌법 9조’ 개헌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중국 공산당 관영 매체들 또한 아베 정권의 총선승리가 ‘개헌’을 앞당길 것이라는 데 주안점을 두고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런데 일본을 포함, 한국, 중국 언론에서는 아베 정권의 ‘최종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않고 있다. 소수의 언론만 아베 정권이 ‘기시 노부스케의 못 이룬 꿈’을 이루려 한다는 우려를 하고 있다.

  • 아베 신조 日총리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 '대동아 공영권'에 대한 꿈을 죽을 때까지 버리지 않았다. ⓒ위키피디아 공개사진
    ▲ 아베 신조 日총리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 '대동아 공영권'에 대한 꿈을 죽을 때까지 버리지 않았다. ⓒ위키피디아 공개사진

    기시 노부스케는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총리를 역임한 정치인이다. 본래의 성(姓)은 ‘사토’다. 친동생이 자민당 총재를 4번이나 역임한 사토 에이사쿠 前총리이고, 사위가 일본 우경화에 앞장섰고, 1990년과 1996년 총리를 역임한 아베 신타로다. 아베 신조는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다.

    아베 신조는 정치권에 진출할 때부터 기시 노부스케와 많이 비교가 됐다. 

    1986년 야마구치縣에서 태어난 기시 노부스케는 히로히토 일왕이 살아있던 ‘쇼와 시대의 요괴(昭和の妖怪)’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그는 1920년 도쿄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뒤 관료가 된다. 당시는 육군본부가 일본을 지배하던 ‘대본영 시대’. 1925년 상공부와 농림부가 분리된 뒤부터 고속승진을 하게 된다.

    기시 노부스케는 젊은 시절부터 ‘대동아 공영’에 적극 공감, 이를 실천하는데 발 벗고 나선다. 덕분인지 도조 히데키 정권에서는 젊은 나이에 상공부 장관에 올라 태평양 전쟁에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데 전력을 다한다.

    당시 한반도에서의 물자공출도 그의 ‘노력’이라 볼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던 1944년, 전쟁을 계속하자는 강경파와 갈등을 빚어 도조 히데키 내각의 몰락을 부추키기도 했다.

    기시 노부스케는 1945년 패전 뒤에는 A급 전범으로 몰렸다. 하지만 3년 동안의 교도소 생활을 한 뒤 불기소 처분을 받고 석방, 정계로 복귀한다.

    기시 노부스케는 자유당과 민주당이 ‘자민당’으로 합당하는 과정에서부터 중요한 역할을 맡아 정계에서 은퇴할 때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 덕분에 1957년에는 총리가 됐다. 총리가 된 A급 전범은 ‘승전국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계략’을 짜기 시작한다.

    기시 노부스케는 미국의 감시를 느슨히 하고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 군사력과 외교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막 시작된 ‘냉전 대결구도’에서 미국의 편에 서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그 결과가 1960년 체결된 ‘미일안보조약 개정안’이다.

    그 내용은 패전 후 ‘중립국’이기를 바랬던 일본을 미국, 한국과 함께 ‘반공국가’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기시 노부스케는 조약 체결을 강행하다 국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총리직을 사퇴한다.

    총리직에서 물러났지만 기시 노부스케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일본을 반공국가로 만들고, 샌프란시스코 조약 이후 ‘일본의 피점령 체제’를 완화하고, 전후 50년 이상 계속된 자민당 체제를 굳건히 만든 것도 그였다.

    하지만 기시 노부스케의 ‘꿈’은 단순히 미국의 영향력에서 독립적인 힘을 갖는 게 아니었다. ‘미국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이 그의 ‘꿈’이었다. ‘평화헌법 개정’이 ‘꿈’을 실현하는 데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었다.  

  • 어릴 적 아베 신조의 생일파티를 해주는 기시 노부스케. ⓒ日총리실 공개사진
    ▲ 어릴 적 아베 신조의 생일파티를 해주는 기시 노부스케. ⓒ日총리실 공개사진

    1979년 정계에서 은퇴, 1981년부터 정미소에서 소일을 하던 기시 노부스케는 전면에는 나서지 않았지만 그의 후대를 육성한다. 그가 바로 아베 신조 現일본 총리다. 

    한국과 중국 언론은 아베 정권이 총선에 승리하면서 ‘평화헌법 9조 개정’과 군사대국화에 나설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하지만 기시 노부스케의 ‘유지(維持)’를 받드는 아베 총리의 ‘꿈’은 단순한 ‘평화헌법 개정’이 아니라는 점은 잘 지적하지 않는다.

    기시 노부스케가 1960년 ‘미일안보조약 개정안’ 체결을 밀어붙인 것은 단순히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한 게 아니다. ‘능력’은 없지만 또 한 번 ‘아시아의 패자(覇者)’에 도전할 준비를 원한 것이다.

    일제의 ‘대본영 시대’에 장관을 하면서 만주국 경영에도 참여했던 기시 노부스케는 국가의 영향력 강화는 ‘자원’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라는 것을 이미 깨달았던 것이다. 1960년대 초 능력이 없는 일본이라 해도 ‘미래 패권’을 위한 준비는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베의 행보를 보면 이런 기시 노부스케의 ‘꿈’을 받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명분’도 생겼다.

    대외적으로는 중국 공산당이 센카쿠 열도, 중국방공식별구역(CADIZ) 일방적 선포 등의 도발을 통해 스스로를 ‘아시아의 패자(覇者)’라고 밝히고 있고, 대내적으로는 ‘아베 노믹스’의 효과가 예상보다 빨리 줄어드는 데다 부가세 인상의 부작용으로 ‘기업은 부자가 되고 국민은 가난해지는’ 상황이 심각해져 국민들의 불만이 점차 커지고 있다.

    이런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대내외적인 ‘긴장 구도’를 조성하는 것이다. 당장 한국, 중국과의 전쟁을 벌일 수는 없지만, 북한이라는 ‘빌미’가 이미 있기 때문에 ‘긴장 구도’를 조성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다는 계산도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럴 경우 가장 만만한 희생양은 ‘한반도 일부 지역’이 된다.

    통일원 장관을 역임한 일본 전문가 허문도 前장관도 최근 펴낸 책 ‘죄 많은 일본, 통일까지 방해할 건가’를 통해 아베 정권의 장기 집권이 시작될 경우 일본이 ‘새로운 야욕’을 드러낼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허문도 前장관은 아베 정권의 ‘야욕’을 막으려면, ‘이승만 대통령 같은 대전략가’ 수준의 대응전략과 시각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아베와 기시 노부스케의 ‘공통점’을 찾아보면, 허문도 前장관의 지적이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하지만 현재 한국 정부와 언론, 학계에서는 ‘감정적인 반일감정’만 보일 뿐 대응전략이나 비전은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