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동포들은 체험으로 공산당 실체를 알고 있어…이들이야말로 무언의 반공투사들
  •    1·4 후퇴 때는 거지들도 자유 잃지 않으려고 부산으로 피난

    프란체스카의 亂中日記 - 6·25와 李承晩 [발췌] (21)

    李東馥 

  • ▲ 흥남철수 당시의 모습 ⓒ뉴데일리 DB
    ▲ 흥남철수 당시의 모습 ⓒ뉴데일리 DB

     
      <1951년1월25일>

    신 국방장관이 와서 중공군이 퇴각하고 있는 것 같다고 보고했다. 일선에서 우리 군인들이 중공군을 만나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공군 포로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중공군과 북한군 간에 언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언쟁의 쟁점(爭點)이 두 가지라고 한다. 한 가지는 중공군과 북괴군 간에 당초 약속한 임무가 중공군은 유엔군을 대적(對敵)하고 북한군은 국군을 분쇄하는 것이었는데 북한군이 그 임무를 달성하지 못했다고 중공군이 불평한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북괴가 중공군에게 식량을 공급하고 전투를 통하여 병력 손실이 있을 경우 병력을 보충해주기로 약속했었는데 이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중공군이 불평한다는 것이다.

    북괴군은 유엔군과 국군이 점령 지역이었던 북한에서 철수하면 남아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북한 지역 청년들 대부분을 한국정부가 데리고 내려 왔을 뿐 아니라 유엔군의 초토작전(焦土作戰) 때문에 서울이고 어디고 간에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은 고사하고 중공군이 숨거나 잠잘 수 있는 곳을 마련하는 것도 힘든 형편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자 중공군은 북괴군이 “민심을 얻지 못하여 국민의 호응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초래되었다”고 북괴군을 나무라고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어떠한 경우에도 민심이 이반되면 전쟁에 이길 수 없다는 점을 정부 각료들과 군 지휘관들에게 거듭거듭 강조해 왔다. 500만명에 가까운 북한동포들이 남한으로 넘어 왔기 때문에 지금 당장은 식량공급과 난민 대책에 힘이 겨운 것이 사실이지만 사랑하는 가족과 고향산천은 물론 집과 재산을 버리고 내려온 이 북한동포들은 직접 체험으로 공산당의 실체를 알고 있어서 이들이야말로 무언의 반공투사들이고 앞장서서 남한동포들과 손잡고 통일을 이룩할 역군이요 원동력이라는 것이 대통령의 확고한 생각이다. 

    대통령은 이들을 만날 때마다 두 손을 꼭 부여잡고 “얼마나 고생하십니까? 우리 함께 조금만 참고 이겨냅시다. 이 땅에서 공산당을 완전히 몰아내고 기필코 통일을 이룩하여 고향 돌아가 부모형제 한데 모여서 영세자유와 화평을 누리도록 분발합시다” 하며 격려한다. 14일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겨우 서울을 탈출해 살아나온 사람이 와서 중공군이 온통 여자마다 욕을 보였기 때문에 많은 여자들이 자살했고 열 살 이상의 사내들을 모두 잡아다가 학살했다고 알려 주었다. 

    <1월29일>

    1월28일 장면 대사가 도쿄로부터 도착해 대통령을 예방했는데 총리직을 맡을 수 없으며 워싱턴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은 그토록 중요한 직책을 맡을 수 없으므로 한국에 체류할 수 없으며 워싱턴에서 직무를 더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으로 느낀다는 말이었다. 

    터키의 여류 전투기 조종사 사비야 코겐 소령이 유엔군에 파견되어 한국전에 참전하게 된다고 한다. 코게 소령은 터키인의 국부(國父)로 칭송받는 고 케말 파샤의 양녀(養女)로 36세의 숙녀라고 한다.

    어느 신문에서 장면 총리를 마중나가 출영인사들이 “먼 길에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라는 훌륭한 한국의 환영인사 대신에 “헬로, 웰컴 홈!”이라고 영어로 인사한 장관들의 이름을 나열해서 꼬집어준 기사가 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대통령이 “그 신문, 참으로 좋은 기사를 썼구먼…”이라고 칭찬을 해서 화제가 되었다. 

    오후 늦게 우리는 관저 뒷산을 산책하다가 남루한 옷을 입은 열네 살짜리 동네 소년을 만났다. 대통령은 이 소년과 금방 친해져서 그의 집까지 따라가 그의 가족을 방문하게 되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형이 전선에 나가 싸우고 있기 때문에 정영석이라는 이 어린 소년이 담배장사를 해서 벌어오는 돈으로 가족의 끼니를 이어나간다는 딱한 사정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대통령은 이 총명한 영석이가 우선 학교에 가서 공부할 수 있도록 금일봉(金一封)을 주고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도록 여러 번 당부하고 돌아왔다. 

    대통령이 남달리 이 열네 살짜리 소년에게 애착을 느끼는 이유는 자신이 독립운동을 하느라고 제대로 돌보지 못한 채 객지(客地)인 미국 필라델피아의 한 병원에서 전염병으로 격리되어 홀로 죽은 외아들 태산이가 같은 나이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제 내 나이에는 대통령이 그토록 원하는 아들을 낳을 수는 없지만, 그 순박한 소년이 내가 채워 줄 수 없는 대통령의 쓸쓸함을 다소나마 달래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1월30일>

    서울의 광교에 본거지를 두고 걸식(乞食)을 하던 거지들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온 박동봉이라는 거지대장이 <부산일보>와 인터뷰한 기사를 대통령이 흥미 있게 읽었다. 그들이 부산으로 내려 온 이유는 공산치하에서는 거지들도 자유를 누리고 살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 서울에서는 좋은 집들이 온통 비어 있고 주인이 버리고 간 좋은 옷들도 실컷 가져다 입을 수 있지만 자유세상이 그리워서 부산으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광교다리 밑에서 잠자고 명동에서 활동하는 것이 소원이라는 이 직업 거지들은 하루 빨리 우리 국군이 서울을 수복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고 한다. 부산역전의 쓰레기통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졸면서 인터뷰했다는 이 거지대장은 “부산에서는 잘 사는 사람들보다는 피난민들이 밥을 더 잘 주고 민심도 후하다”고 슬쩍 귀띔하더란다. 대통령은 “우리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는 자유야. <부산일보>가 모처럼 좋은 기사를 냈구먼…” 하면서 김광섭 비서에게 그 기사를 오려 두라고 지시했다. 

    콜리어 대령이 리지웨이 장군의 심부름으로 대통령에게 왔다. 리지웨이 장군은 누구를 막론하고 불법적인 무기매매 행위를 엄금한다고 대통령이 명령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많은 유엔군 장병들, 특히 대부분 흑인 병사들이 무기를 들고 나와서 물물교환을 하거나 팔아서 받는 돈을 쓰고 있다고 한다. 사실상, 이곳 기생들이 많은 권총을 팔고 있다는데 한국 돈을 갖지 못한 유엔군 장병들이 돈 대신 가져다 준 것이라고 한다. 

    <1월31일>

    우리는 오전 9시 수영비행장을 떠나 30분간 비행한 후 대구에 도착했다. 대통령은 경북도청을 순시하고 청년단을 방문하여 격려해 주었다. 국방장관이 깨끗이 청소해 놓은 집으로 우리를 안내했는데 이 아담한 집을 우리들의 임시 숙소로 정했다고 알려주었다. 북괴의 6·25 남침으로 갑작스러운 피난생활을 하게 되었던 지난여름 우리가 대구에 있는 경북지사 관저에서 기거할 때는 방 주위에 어찌나 많은 사람들이 붐볐던지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그때는 지사관저에서 조그만 곁방이 달린 방 하나를 쓰고 있었는데도 과분하게 느껴졌었다. 당시 서울에서 갑자기 내려오게 된 정부 관료들과 여류 명사들까지 지사관저로 모두 찾아들어서 방문만 열면 사람에 치여 넘어질 뻔하기가 예사였다. 

    무덥고 긴 날씨에 견디다 못해 국방장관이 이 사람들 중 일부라도 옮겨줄 장소를 여기저기 물색해야 했었다. 다행히 대구시장 관사 옆의 두 영국장교가 쓰던 집에 양해를 구하여 혼자 몸으로 내려온 각료들을 그리로 내보내고 또 다른 집을 구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보내고 나서야 지사 가족과 우리는 겨우 숨을 쉴 수 있게 되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구의 피난 숙소가 이렇게 편안하고 조용할 수가 있다니 오히려 이상한 느낌을 금하기 어려웠다.

    <2월1일>

    대통령은 청주로 가는 길에 대구 비행장에서 알몬드 장군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대통령이 그의 가슴에 훈장을 달아주자 알몬드 장군의 볼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대통령도 무척 감동되었다. 후퇴하라고 명령을 받고 철수했던 군인들은 누구나 사기가 저하되어 있기 마련이다. 알몬드 장군의 부관들은 대통령이 수여한 훈장이 군단의 모든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아 줄 것이라고 대통령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리지웨이 장군과 알몬드 장군은 예하에 있는 각 사단장들과 함께 우리 국군의 백선엽 1사단장, 유재홍 3군단장, 3군단 소속 사단의 민기식 장군과 장도영 6사단장 등과 함께 작전회의를 했다. 백선엽 장군과 장도영 장군은 임진강 전투에서 가장 많은 적의 공격을 받아서 곤욕을 치렀던 장군들이다. 그러나 이제 이 두 장군은 그들이 당시 어려운 여건에서 얼마나 잘 싸웠는지를 인정받게 되었다. 한국 공군이 공격 목표를 귀신처럼 잘 찾아낸다는 것이 화제가 되었다. 미국 공군은 한국 공군처럼 낮게 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 공군은 땅바닥에 닿을 듯이 낮게 비행해서 적의 중요한 보급기지 여러 곳을 찾아냈다고 한다. 

    회의가 끝난 후 대통령은 오후 3시 대구로 돌아왔다, 대통령은 돌아오자마자 신 국방장관, 정일권 참모총장 및 김태선 치안국장과 만나서 경찰병력의 일부를 전투병력으로 편성하여 국군이 38선 이북으로 다시 진격할 때 함께 작전할 수 있도록 작전계획을 세웠다. 

    <2월2일>

    유엔총회가 영국과 인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찬성 44, 기권 9. 반대 7표로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는 소식이다. 이 결의안에 반대한 나라는 미얀마, 인도, 그리고 소련블럭의 5개국을 합하여 모두 7개국이다. 오전 10시 대구를 떠나 부산으로 왔다. 2시에 각료회의가 있었는데 장면 씨가 드디어 총리직을 수락했다. 

    4시쯤 양성봉 경남도지사가 미주의 동지회(同志會)에서 대통령을 도와 독립운동을 벌였던 애국지사 염선호 씨의 소식과 함께 염 옹의 향리인 경남 함양 운곡리 해평마을의 염 선비 댁에서 대통령에게 보내는 곶감 꾸러미를 들고 찾아 왔다. 대통령은 이 곶감 꾸러미를 받고 어린애처럼 좋아한다. 대통령이 특히 이 곶감 선물을 반겨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곶감을 주고 싶은 동네의 많은 개구쟁이 친구들이 관저 나무울타리나 기둥나무 뒤에서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오후 5시쯤 대통령이 산책 나오기를 기다려서 목책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숨었다 하는 이 꼬마친구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곶감이었다. 

    더욱이 며칠 동안 일선을 다녀 온 대통령은 오랜만에 만나는 이 꼬마친구들에게 줄 선물이 꼭 필요했는데 정말 맛있는 곶감이 이렇게 많이 생겼으니 반갑고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꼬마친구들은 대통령에게는 업히기도 하고 신이 나서 매달리기도 하지만 내 초록색 눈과 오뚝한 코가 두려움을 갖게 하는지 나만 보면 모두 질겁하고 달아나 버린다. 대통령은 염선호 씨의 소식과 곶감 선물을 가지고 온 양성봉 지사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하여 붓글씨로 ‘이른 봄’이라는 한시(漢詩)를 즉흥적으로 지어서 선물했다. 

    “산에는 오를 틈이 없어 뜰을 거니는데
    매화 꽃 나날이 봉이 터 오네
    아이놈들 달려와 이르는 말이
    저기 저 꽃 한 송이 먼저 피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