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13일자 오피니언면 '시시각각'에 이 신문 이훈범 정치부문 차장이 쓴 '허위보다 무서운 증오의 유포'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한 대학이 주최한 고교생 만화 공모전 수상작이라는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신사복 차림의 한 남자가 모닥불 앞에 앉아 뭔가를 굽고 있다. 환하게 웃는 얼굴은 영락없는 우리 대통령이다. 그런데 그가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으려 하고 있는 건, 세상에! 사람이다. 모닥불 위에서도 꼬치에 매달린 사람들이 불길을 피하려고 아우성을 치고 있다. 대통령의 왼손엔 돈뭉치가 쥐어져 있다.

    그림을 보고 위산이 역류하는 불편함을 느꼈다. 그 정도 엽기성에 입맛 떨어질 만큼 비위가 약하진 않지만 그림에서 뚝뚝 떨어질 듯한 증오가 너무나 섬뜩했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 학생을 이토록 화나게 만들었을까. 그의 그림은 대통령이 서민들을 희생시켜 부자들만 잘살게 해주는 정책을 편다는 풍자였을 터다. 만화니만큼 과장이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10대 특유의 직설적 표현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무래도 식인 대통령을 상상하기란 어지간한 증오로는 쉽지 않을 성싶다. 누가 이 어린 학생을 그토록 분노하게 만들었을까.

    어쩌면 이 학생은 미국산 쇠고기 파동 때 타다 남은 촛불을 간직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과장된 분노가 그럴 개연성을 높인다. 촛불이 절정을 이룰 때 “대통령을 잘못 뽑은 어른들 때문에 투표권도 없는 우리까지 죽게 생겼다”고 분노하던 학생들처럼 말이다. 촛불의 진앙이기도 했던 그들의 놀이터엔 여전히 증오가 넘친다. 광우병 공포는 밥그릇 챙길 수 있다면 불법파업도 마다하지 않는 방송사에 의해 비틀리고 부풀려진 거라는 게 밝혀진 지금도 그렇다. 근거도 없는 비난과 욕설이 증오를 확대재생산한다.

    그곳에서 군림하다 이제는 날개가 꺾이고만 미네르바도 마찬가지다. 경제위기를 논하면서 언제나 대통령을 물고 늘어졌다. 마치 위기의 주범이 대통령인 양 몰고 갔다. ‘강부자’ 대통령이 기분 나쁘고 그의 경제정책을 막연하게 의심하던 사람들은 그의 명쾌한-하지만 다분히 감정적인-반박논리에 열광했다. 합리적 비판은 끼어들 틈이 없었고 정부 정책이 못마땅한 인사들의 오프라인 찬양이 이어졌다. 미네르바가 영웅이 돼 가면서 증오도 따라 살쪘다.

    미네르바의 구속은 증오를 부추기는 무리에게 또 하나의 기회가 됐다. 익명의 담장 뒤에서 쏟아낸 무책임한 선동들은 무시되고 표현의 자유가 침해됐다는 선전전(宣傳戰)이 열기를 뿜는다. ‘만수 위에 백수’라는 포퓰리즘 구호가 등장하고 “미네르바 대신 군포에서 실종된 여대생이나 찾으라”는 논리 비약이 그럴싸하게 포장된다. 미국산 쇠고기를 먹으면 광우병에 걸린다는 주장과 같은 메커니즘이다. 이런 과장·왜곡의 진공관을 거쳐 증오가 또 한번 증폭된다.

    기가 막힌 건 정치권까지 그런 증오 확산에 가세하는 꼬락서니다. “유신 때보다 더하다”느니 “인터넷 민주주의의 사망선고”라느니…말이 되건 말건, 그 파장이 어떻건 자기 유리한 대로 떠들고 본다. 한 꺼풀 증오라도 품고 보듬고 녹여서 사회통합을 이뤄야 할 공당(公黨)이 하는 짓이 그렇다. 이런 구조라면 이 사회에서 증오의 싹은 고개를 내미는 순간 왕대처럼 자라나지 않을 수 없다. 좌우와 (강)남북으로 나뉘어 혐질(嫌嫉)의 불꽃이 튀고 그 사이 덜 야문 청소년들이 사실보다 증오를 먼저 배운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는 ‘2분간 증오’라는 게 나온다. 대형 화면에 뜬 인민의 적 얼굴이 염소로 바뀌었다가 적군의 모습으로 변한다. 매일 2분씩 그 장면을 보는 사람들 머릿속엔 증오가 단단히 뿌리박힌다. 2009년 우리 사회는 한술 더 뜬다. 그런 증오 프로그램이 24시간 가동되고 있다. 판단력은 풋사과 같고 흡인력은 스펀지 같은 청소년들이 맨 앞에 노출돼 있다. 그들을 무방비로 둬서는 우리 사회에 미래가 없다. 미네르바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형사 책임이 될 수도, 도덕적 책임이 될 수도 있지만 엄정히 물어야 한다. 증오를 확대 유포한 책임이다. 허위 사실 유포보다 더 중한 책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