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과의 ‘對話’는 여전히 ‘담벼락과의 對話’일 뿐이다

    휴전협상 대표이던 조이 제독

  •  “공산주의자들은 상대방에 의한 무력 사용 위협을
    실감할 때라야
    비로소 실질적 ‘협상’에 호응하는 것이 통례”

李東馥 /전 국회의원, 북한민주화포럼 대표  
 
   로마를 방문 중인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이
 “대화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말로
북한과의 이른바 ‘대화(對話)’에 대한 미련(未練)을 놓지 않았다.
이에 대한 북측은 반응은 악담(惡談)이었다.
“박근혜는 입을 잘못 놀리는 그 악습 때문에 북·남관계를 완전히 망칠 수 있다”는 막말로 대응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15일 판문점에서 있었던 남북 군사접촉에서 남측은 북측 대표로 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의 북측 주범(主犯)인 김영철 국방위원회 총정찰국장이 나와서 5·24 조치를 가지고 시비하는 적반하장(賊反荷杖)을 감내(堪耐)하는 진경(珍景)을 연출하고도 “대화 기류(氣流)는 유지하겠다”고 한다.

   이러한 남북간의 설왕설래를 통해 필자는 북한이 지금도 지구상의 다른 지역에서는 이미 20여년 전에 사라져 버린 냉전시대 특유의 공산주의자들의 강탈적 ‘협상전략’에 여전히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한다. 문제는 박 대통령을 위시하여 정부와 정치권 및 언론계와 학계에서 이같은 북한의 참 모습을 인식하지 못하고 마치 북한 정권을 상대로 사전적(辭典的) 의미의 ‘대화’가 가능한 것처럼 생각하는 착시(錯視) 현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아래의 글은 1995년 10월 <국방군사연구회>가 '한국의 휴전체제와 평화체제 구축 방향'을 주제로 주최했던 세미나에서 필자가 발표한 '평화체제로의 전환을 위한 협상전략'이라는 제목의 논문 중에서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정부의 안팎에서 북한과의 ‘대화’ 업무에 종사하거나 대북 전략에 관여하는 분들이 한 번 읽어보고 참고해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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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냉전시대’의 동서관계는 '전부냐, 아니면 전무냐'의 ‘제로•섬’ (ZERO-SUM) 관계로 특징지워져 있었다. 바로 이 같은 사고 때문에 ‘냉전시대’에는 동서 양대 진영 간에 기본적으로 ‘협상’의 토대가 마련되기 어려웠다. 쌍방 간에는 전 지구적 차원은 물론 지역적으로도 긴장완화·전쟁방지·군비감축·관계개선·교류협력·평화공존 등 ‘협상’을 필요로 하는 산적한 사안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의미 있는 ‘협상’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냐 하면 특히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간의 체제경쟁에서 이미 자신감을 상실한 공산진영 쪽에서는 자신감을 잃으면 잃을수록 “전쟁터에서 쟁취하지 못한 것을 ‘협상’ 테이블에서 쟁취하겠다”는 강탈적 협상논리에 집착하는 경향이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냉전시대’의 공산주의자들의 경우 ‘협상’이란 “내 것은 건드리지 못하게 하고 상대방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기술”로서만 그 의미를 인정하는 것이 예사였다.  

과거 ‘냉전시대’ 기간 중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는가를 말해 주는 많은 일화(逸話)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 일화중의 하나가 미국과 ‘중공’(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냉전시대의 호칭)간의 소위 ‘바르샤바 대사급 회담’에 관한 얘기이다. 아직도 대만의 ‘중화민국’만을 인정하는 미국과 이미 중국대륙의 임자가 된 ‘중공’간에는 한국전쟁의 정치적 뒷마무리를 위한 제네바 회담이 결렬된 뒤인 1955년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를 무대로 하여 양국의 폴란드 주재 대사였던 알렉시스 존슨(U. ALEXIS JOHNSON)과 왕병남(王炳南) 간의 대화통로가 마련되었다.   

존슨 대사는 1957년 말 주 타일랜드 대사로 전임하면서 바르샤바를 떴고 그의 후임으로는 제이콥 빔(JACOB BEAM)이 바통을 이어 받았지만 미국과 ‘중공’간의 이 ‘바르샤바 대사급 회담’은 그로부터 17년 후인 1972년 미·중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미·중 ‘바르샤바 대사급 회담’은 사실은 말이 ‘회담’이었었지 통상적 의미의 ‘회담’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 ‘회담’은 어떤 때는 매주 열린 적도 있었지만 때로는 몇 달 만에 한 번씩 열리는 것이 예사였고 경우에 따라서는 1년 내내 열리지 않은 적도 없지 않았다. ‘회담’이 열리는 경우에도 어떤 때는 한 쪽만 얘기하고 다른 한 쪽은 한 마디의 말도 없이 듣기만 하다가 끝이 나는 적도 있었고 심지어는 어느 한 쪽도 말하지 않은 채 몇 시간씩 침묵의 대좌를 하다가 일어나는 경우도 있었다. 이때에 생겨난 신문용어중의 하나가 ‘담벼락과의 대화’(TALKING TO THE WALL)이다. 대화의 ‘일방통행성’에서 연유된 비유이다.  

1970년대 초 남북조절위원회 우리측 대변인으로 남북대화에 참가한 필자는 북한과의 대화 양상이 1950년대에서 1970년대에 걸쳤던 미·중 ‘바르샤바 대사급 회담’을 방불케 하는 것임을 실감했다. 필자는 특히 외신기자들로 하여금 남북대화의 실제 모습을 실감하게 하기 위한 고육지계(苦肉之計)로 하나의 새로운 신문 용어를 만들어 냈었다. ‘귀머거리들의 대화’(DIALOGUE OF THE DEAF)라는 ‘조어(造語)’였다. 특수한 훈련을 받지 않는 한 귀머거리들은 자기들의 얘기만 일방적으로 말할 뿐 상대방의 얘기는 들을 수 없다. 공산주의자들과의 대화가 갖는 ‘일방통행성’을 상징하는 ‘조어’였다. 이 ‘조어’는 당시 특히 남북대화를 취재 보도하는 외신기자들의 기사에서 한동안 회자(膾炙)되었었다.   

그런가 하면 외신기자들은 남북대화의 “일방통행성”을 상징하는 또 다른 은유(隱喩)를 즐겨 사용했었다. 남북한이 “서로 각기 다른 주파로 얘기한다” (SPEAK ON DIFFERENT WAVE-LENGTHS)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협상’은 두 가지 유형으로 대별된다. ‘우호적 협상’과 ‘적대적 협상’이 그 것이다. ‘우호적 협상’은 비록 만족의 정도에 있어서 차이는 있을지언정 ‘협상’의 결과에 의하여 ‘협상’ 당사자들이 일정한 비율로 만족을 “공유”(WIN-WIN)하게 되는 ‘협상’이다. ‘우호적 협상’은 협상 당사자들이 앞으로 공유할 만족의 상대적 비율을 조정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반면 ‘적대적 협상’은 그와는 반대로 ‘협상’에 임하는 어느 일방이 ‘협상’의 결과를 ‘독식’(ZERO-SUM)하려 하는 경우가 통례이다. 

따라서 ‘적대적 협상’은 타결 그 자체가 매우 어렵기도 하지만 비록 타결되는 경우라도 타결된 합의 내용이 성실하게 이행·준수되기보다는 일정한 시일이 경과하는 과정에서 ‘파기’되거나 아니면 ‘사문화’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 사실이다. 왜냐 하면 ‘적대적 협상’을 통하여 생산되는 합의사항이 어느 일방에 의한 ‘독식’을 허용하는 내용이라면 당하는 쪽에서 마음으로 이에 승복하지 않게 될 것이고 반대로 그 내용이 강자(强者)에 의한 ‘독식’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될 때는 강자의 편에서 그 결과를 불만스럽게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냉전시대 동서 양 진영 간의 ‘협상’은 ‘적대적 협상’의 대표적 경우였다. 이 시기 대공 ‘협상’에 수반되는 위험성에 대해서는 경험을 통한 많은 경구(警句)가 축적되어 있다. 그중 대표적 경구는 미·소 1단계 전략무기 감축협상(SALT-I)시 미국 대표단의 전략고문으로 참가했고 뒷날 레이건 행정부의 국방차관을 역임한 협상학의 권위(權威) 프레드 찰스 이클레(FRED CHARLES IKLE) 박사가 저술한 협상학 교과서 《국가간의 협상기법》(HOW NATIONS NEGOTIATE)에서 발견할 수 있다.   
  • ▲ 찰스 터너 조이 해군제독이 쓴 책 표지.
    ▲ 찰스 터너 조이 해군제독이 쓴 책 표지.
    이클레 박사의 경구는 원론적이다. 그는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 ’에서는 “원칙적 합의를 피하라”고 충고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에서 ‘원칙적 합의’에 도달하는 경우 공산주의자들은 후일 이 ‘원칙적 합의’를 실천·이행하는 단계에서 합의된 원칙에 대한 일방적 해석을 내세워 이의 실천·이행을 방해하거나 아니면 이의 ‘재해석’을 위한 ‘재협상’을 요구하고 이 과정에서 합의사항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것이 통례라고 경고했다.   

    이같은 사태를 예방하기 위한 이클레 박사의 처방은 “공산주의자들과 협상할 때는 ‘원칙적 합의’나 ‘원칙에 관한 합의’는 피하고 후일 해석상 이견의 발생 여지가 없는 구체적 표현과 용어로 합의를 이룩하라”는 것이었다.   

    냉전시대 공산주의자들의 ‘협상’이론과 관행에 관해서는 알프레드 D. 윌헬름 주니어(ALFRED D. WILHELM, JR.) 저 《중국인들의 협상기법 - 방식과 특징》(THE CHINESE AT THE NEGOTIATING TABLE (談判) - STYLE & CHARACTERISTICS)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윌헬름은 국가간 ‘협상’을 다루는데 있어서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사용하는 다양한 용어와 그 용어들 간에 존재하는 개념의 차이를 지적한다.   

    즉,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경우 일반적인 의미에서 영어의 ‘NEGOTIATION’을 직역한 중국어는 ‘담판’이지 ‘협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담판’에는 ‘우호적 협상’과 ‘적대적 협상’의 개념이 함께 함축되어 있으나 ‘적대적 협상’ 쪽에 더 가까운 의미를 갖는다. ‘우호적 협상’의 경우에 사용되는 용어들이 ‘회담’, ‘협상’ 등으로 이 가운데 ‘협상’이 가장 우호적 분위기에 적용되는 용어이다.   

    따라서 ‘적대적 협상’의 경우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협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협상’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위해서는 사전에 ‘협상’ 당사자들 간에 “상당한 상호 신뢰와 원칙에 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중국어’와 ‘조선어’의 차이 때문에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협상’ 관련 용어들을 북한이 그대로 답습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북한 공산주의자들도 ‘협상’ 관련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중국 공산주의자들과 똑같은 ‘협상’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예컨대 북한은 남북한 당국 간의 대화의 경우 ‘협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는 ‘접촉’이나 ‘대화’이다. 심지어 북한은 ‘회담’이라는 용어의 사용에도 지극히 인색하다.   

    ‘협상’이라는 용어가 적용되는 것은 이른바 남북 ‘정치협상’의 경우에 국한된다. 그 차이가 어디에 있는지는 분명하다. 남북 간 ‘정치협상’은 ‘우호적 협상’의 한 형태로 이 같은 형태의 회담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참가 쌍방 간에 “상당한 상호 신뢰와 원칙에 관한 공감대”가 미리 형성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 때쯤 되면 자연 남쪽의 경우에는 그 참가 대상이 ‘정부 당국자’들은 배제된 가운데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는 세력에 국한되게 된다.   

    그와는 달리 남북 간에 진행되는 ‘접촉’과 ‘대화’는 그 목적이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개념의 ‘협상’을 추진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남북관계에 있어서 북한의 개념에 입각한 ‘협상’ 추진에 방해가 되는 요소를 제거하고 그 같은 ‘협상’에 유리한 환경과 조건을 마련하는 수단으로 구실하는데 국한되는 것이다.   

    이클레에 의하면 ‘협상’이란 “서로 상충되는 이해관계의 당사자들이 공통의 이해를 상호 교환하거나 실현시키는데 관한 합의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해서 상호 제안을 제시하는 과정”이다. ‘협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협상 당사자들이 서로 타협하고 양보해야 하며 어느 쪽도 자기의 입장을 100% 충족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 이 경우 ‘협상’ 결과는 당사자 간에 50대 50을 축으로 하여 70대 30 또는 30대 70으로 유·불리의 차이는 생길지언정 어느 일방에 의한 ‘독식’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우호적 협상’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이론일 뿐이다.   

    윌헬름에 의하면 냉전시대 공산중국과 서방세계간의 ‘협상’은 ‘적대적 협상’의 전형적인 한 형태였다. 당시 공산중국은 서방세계와의 ‘협상’을 “제국주의와의 투쟁의 한 형태”라고 정의하고 있었다. 대서방 ‘협상’에서 공산중국에게는 ‘전술적 타협’은 있어도 ‘전략적 양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술적 타협’도 무제한이 아니었다. 이 것 역시 “장기적 또는 전략적 목표 달성에 필요한 원칙적 입장을 양보하지 않는 한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협상’을 한다고 해도 상대방과 서로 중간지점에서 만난다거나 아니면 공평성의 차원에서 양보를 주고받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협상’이란 “자기측 관점에 대한 상대방의 반대를 완화시키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기 측의 입장의 도덕적 정당성을 받아 들여서” 결국 “상대방이 자기 측의 입장을 수용하도록 설득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써만 그 가치가 인정되는 것이었다.   

    그동안 많지 않았던 외부세계와의 ‘협상’ 과정에서 북한이 보여 준 행태는 앞서 윌헬름이 정리한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행태와 궤를 같이하는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협상’ 행태에 대해서는 1951년부터 1953년까지 진행된 끝에 한국전쟁 정전협정을 탄생시킨 휴전협상의 유엔군측 수석대표였던 C. 터너 조이(C. TURNER JOY) 제독이 그의 경험을 토대로
     《공산주의자들의 협상기법》(HOW COMMUNISTS NEGOTIATE)이라는 명저를 남겨 놓고 있어서 이 분야의 후학(後學)들에게 많은 참고가 되고 있다.   
  • ▲ 찰스 터너 조이 해군제독이 쓴 책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