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방에서 몸을 담요로 감은 채 집무한 李 대통령...누룽지로 끼니도
  • 냉방에서 몸을 담요로 감은 채 집무한 李 대통령

    프란체스카의 亂中日記 - 6.25와 李承晩 ⑳
    “우리는 공산당과 싸우기에 앞서서 일본군과 싸울 것이다”

    李東馥
     
    관저에서 난로도 못 피우게 하고 온 몸을 담요로 감은 채 집무실에서 일하는 대통령을 보는 김활란 박사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러면서 연세도 있으시니 난로쯤은 피우고 일하시도록 권고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다리 밑에서 떨고 있는 수많은 피난민 동포들을 생각하면 이것도 과분하다”고 딴전이었다. 

       


  •  <1951년1월12일>

     대통령은 리지웨이 장군의 초청으로 국방부장관을 대동하고 대구를 방문했다.
    대통령은 먼저 한국군사령부를 들른 다음 리지웨이 장군의 사령부로 갔다.
    리지웨이 장군은 대통령에게 한국 정부가 그에게 제공하고 있는 협력에 감사의 뜻을 표시하고
    이제는 적이 어떻다는 것을 파악했으며 우리가 전선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아군은 준비를 갖추는 대로 곧 북쪽으로 밀고 올라갈 것이라고 보고했다.  

    대통령은 리지웨이 장군이 더 이상 철수하지 않겠다면서 앞으로는 후퇴 대신 진격하겠다는
    결의를 밝힌 데 대해 치하한 뒤 이렇게 말했다. 

    “리지웨이 장군, 어째서 귀하는 싸울 태세를 갖추고 훈련이 되어 있는
    한국 청년들을  무장시키지 않습니까? 어째서 50만 한국 청년들이
    공산당과 싸울 수 있도록 무장시키지 않는 것입니까?
    미국은 우리가 언젠가는 뒤에서 당신들을 칼로 찌를 것이라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군사원조도 받은 것 없이 스스로의 생명을 바쳐가면서
    공산군과 성공적으로 싸워온 나라는 오직 대한민국뿐입니다.
    어째서 귀하는 한국청년들을 제쳐놓고 대신 일본을 무장시켜서
    또 다시 일본을 열강(列强)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까?  

    한국은 말할 나위도 없고 필리핀이나 태국, 그리고 아시아의 다른 모든 나라들은
    일본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당한 쓰라린 경험은 이러합니다.
    우리는 일본 사람들이 러시아와 싸울 수 있게 이 땅을 통과시켜 주었더니
    그들은 결코 우리나라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미국의 도움을 받아서 한반도를 40년간 점령했었습니다.
    바로 당신네들 미국이 1905년 러시아와 싸울 수 있게 일본의 군비를 증강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당신네들은 바로 그 러시아가
    일본과 싸우도록 러시아의 군비를 증강시켜 주었습니다.
    그런데, 당신네들은 이번에는 또 다시 일본의 군비를 증강시켜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러시아나 일본이나 그들의 야망대로 남의 나라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다 같이 한국이 필요합니다. 당신네들은 항상 한국이 아시아의 관건(關鍵)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고
    이 두 열강이 바로 한반도 때문에 전쟁에 휘말렸다는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극동(極東)에서 한국에 강력한 보루(堡壘)를 구축하여
    이 두 열강을 견제하려 들지 않고 오히려 우리의 적들만 부추기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들이 한국전쟁에서 패하거나 철수한다면
    당신들은 일본 공산당을 저지할 수 없습니다.
    내 말을 명심(銘心)하여 들으시오.
    그러나, 만약 당신들이 우리의 청년들을 훈련하고 무장시킨다면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 대통령은 리지웨이 장군과 헤어진 뒤 신 국방장관 및 정일권 장군과 함께 전방을 둘러본 뒤
    우리 군인들의 소총 쏘는 훈련장을 시찰하고 훈련 광경을 지켜보았다.
    유재흥 장군의 아버지 유승열(劉升烈) 장군이 그곳의 책임자로 있었다.
    대통령은 이곳의 우리 군인들을 격려하는 연설을 하면서
    여기에 오기 전에 리지웨이 장군 사령부에 들러 했던 이야기를 재탕(再湯)했다.

    대통령은 “미국인들이 일본 군인을 한국에 보내서 싸우도록 하겠다는 소문이
    한국인들을 격분시키고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공산당과 싸우기에 앞서서
    먼저 일본 군대와 싸울 결심을 할 것이다.
    과거 일본과의 쓰라린 경험 때문에 우리는 결단코 일본 군대가 또 다시
    우리 땅을 밟게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 주었다”고 말했다.  

    <1월13일> 

    부산은 가장 어지러운 곳으로 변하고 있다.
    부유한 사람들은 그들이 소유한 재산에 관한 걱정이나 하면서 오직 나라 밖으로 떠날 마음뿐이다. 그들은 조국을 구하겠다는 생각은커녕 패배주의적 분위기만 조성하고 있다.
    일반 국민들은 정부를 믿고 있지만 대부분의 부유층 사람들은
    이기적으로 오직 자신들의 가족만을 걱정하고 있다.
    신문은 '전쟁을 망각한 부산?'이라는 제목 아래
    “보이소, 피난 왔습니까? 유랑(流浪)을 왔습니까?”라고 경고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일선에서 혹한(酷寒)과 싸우면서 목숨을 버리고 있는
    우리 장병들의 고통이나 부상병들의 참상, 전쟁고아들의 애처로운 사정은 아랑곳없이
    유흥(遊興)과 호의호식(好衣好食)을 일삼고 있어서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있다. 

    <1월14일> 

    어제는 수은주(水銀柱)가 영하 10도까지 내려간 추운 날씨였는데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여성들도 총궐기하자는 여성단체 중심의 궐기대회가 경남중학교 운동장에서 열렸다.
    여기 모인 여성들은 “모든 여성들도 3·1 정신으로 재무장하여 자유와 평화를 찾을 때까지
    죽을 각오와 결의로 분투하자”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국토를 사수하고
    통일을 이룩할 때까지 여성들도 합심 협력하여 싸우겠다는 비장한 내용의 메시지를
    대통령에게 보내왔다.
    오후에는 오스트레일리아 대표인 프림솔 경(卿)이 찾아 와서 휴전결의안에 관해 무슨 이야기를 하려다가 대통령이 관심을 표하지 않자 입을 다물었다. 

     

    <1월15일> 

    우리는 오전 11시 관저를 떠나 부두에 도착하여 최근에 미 해군으로부터 인수한
    해군 호위함에 승선했다. 호위함 승조원들은 바다 한 가운데에서 포격연습을 했다.
    배가 천천히 움직이면서 세 가지 다른 종류의 포로 바위를 포격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목표물을 잘도 명중시키고 있었다.  

    우리는 배를 타고 오가면서 황해도 해주에서 두 명의 중공군을 포로로 잡은 병사들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었다. 이들이 사로잡은 중공군 포로들은 제 이름도 쓸 줄 모르는 문맹자들로
    밥을 얻어먹기 위하여 군에 입대했다가 여기까지 끌려 왔다고 하더란다.
    이들은 10월 중순께 중공군이 압록강 도하작전을 시작했을 때 나귀의 등에 옥수수 가루를 싣고 낮에는 미 공군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하여 은신처(隱身處)에서 낮잠을 자고 야간에만 산줄기를 타고 왔다고 한다.
    그들은 중공군이 항상 국부군에 가담했던 자들을 총알받이로 앞장세워 싸운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신 국방으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중공군의 군기(軍紀)와 행군 능력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한다. 특히 중공군의 지휘장교들은 미군의 전투능력과 전술 및 우수한 장비들에 관하여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미군이 가지고 있는 약점들에 대해서도 숙지(熟知)하고
    이를 휘하 병사들에게 잘 교육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즉, 미군은 후방이 차단되면 취약해지며 상황이 급박해지면 중장비들을 거의 버리고 간다.
    보병은 공격 작전이나 방어 작전에 약한 편이고 공군과 중무기에만 주로 의존한다.
    주간(晝間) 전투에는 강하지만 야간 전투나 육박전에는 서툴며
    포 지원이 없을 때는 사기가 와전히 저하된다. 후방이 차단되면 어쩔 줄 모르며
    자동차 같은 수송수단이 없어지면 전투의욕을 상실한다 등등이다.  

    우리는 조용한 저녁시간을 가지면서 휴식과 목욕의 즐거움을 만끽(滿喫)했다.
    부산이나 대구의 우리 거처에는 욕실(浴室)이라는 사치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1월16일> 

    대통령은 오전에 집 아래에 있는 작은 잔교(棧橋)에 내려가 낚시질을 했다.
    물고기는 한 마리도 낚이지 않았다.
    대통령은 중요한 결정을 할 때나 깊이 생각할 일이 있을 때는 낚시를 한다.

    점심 식사 후 장교 300명이 모인 회합에 나가 한 시간 동안 연설을 한 후 돌아왔다.
    오후 3시께는 김정열 장군이 헤스 대령과 함께 와서 대통령이 대구로 타고 갈 C-47기를 가지고 왔다고 보고했다. 미 육군 참모총장 콜린스 장군이 대구로 오는데 가급적이면 대통령을 뵙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4시45분 진해를 떠나 5시15분 대구에 도착했다. 

  • <1월17일> 

    대통령은 오전 10시 비행장으로 가서 콜린스 장군을 만나
    우리 청년들을 훈련시키고 그들에게 무기를 줄 것을 한참 동안 설득했다.
    그리고 한국청년들에게 게릴라 전법을 훈련시키려는 굿펠로우 대령의 계획에 관해서도
    설명하면서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내는 개인적 메시지를 장군에게 들려주었다.  

    “귀국의 대통령에게 戰況은 사람들이 지어내서 말하는 것처럼 나쁜 것은 아니라고 말해 주시오. 우리나라 사람들은 싸우기를 원하며 우리 청년들이 자신의 조국을 구하기 위하여 죽을 각오를
    하고 있다고 전해 주시오.” 

    콜린스 장군은 대통령의 메시지를 그대로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달하겠다고 약속했다.
    대통령은 이어서 대구의 훈련소로 가서 훈련을 받고 있는 우리 청년들에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대통령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강한 투지를 보여주는 청년들을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보면서 이야기했다.

    우리는 오후 2시 대구를 떠나서 30분 후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은 한창 붐비고 있었다. 비행장에는 커다란 온갖 형태의 비행기들이 줄이어 늘어서 있었고
    거리는 사람들과 차량들, 그리고 이동하는 트럭과 탱크들로 가득했다.
    부산에서는 길마다 가득 메운 차량들 때문에 부두를 따라서 이동해야 했는데
    항구에는 무기와 탄약을 수송해 온 수많은 배들이 정박하고 있었다.  

    <1월18일> 

    대통령은 무기를 만드는 기계를 사들여 와서 여기서 소총을 만들고 탄약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있다. 그리하여 훈련 받은 우리 청년들에게 무기를 주어서 우리 군대와 함께 싸울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지난 5일 50만 한국 청년들을 무장시키기 위한 소총과 무기를 요청하는 서한을 맥아더 장군에게 보냈다.  

    현재 경상남도에 몰려 와 있는 전재민의 수효가 200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해외에서 보내온 편지들을 대통령과 함께 읽고 있는데 양 노인이 방문을 노크했다.
    양 노인은 대통령이 좋아하는 특별 간식을 들고 있는데 참으로 구수한 냄새가 나는 먹음직스러운 누룽지였다. 나는 이가 좋지 못해서 먹기 힘들었지만 치아가 좋은 대통령은 누룽지를 무척 즐긴다.  

    대통령이 어렸을 때부터 즐겨 했던 누룽지에는 대통령을 애지중지했던 어머니와 누나들과의 애정 어린 추억이 담겨져 있다. 더구나, 누룽지는 대통령이 젊은 시절 구국운동을 하면서 피신해 다닐 때의 비상식량이기도 했다고 한다. 대통령은 특히 구수한 숭늉의 맛은 세계 어느 나라의 차 맛보다도 훌륭한 별미(別味)라고 하면서 식사가 끝나고 숭늉을 들 때마다 흐뭇해한다.  

    <1월20일> 

    저녁 늦게 국방장관이 와서 적의 대공격이 어느 순간에 있을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이라고 보고했다. 리지웨이 장군은 아침 일찍부터 일선에 나가 있으며 그가 처치 장군과 기타 지휘관들을 교체하여 미군의 지휘체계에 변화를 가한 데 대해 다행으로 받아들이는 의견이 많다.

    돌이켜 보면, 우리 한국사람들은 처음부터 親日的인 처치 장군의 태도를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지난 여름 전투 중에 처치 장군이 지휘한 24사단은 어디를 가나 敵에게 쉽게 돌파당했었다. 앞으로 電氣 사정이 호전될 것이라고 한다.
    일선의 전황도 밝아지니까 마음도 밝아지는 것 같다.   
     

  • <1월21일> 

    아침에 申 국방이 온 것을 보고 대통령은 그와 함께 대구로 가려고 했으나
    申 국방은 시기적으로 군인 전부가 임박한 적의 대공격에 대비하고 있는 때이기 때문에
    대통령의 방문이 적절치 않다고 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생각은 적의 人海전술을 저지하기 위해 전방에 가서
    몸소 청년대를 조직하겠다는 것이다.  

    “우리의 어머니와 딸들은 일찍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이겨냈으니
    우리도 그 전통과 열의를 계승하여 총궐기하자”는 내용의 격려문이 신문에 크게 실렸다.
    대통령은 “희생을 무릅쓰는 한국 어머니들의 헌신과 인내심이야말로 민족 역사를 지켜온
    원동력”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대통령은 살림 형편이 가장 어려웠을 때 식구들을 조금이라도 더 먹이기 위하여
    밥먹는 것을 뒤로 미루는 척하면서 끼니를 거르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늘 기억하고 있었다.
    대통령의 어머니는 대통령이 어렸을 때 손바닥으로 볼기를 때리면서
    천자문(千字文)을 몸소 가르치셨는데 여섯 살에 천자문을 모두 외우자 이를 칭찬하어
    ‘책씻이’를 한다고 떡을 해서 동네잔치를 베풀어 주셨다고 한다.  

    <1월22일> 

    맥아더 장군은 20일 전선이 완전히 정비되었기 때문에
    중공군을 몰아내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단언했다.
    미 8군은 극히 만족스러운 상태로 임무수행을 하고 있으며
    한국의 교두보 유지에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맥아더 장군은 한국으로 비행해 오는 도중에 준비했던 성명서를
    미 8군 회의실에서 기자들에게 발표했고
    리지웨이 장군은 낙하산 부대용 바지를 입고 겉저고리 양쪽 호주머니에 수류탄을 매어 단 채로
    맥아더 장군을 수행했다.  

    오후에 김활란 박사가 와서 국방부 제3국의 여자의용대원들이
    우리나라의 자유를 위해 싸우다가 희생된 故 워커 장군의 동상(銅像) 건립기금으로 써달라고
    월급을 모아 찾아 왔다고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보일러 시설이 없는 우리 관저에서 난로도 못 피우게 하고
    온 몸을 담요로 감은 채 집무실에서 일하는 대통령을 보는 김활란 박사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러면서 연세도 있으시니 난로쯤은 피우고 일하시도록 권고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다리 밑에서 떨고 있는 수많은 피난민 동포들을 생각하면 이것도 과분하다”고 딴전이었다. 대통령이 “찬 손을 따뜻하게 해 줄 터이니 내게 가까이 오라”고 김 박사에게 말하자 김 박사는 “마미 허락 없이는 안 되지오”라는 농담으로 대꾸해서 우리 모두는 박장대소(拍掌大笑)를 했다. [앞으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