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호 잠수수색 현장을 가다③비극의 결산서

    해경과 다이버들은 수심 40m를 오가는 심해에서
    4개월여 동안 293명의 시신을 인양한 ‘슬픈 세계 신기록’을
    세워가는 중이다.


    李東昱(조갑제닷컴 기자) 
       
      
    “돈 내기 경쟁은 국가가 할 짓이 아니다”

    다이빙 스테이션 바지에서는 해가 진다고 밤이 되는 것도 아니고, 해가 뜬다고 낮이 되는 것도 아니다. 울돌목 다음으로 강한 조류가 흐르는 이곳 맹골수도 부근 해역에서 작업시간은 썰물과 밀물이 교차되면서 잠시 느려지는 停潮(정조) 때만 가능하다. ‘물때’를 맞춰 작업할 수밖에 없는 곳이다. 현장에서는 이를 ‘물때 작업’이라고 부른다. 이론상 6시간마다 하루 네 번씩 정조시간이 돌아오지만 수중 작업이 가능한 때는 그리 많지 않다. 물살이 빨라지는 사리 때는 停潮다운 정조 시간이 하루 1~2회가 고작이다. 視界(시계)는 최악이 된다.

    한 번 작업이 시작되면 시간적 여유는 매회 한 시간 안팎에 불과하다. 그 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해와 달의 인력으로 바다의 조류가 잠에서 깨어난다. 다이버들을 거부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게다가 바람이 심해 파도가 높거나 기상조건이 맞지 않으면 이마저도 작업할 수 없다. 결국 바지선에서의 생활은 정조 때가 낮이며 조류가 1노트 이상 나오는 간조 때가 밤이 된다. 이곳에서의 낮과 밤은 하늘이 乙이고 바다가 甲이다. 바다 상황이 잠수작업을 허락해야만 낮이 된다는 이야기다.

    이러니 모두가 쪽잠을 잘 수밖에 없다. 컴프레셔와 디젤 엔진은 한 번도 쉬지 않고 웅웅거리는 소음을 낸다. 이런 선상에서 대기중인 대원들은 쪽잠을 자든가 스마트 폰으로 그리운 가족과 문자를 주고받곤 한다. 주말이나 일요일 같은 것은 없다. 공휴일이나 국경일도 없다. 임무교대를 하면 해경 잠수요원들은 인근에 묘박중인 3011함(함장 곽영환 경정)으로 옮겨가 잠을 자고, 해군도 인근의 함정으로 돌아간다. 마찬가지로 그 배에서 휴식하던 대원들이 단정을 타고 바지선으로 올라오는 식이다.

    잠수 구조대에 대한 유가족들의 질책과 언론의 편파보도가 계속되자 바지선 위의 분위기는 언제나 젖은 담요처럼 축축하다. 고된 작업이 끝나더라도 그날의 성취에 감격하거나 축하하는 일은 없다. 모두가 만족하는 작업이라고 해 봐야 시신인양이고, 이를 두고 축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남자들이 모여 단합해서 일을 하고 나면 유흥도 따르지만 이곳에서는 그런 일이 일체 없다. 이들 모두가 격심한 육체노동과 더불어 감정노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작업이 4개월째를 접어들면서도 아직도 그 끝을 모른다는 점이다. 

    한번은 잠수사들의 수당을 일괄지급하는 문제를 두고 유가족 대표단과 해경 측과의 의견 대립이 있었다고 한다. 인양 시신을 찾은 유가족들은 팽목항에서 훌훌 떠나고 시간이 갈수록 남아 있는 유가족 수는 줄어 갔지만 반면에 남게 된 이들의 작업 독려와 채근은 더 심해져 가는 중이었다. 유가족들은 작업성과를 높이기 위해 ‘돈 내기식’으로 하자고 했다. 일종의 성과급 제도의 도입을 요구한 것이다. 시신을 발견해낸 다이버에게 더 많은 돈을 몰아주기 식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일견 합리적으로 보여 유가족들 대부분은 찬성했었다. 이 때 회의를 주관하던 이춘재 경비안전국장(치안감·54)이 가로막았다.

    “아무리 성과가 중요하다고 해도 ‘돈 내기’는 국가가 할 짓이 아닙니다. 유가족 여러분들께서 이것만은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잠수사들에게는 최악의 추석

    다행히 그의 간곡한 부탁에 유족들도 한 걸음 물러났었다. 그와 유가족들간의 대면은 4월18일 이후 지금까지 계속돼 왔다. 현재 10명의 실종자 가족들과 이춘재 국장과는 서로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아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평화무드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이춘재 국장으로서는 해경과 잠수대원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유가족들에게 이해시키고 설득해야 할 과제가 산더미 같다. 대신 유족들로서는 ‘중단 없는 수색’을 끊임없이 요구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이춘재 국장의 대응이 불만의 요인이 되곤 한다. 그래서 항상 일촉즉발의 긴장이 감돈다.

  •  육지에 사는 권력 가진 분들은 추석을 맞아 차례를 지내거나 선물을 주고받느라 바빴겠지만 다이빙 스테이션에는 추석도 없었다. 명절을 앞두고 실종자 가족들과 대책회의를 하는 가운데 실무진 중 한 사람이 “추석 때만큼은 대원들을 집에 가게 해 주자”고 했다가 “지금 무슨 소리 하냐”며 실종자 가족들이 언성을 높였다. 집에도 못 가는 잠수사들이 바지에서 차례를 지내는 것도 “우리는 시신도 못 찾았는데 그 앞에서 무슨 차례냐”며 일부가 반대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이춘재 국장이 상황을 정리했다. 그는 자신의 책임하에 작업에 차질 없도록 하는 대신, 작업이 없는 대원들 일부를 교대로 2~3일간 휴가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바지선에 남은 잠수사들에게는 최악의 추석이 됐다.

    이처럼 장기간, 대규모 수중 수색은 지구상 어디에서도 이뤄진 바 없었다. 더구나 스쿠버, 후카, 커비 모건 헬멧(임브리클) 등 수중 수색의 모든 장비가 동원되는 중이다. 그 사이에 美 해군이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들의 ROV(Remotely Operated Vehicle·무인 잠수정)를 투입하겠다고 나섰다가 처음 접하는 강한 조류에 포기한 채 철수했고, 알파 잠수의 이종인씨가 다이빙 벨로 한동안 관심을 끌었으나 역시 제대로 물 속에 담가 보지도 못한 채 돌아갔다. 미국에서 들어온 리브리더(Re-breather·재호흡기) 업체의 다이버들이 거액의 계약금을 받고 의기양양하게 현장으로 들어왔으나 수상에서 변죽만 울리다 물도 묻혀보지 못한 채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이로써 지난 4개월 동안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이 동원됐고, 현재는 그 중 가장 신뢰할 만한 장비와 방식들로 지금의 잠수 수색 시스템을 갖추게 됐다.

    현재 세월호 해역의 다이빙 스테이션에 구축된 잠수 수색 시스템은 세계 잠수사에 남을 새로운 역사를 기록해 가는 중이다. 

    會議(회의)

    수색 작업이 있는 날은 매일 저녁, 물때가 가장 좋지 않는 시간에 ‘수중수색 일일 회의’가 열린다. 장소는 현대 보령호 선상의 컨테이너를 개조해 만든 식당이다. 해경과 해군, 119 구조대와 민간 잠수사의 팀장과 감독자들이 전원 참석한다. 지난 8월17일 밤, 기자도 옵저버 형식으로 이 회의에 참석했다. 

    긴 식탁 두 개를 연이은 테이블 한 편으로 해군에서는 SSU 대장 등 5명이 참석했다. 이들이 A, B팀이다. 중앙119에서는 한정민 팀장이 참석했으며 이들이 테이블의 절반을 차지했다. 테이블의 반대편에는 88수중의 백성기 총감독, E팀 정창호 팀장, D팀 윤병정 팀장, C팀 이명학 팀장, 현대 보령호 바지 책임자 이길수 씨, 88 바지 책임자 원만식 씨 등이 둘러앉았다. 해수부의 나종진 서기관이 배석한 가운데 긴 테이블의 정중앙은 해경 경비안전국 이춘재 국장이 자리했고 맞은편에 해경 상황실의 임근조 과장(총경·52)이 앉았다. 그 옆으로 해경의 이우수 경감과 박광호 팀장(경감·48)이 위치했다.     

    수중수색 회의는 이춘재 경비안전국장이 주관했다. 한국해양대학교를 나와 1등 항해사 등으로 6년간 승선하다 해경에 투신한 그는 해경 내에서 대형 해난사고를 가장 많이 겪어본 지휘관이다. 2007년 본청 경비과장 시절에는 대형 유조선 허베이스피릿호의 해양오염 사고가 발생했었다(12월7일).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막대한 원유가 태안반도를 휩쓸었다. 당시 이 배의 구멍은 해경 특수구조대 대원과 오염방제국 대원들에 의해 2일에 걸쳐 막을 수 있었다.

    李 국장이 인천 해양경찰서장이던 2010년에는 천안함 사고를 만났다. 해경은 이때에도 함상 밖으로 나온 해군 55명을 구조했으며 세월호와 마찬가지로 선체내부에 남아 있던 장병들은 전원 사망했었다. 해경 투신 이후 경비함정과 경비과장, 함장을 거치면서 각종 해상사건들을 무리 없이 처리해 해경 내에서 손꼽히는 사고 처리의 베테랑이다. 특히 그가 지휘권을 잡고 있을 때는 대원들이 안전사고를 당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은 해경의 모든 대원들이 그를 신뢰하고 존경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번 세월호 현장에서 발생한 두 다이버들의 사망사고도 모두 민간 잠수사들의 사건이었다. 이런 그를 어떤 사람은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고 세우는 보기 드문 전문가'로 평했다.

    회의가 시작되자 상황과장 임근조 총경이 책임자로 있는 해경 지휘부에서 작성한 수색계획도와 각종 자료를 배포했다. 그는 SSU출신의 해경 상황담당관으로 본청에서 근무하던 중 세월호 사건으로 현장에 내려와 이춘재 국장과 함께 바다위의 현장을 지켜오는 중이다. 해군 구조대에서 시작된 그의 바다 생활은 해경에 투신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각종 해난사고에서 항상 현장 지휘를 도맡아 온 인물이다. 해경과 해군, 그리고 119 구조대와 민간 잠수 인력 등 이질적인 전문가 집단들이 모여 있지만 해경의 이춘재 국장과 임근조 과장 두 사람의 경험과 능력을 신뢰하는 분위기가 일사분란한 지휘체계를 유지하게 했다.

    이날 임근조 과장이 참석자들에게 돌린 회의자료는 ‘세월호 4차 수중수색 실적 및 계획표(8월17일자)’와 그래픽으로 작성된 ‘세월호 4차 수색계획(8월17일)’ 그리고 도표로 작성된 ‘전자코 시스템 해수 채취 현황’ 등이었다. 

    ‘비극의 결산서’ 

    ‘세월호 4차 수중수색 실적 및 계획표(8월17일자)’는 A4 용지 한 장으로 이뤄져 있는데 각 팀별 작업경과와 수색 결과를 기록해 둔 표였다. 회의는 이 표의 내용을 팀장이 일독하며 설명을 해가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때 A3 크기의 ‘세월호 수색계획도’를 참고삼아 펼쳐 놓고 설명이 진행됐다. 모두가 눈여겨 보는 도표도 이것이었다.

  • 필자가 직접 촬영한 세월호 수색 계획도
    ▲ 필자가 직접 촬영한 세월호 수색 계획도


    필자가 직접 촬영한 세월호 수색 계획도

    4도 색상의 컴퓨터 그래픽으로 정확하게 그려진 ‘세월호 수색 계획도’는 세월호 3, 4, 5층 도면과 도표로 구성돼 있었다. 각 층의 선미 쪽은 구름무늬가 에워싸고 있는데, 바로 청해진 해운이 불법 증축한 영역이다. 이 도면은 이곳 잠수사들과 실종자 가족들에게는 너무나 낯익은 그림들이다. 바지선 위의 상황실 텐트 벽면에도 크게 확대한 도면이 걸려 있고 팽목항의 가족 브리핑실에도 걸려 있다. 잠수사들에게는 어디에서든 이 그림을 볼 수 있게 해 두어 물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라고 한다. 가족 브리핑실에 걸린 도면은 실종자 가족들에게 잠수 작업 설명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정작 시신을 찾지 못한 가족들에게는 여러 가지 상상의 실마리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도면은 모두 3개 층의 선실 그림으로 채워져 있는데 각 층의 방들이 설계도처럼 정확하게 그려져 있다. R(로얄룸), CR(승조원룸), F(패밀리룸), S(스탠다드·다인실), SP(스탠다드 프리미엄·고급 다인실), DR(화물기사룸) 등의 영문자와 숫자가 조합된 방 표시가 즐비하다. 어떤 방인지 알고 수색하면 더 쉬울 것이다. 그 밖에 화장실, 샤워실, 로비, 식당, 주방, 선원식당, 휴게실, 편의점, 게임룸, 노래방 등 공용실이 표시돼 있어 세월호의 내부구조를 손바닥 보듯 알 수 있다. 

    세월호에는 111개의 객실과 17개의 공용객실이 있다. 4차 수색을 해오는 현재까지 총 128개의 모든 방을 수색 완료했다. 대부분 객실은 다섯 번 이상 수색했으며 많은 경우는 수십 번 이상 드나든 곳도 있다고 한다. 또한 수색팀이 수색구역을 번갈아가며 교차 수색을 했다. 

    일반 승객들이 많이 승선한 3층은 41개의 객실과 공용객실 4개가 있다. 현재 이곳에서 44구의 시신을 찾아냈다. 4층은 단원고 학생들이 단체로 승선한 층이다. 객실 45개와 공용객실 8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4층에서 모두 191구의 시신을 인양했다. 승조원과 로얄룸이 있는 5층은 25개의 객실과 공용객실 5개가 있는 곳으로 16명의 시신이 발견됐다. 이로써 128개의 객실을 수색해 오면서 251명의 시신들을 찾아냈고 43구의 시신은 부양된 채 발견, 가족들의 품으로 돌려보냈다. 

    도면 왼쪽의 세로 도표는 세월호의 ▢인원 현황 ▢수색 결과 ▢범례 등 크게 세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인원현황의 내역은 ‘비극의 결산서’이다. <승선원 476명, 구조자 172명, 희생자 294명, 실종자 10명.> 여기서 ‘희생자’란 인양된 시신을 의미한다. 실종자는 아직 찾지 못한 시신이다. 그 옆 칸엔 실종자의 내역이 <학생 : 5명, 교사 : 2명, 승객 : 3명> 이라고 적혀있다.

    ▢수색결과 도표는 4월16일부터 7월18일까지 시신인양 실적이 기록된 도표이다. 맨 윗칸엔 4월16일부터 4월18일까지 사흘간을 한 칸에 정리해 두었다. 모두 29구가 인양됐는데 하나같이 부양(浮揚)된 시신이며 선내 발견 시신은 0으로 표기돼 있다. 선내 진입이 불가능했던 시점이란 뜻이다. 선내 시신의 숫자가 처음 기재되기 시작한 때는 4월19일이다. 이 날 수중에서 유리창으로 보이는 구명조끼 차림의 시신을 발견한 뒤 유리창을 깨고 모두 3구의 시신을 인양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했다. 또한 세월호 부근에서 떠오른 시신 4구가 인양됨으로 해서 모두 7구의 시신을 찾은 날이다. 다이버들의 작업환경이 어느 정도 궤도를 찾기 시작하던 4일째(4월22일), 선내에서만 모두 36구의 시신을 인양했다.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 숫자가 기록됐다. 4월24일부터 선내인양 시신은 21구로 줄어들더니 ‘특정한 며칠’을 제외하고는 거의 매일 한 자리수를 기록해 갔다. ‘특정한 며칠’은 접근하기 어려웠던 다인실(S, SP)이나 식당 등을 수색하던 날이다.

    태풍으로 작업이 중단된 며칠을 제외하고는 거의 매일 1구 이상의 시신을 수색해 인양하던 실적은 6월8일 2구를 인양한 뒤 뜸해지다가 기자가 바지선 취재를 위해 처음 승선했던 6월24일 선내에서 1구를 발견해 잠수사가 안고 올라왔었다. 그리고 마지막 시신이 인양된 날은 7월18일. 이후 두 달이 다 돼가는 현재까지 수색은 별다른 성과가 없다. 사고 당시 의식을 잃은 채 구조됐다 사망한 한 명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해경과 다이버들은 수심 40m를 오가는 심해에서 4개월여 동안 293명의 시신을 인양한 ‘슬픈 세계 신기록’을 세워가는 중이다.

    도표의 하단에 기재된 ▢범례 편은 수색완료 구역, 교차 수색 구역, 당일 수색 예정지, 선체절단부위 및 하잠줄 설치지점 등을 표시해 두고 있다. 모든 방을 뒤졌고, 뒤진 방들을 팀끼리 교대로 교차수색을 하기도 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어렵고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 <계속>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