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완장들이 ‘빨갱이’는 금기어로 만들고
    ‘친일파’는 유행어로 만들었다


    과거지향 문화에서 권력은 명분과 정통성에서 나온다.

    최성재     
       
    “요새 세상에 빨갱이가 어디 있어?” --안철수의 아버지

    이 말은 사실 여부보다 함의(含意)가 중요하다. 이것은 ‘예/아니오’의 의문문(Yes/No question)이 아니라, 강한 부정을 나타내는 수사의문문(rhetorical question)이다. 빨갱이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 진영 논리에 갇혀 아직도 차마 받아들이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수구꼴통’을 강하게 꾸짖는 수사의문문(rhetorical question)이다.

    민주화된 지 20년이 넘는 한국에, 남북정상회담을 두 번이나 개최한 대명천지에, 보수정권으로 정권이 교체된 후에도 개성공단은 여전히 활발히 가동되고 있는 진보대세의 현실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실형을 살았던 사람들이 대거 사면 받아 좌우 양쪽에서 해방공간의 옛 독립투사처럼 큰소리치며 사는 세상에--이것이 바로 ‘요새 세상에’의 함의이다.

      민주성지 광주광역시와 햇볕정책만세 전라도가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경상도의 큰바위얼굴, 지역화합의 실천적 상징, 진흙탕 정치계의 망국적 바이러스를 단숨에 퇴치할 초강력 백신, 지혜와 덕과 젊음을 아울러 갖춘 세계적 석학, 그를 시샘하고 모함하기 위해 친일파 후손과 군사독재 잔당들이 금기어(禁忌語)를 넘어 사어(死語)가 된 이 빠진 말 칼로 언감생심 시험하려고 든다마는 어림도 없는 말씀---이것이 ‘어디 있어?’의 함의이다.

    한국은 명분 사회요 과거지향 문화이다. 그래서 권력은 명분과 정통성에서 나온다.
    중종반정(中宗反正)이나 인조반정에서 보듯이 권력을 탈취하는 데 필요한 물리력은 불과 수백에서 수천의 군사에 지나지 않았다. 5.16군사혁명이나 12.12사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이든 현대든 외국의 다른 왕조나 2차대전후 무수한 신생독립국에 비하면, 쿠데타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명분과 정통성이란 걸림돌 때문이었다.

  • 박정희 소장의 혁명공약 제1항은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였다.
    반공(자유민주)이 제일의 명분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전 국민이 동의했다. 적어도 여기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반대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남파간첩도 찍소리 못했다. 2차대전 후 가장 참혹했던 내전을 겪은 지 10년도 안 되었기 때문에, 후삼국 시대로 치면 1천여 년 만의 내전으로, 빨갱이들의 기습남침으로 인구의 10분의 1을 잃은 지 10년도 안 되었기 때문에, 4.19의거 후에 들어선 민주정부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기 전 조선말의 사색당파나 거의 진 배 없었기 때문에, 그러다가는 김일성 빨갱이한테 자유와 평등을 모두 잃을 것 같았기 때문에, 全 국민이 빨갱이 소탕 작전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초등학교 2학년도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고 죽음을 맞이할 정도였다. 여기에 정당성을 부여한 자가 김일성이었다. 무장간첩을 수시로 내려 보내 민간인을 학살했던 것이다.

    박정희는 명분은 얻었지만, 정통성은 온전히 얻지 못했다. 100여개 후진국 중에서는 인도와 쌍벽을 이루며 가장 모범적인 선거를 실시하긴 했지만, 이성계의 혈통이 곧 정통성이었던 과거와는 달리 현대 한국은 서구식 선거가 곧 정통성이었으므로 정통성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었다. 후에 노태우는 완벽한 서구식 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12.12사태가 걸림돌이 되어 정통성을 온전히 확보하지 못했다.

    빨갱이란 말은 햇볕정책과 더불어 금기어가 되었다.
    반공도 사라졌다. 그렇다고 ‘용공(容共)’이 활성화된 것도 아니다. 용공도 빨갱이처럼 더 이상 특정하여 입에 오르내리면 안 되었다. 도리어 빨갱이로 몰렸거나 의심받았던 사람들이 친일파의 잔재와 군사독재의 폐해를 상기시키기 위해, ‘그럼, 나도 빨갱이란 말인가? 위대한 민주투사인 이 몸도 빨갱이란 말인가?’라며 역공하기 위해서 독점적으로 사용했다.

    ‘빨갱이’와 공존했지만 위상은 낮았던 ‘친일파’가 ‘민주’에 이어 최고의 명분으로 떠올랐다.
    명분과 정통성을 100% 확보했다고 확신한 대통령에 의해,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치려다가 IMF 신탁통치를 불러들인 대통령에 의해, 조선총독부를 해체하는 것으로 ‘친일파’가 ‘민주’에 이어 최고의 명분으로 떠올랐다. 그것은 ‘역사 바로 세우기’와 ‘제2의 건국’의 형태로 문화혁명의 신작로를 구두소리도 요란하게 걷기 시작했다.

  • 그것은 1945년부터 1992년에 이르는
    대한민국의 역사 지우기로 구체화되었다.

    무능과 부패로 만신창이가 되었던 제2공화국 외에는 모조리 난도질했다.
    그들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온통 친일파와 그들의 후손이 망친 부끄러운 나라였다.
    민주완장을 찬 자들은 스스로 발부한 면죄부를 이마에 붙이고, 과연 누가 더 친일했는지에 대해서는 절대 나란히 비교하지 않고, 신생독립국 중 가장 자유롭고 평등하고 풍요한 국가 건설에 조금이라도 기여한 사람들은 기어코 티끌 하나라도 찾아내어 역사의 죄인으로 만들었다.

    김일성 집단이 수십만 명을 미제와 남조선 괴뢰의 간첩으로 조작한 것과 아주 비슷했다.

    완전히 외면할 수는 없었던 한강의 기적과 새마을운동마저 명분과 정통성의 잣대로 난도질했다. 이어서 노동자농민의 착취와 분배의 왜곡, 제2공화국의 공 가로채기 등으로 자근자근 밟았다.
    알고 보면 노동자농민이 이룩한 것이라며 이윽고 경제성장의 공도 일절 인정하지 않았다.

    그 사이 처음에는 은근슬쩍 나중에는 노골적으로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던 사람들은, 이전의 판결이 하나하나 뒤집히는 바람에 모조리 푸른 민주훈장을 받고 노란 민주완장을 차게 되었다. 한편 늙었다는 이유만으로 아무 반대급부 없이 장기 복역 중이던 간첩들은 우르르 공산독재자의 품으로 돌려보냈다. ‘공화국 영웅’의 조공품을 바쳤다. 노예 주인에겐 70억 달러 햇볕 추파를 던지며 피투성이 2천만 노예 동포는 본 척 만 척하면서, 아문 지 70년 된 상처는 날마다 들추며 정적의 시체를 꺼내어 매 타작한다.

  • 이승만은 명분(자유민주와 반공)과
    실리(시장경제와 농지개혁과 국민교육),
    정통성(UN 보증 유일합법정부)을 모두 갖췄으나 열의 한둘 정도의 과오가 있었다.

    박정희는 이승만의 긍정적 유산을 그대로 계승하되,
    상대적으로 명분보다 실리를 중시하고 과거지향 문화 대신 미래지향 문화를 18년 만에 거의 뿌리내렸다.
    ‘빨리 빨리’는 그렇게 현대 한국인의 민족성으로 자리 잡았다. 이것은 600년 전통을 뒤집는 정신혁명이었다.

    자연히 인조 이후의 위선적 소중화(小中華)를 그대로
    답습한 민주완장에겐 박정희가 눈의 대들보였다.


    적의 적은 친구인지라, 조선 후기보다 더한 명분 사회와 과거지향 문화를 구축한 김씨조선이 민주완장에게 선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