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일 5억 이상을 쓰고, 조명탄만 200억원어치를 쏜
    세월호 潛水수색 현장을 가다①

    언론, 정치인, 유가족 눈치 보느라 公益(공익)이 私益 앞에 무릎을 꿇다
    4분 정도 빛을 발하는150만 원짜리 군용 조명탄을
    41일간 1만3204발, 198억600만 원을
    하늘에 퍼붓다.


    李東昱(조갑제닷컴 記者)   
<“해경 덕분에 살았다”는 말이 사라지다>
  
  사건 첫날 안전행정부의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는 세월호 승선자 총원을 일곱 번 번복했다. 언론과 방송은 이성을 잃고 현장에서 약 50여 분 동안 승객의 36%인 172명을 구조한 海警(해경)을 사고의 주범처럼 몰았다. 구조되지 못한 나머지 승객들이 ‘선실에서 움직이지 말라’는 방송을 따르다 참변을 당했다는 사실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생존자들이 “해경 덕분에 살았다”는 증언을 했지만 이런 말들은 방송이나 언론에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다. 
  
  생존자 김태환(가명)씨 같은 경우 “그날 오후 병원에서 수십여 명의 방송사와 신문사 기자들이 찾아와 구조과정을 이야기하고 배가 넘어지는 과정을 설명했는데 이 사람들(기자들)은 자기네들이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쓰고 싶은 말만 따서 썼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해경 때문에 살았지 해경이 없었으면 어업지도선과 작은 어선으로 탈출 승객의 절반도 못 구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김 씨의 증언을 보도한 언론과 방송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모두 해경을 주범처럼 몰아가는데 골몰했다. 
  
  ‘그 바다’를 아는 사람들은 그 바다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바다’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 바다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사고 발생 첫날 정오가 지난 시각, 해경의 두 잠수대원들이 하잠줄을 설치하기 위해 잠수하던 중 소용돌이치는 하강조류에 휘말렸다. 그 중 한 명은 선체 밑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겨우 빠져나왔다. 두 대원은 보트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구조된다. 비로소 사고 해역의 위험을 체감한 해경도 ‘그 바다’를 조금은 알게 됐다. 천안함 침몰 수역은 조류가 약 3노트였다. 美 해군도 포기한 곳이었다. 세월호 침몰 지역은 평소에 최대 5.6노트를 기록한다. 게다가 큰 선체가 물 속에 들어앉으면서 소용돌이가 일어나 이곳의 조류를 측정해 본 해경은 유속이 최대 11노트가 나온 때도 있다고 했다. 인류 역사상 저토록 강한 조류가 쓸려다니는 바다 속을 사람들이 잠수해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누가 해경을 더 잘 때리나 경쟁>
  
  국민의 해상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海警은 팽목항에 모여든 민간 자원봉사 잠수사들의 접근을 위험하다며 막았다. 이들은 너도나도 들어갈 수 있다고, 들어가야 한다고 외쳤다. 海警은 끝내 이들의 접근을 통제했고, 통제당한 민간 잠수사들은 언론과 방송을 통해 “海警이 구조를 막고 있다”고, “海警 때문에 사람이 죽어간다”고 외쳤다. 海警에게 “살인자”라고도 외쳤다. 
  
  일부 유가족들은 海警을 불신한 나머지 自費(자비)로 민간 잠수사들을 어선에 태워 현장 해역으로 진입했다. 그 민간 잠수사들은 끝내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1분도 안 돼 떠내려가면서 “살려줘”를 연발했다. 그들은 인근 어선에 구조된 뒤 바람처럼 현장에서 사라져 버렸다. 2차 인명피해가 우려되는 상황을 막아야 했던 현장의 해경은 최대한 검증되지 않은 잠수사들의 잠수를 가로막았고 잠수를 하지 못한 이들은 언론과 방송을 통해 해경 비난에 가세했다. 
  
  ‘그 바다’를 아는 사람들은 침몰한 지 몇 시간 후면 이미 사망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바다’를 모르는 사람들은 바다밑 가라앉은 배에서도 ‘살아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언론과 방송은 후자측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그리고 全국민을 상대로 아직 배 안에 생존자가 있다는 가정하에 손에 땀을 쥐는 중계방송을 계속해 갔다. 덩달아 “에어포켓에서 72시간 동안 생존할 수 있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이로써 민간 잠수사들은 최소한 72시간 동안은 해경을 무력화할 명분과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차분하게 짚어보면 생존자를 위한 에어포켓은 존재할 수 없는 배였고, 당시 선박 전문가들은 전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헛된 희망을 키워가는 일부 방송 평론가와 자칭 전문가란 사람들이 방송에서도 ‘에어포켓’을 떠들었다. 그럴수록 시청률이 높아진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거짓 희망을 부풀릴수록 시청률은 상종가였다. 
  
  사고 해역을 지키던 해경은 자격이나 실력이 의심스러운 민간 잠수사들의 入水(입수)를 끝내 막았지만 에어포켓을 믿는 유가족들의 항의에 굴복하고 결국 배 안에 에어를 주입하기로 결정했다. 4월18일 오전 9시34분부터 선체에 접근해 에어 주입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언딘 소속의 한 잠수사는 공기 주입기 고장으로 표류하다 구조됐으며 동료 잠수사는 혼자서 에어 주입 작업을 마치고 비상 급상승을 하면서 곧장 치료 챔버로 실려가야 했다. 현장은 살인적인 환경이었고 현장 밖에서는 살인적인 요구를 하는 상황이 지속됐다. 
  
  비슷한 시각, 팽목항에 나가있던 mbn 방송은 민간 잠수사를 사칭하는 홍가혜(26)라는 여성과의 인터뷰를 통해 “해경이 민간 잠수부들의 구조작업을 막고 대충 시간이나 때우라고 한다.”면서 “다른 잠수사가(배 안에서) 생존자를 확인하고 소리까지 들었다”는 주장을 아무런 검증 없이 내보냈다. 낮 12시에 mbn 보도본부장이 사과방송을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됐다. 현장 해역에 나가있던 해경은 일부 민간 잠수사들과 허언증세를 보이는 한 여성에 의해 ‘죽일 놈’이 되고 있었다.
  
  이들의 언론플레이로 해경을 향한 언론과 방송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세월호가 침몰할 때도 해경은 구경만 했다” “해경은 뭘 했나”로 변해 갔다. 172명의 구조를 두고 “그냥 배에서 걸어나온 사람들을 태운 것뿐”이라고도 했다. 동시에 청해진 해운과 해경을 연결시키는 미확인 추측성 보도들이 난무했다. 과거에 구원파 신도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정보수사국장이 연행됐다. 법적으로 유치장에 수감할 수 없는 상황의 이준석 선장을 해경 직원의 집에서 재웠다는 이유만으로 해경 관계자들이 곤욕을 치렀다. 
  
  세월호의 침몰과 아무런 관련이 없던 진도 VTS는 거의 초토화됐다.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해 80여명의 승객을 구조한 P123정 정장은 그 후 수사기관의 조사를 수십 차례나 받았다. (지난 8월 초 목포항에서 그를 만났을 때 33년간 배를 타며 해경으로 자부심을 갖고 살아온 늙은 수병은 너무 지쳐 있었다. 진실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서 이미 그는 자포자기하는 상태가 돼 있었다.) 
  
  세월호와 관련된 부패와 비리 혐의는 거의 모두 해경이 뒤집어써야 했다. 구조실패와 더불어 해경은 ‘부패’, ‘비리’, ‘무능’의 표상이 됐다. 그럴수록 현장을 책임진 해경은 무모한 희생을 막고자 통제를 계속하면서 잠수 수색작업을 진행해 왔고 언론과 방송은 쉬지 않고 해경을 집단구타해 왔다. 마치 누가 해경을 더 잘 때리나 경쟁하는 듯했다.
  
  흔히 ‘경쟁’은 조직의 부패를 막고 건강한 시스템을 유지하는 첩경이며 ‘市場’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惡貨(악화)를 驅逐(구축)해 몰아낸다고 한다. 그런데 선정성과 시청률의 경쟁에 몰입한 우리나라의 방송과 언론을 보면 市場經濟의 이론은 들어맞지 않는다. 그들은 선정성과 시청률에 도움이 되면 진실과 거짓의 분별을 두지 않았다. 惡貨가 良貨(양화)를 구축하는 것이다.
  
  5월19일, 대통령은 ‘관피아’라는 속어까지 동원해 가며 ‘해경의 구조 실패’를 단언했다. 그리고 ‘해경의 해체’를 선언했다. 어떤 언론도 해경을 제대로 취재한 적이 없었다. 해경의 신음소리에 귀 기울여주지도 않았다. 그리고 추석이 다가오는 지금도 해경은 바다 위에서 잠수 수색을 계속하는 중이다. 그들의 생활, 그들의 수색 작업을 탐사해 보았다. 
    
  <公益(공익)이 私益 앞에 무릎을 꿇다>
  
  2014년 4월18일 오후 11시23분경. 船首(선수) 바닥을 돌고래 주둥이처럼 물 밖으로 내민 채 가라앉았던 세월호가 마지막 기포를 내뿜으며 해저로 사라져갔다. 잠수 수색대는 다음 날부터 세월호 선체로 접근해 수색과 시신 인양작업을 시작해 현재까지 4개월여를 계속해 오고 있다. 시작할 때는 봄이었는데 계절은 여름을 지나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세월호가 드러누운 해저는 視界(시계) 20cm~5m 내외. 수온 11~15도. 조류 0.2~5.7노트 이상의 환경이다. 깜깜하고 매우 추운 바다 속. 조류가 강할 때는 사람을 연 날리듯 해버리는 바닥 수심 47m 내외. 잠수사가 받는 수압은 대기압 포함 6기압에 달한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분노에 찬 실종자 가족들의 “하면 되는데, 왜 못하나”라는 항의를 잠재울 수가 없다. 더구나 대통령에 의해 ‘구조에 실패한 해경’으로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버린 이상, 수색구조 전반을 지휘하는 해경 입장에서는 단순히 “어렵다”는 말이나 “해양 선진국도 못 한다”는 각종 사례로도 잠수 수색을 거부할 수 없는 지경으로 내몰렸다. 공공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경찰이 집단화된 유가족들의 복수심에 밀리고 있었다. 공익이 사익에 무릎을 꿇어버린 것이다. 
  
  사고 해역에서 잠수 수색 작업을 하려면 바지선이 필요하다. 사고 현장에서 최근거리인 목포항에서 출발한 금호수중 2003호 바지선이 현장 해역에 도착한 시각은 4월19일 오전 8시경. 이때부터 해경 경비안전국(이춘재 국장)이 중심이 되고 해경 특수구조단, 해군 SSU와 UDT, 119 중앙구조단 잠수팀, 그리고 민간 잠수 구난업체의 산업 잠수사 등 170여 명이 모여 들었다. 대한민국 잠수 베테랑들이 이곳에 전부 모여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을 맞이한 병풍도 앞바다의 조류는 파도가 없더라도 장마철 개울물처럼 소리 내며 흐른다. 한밤중에 선상 갑판에서 파도도 없는 바닷물이 콸콸 소리내며 흘러가는 모습을 처음 본 기자는 경악했었다. 지구촌의 어느 잠수 대원도 1노트 이상의 바다에는 들어가지 않는 법이다. 하물며 5노트 이상 나오는 이 바다를 마주 하고 그들이 섰을 때, 그들 뒤에서는 응원이나 격려가 아니라 성토와 비난의 폭풍이 몰아치며 그들의 등을 떠밀었다. 그들은 우리 국민이 아니었는가.
   
  <“잠수도 안하면서 조명탄 쏘는 쇼를 한다”>
    
  한 발을 쏘면 4분 정도 빛을 밝히다 꺼져버리는 단가 150만 원짜리 군용 조명탄을 사고가 발생한 첫날 밤에만 669발이나 쏘아댔다. 밤새 선체에 진입할 수 있는 기회는 단 두 번뿐이지만 조명탄은 해가 뜰 때까지 하늘을 밝혔다. 다음날에도 안개가 끼어 아무 소용없었지만 유가족이 ‘당국은 뭘하나’라는 질책이 두려워 342발을 퍼부었다. 그 다음부터 776발, 885발, 887발…채낚기 어선의 조명으로 완전 대체된 5월27일까지 41일 동안 세월호 해역에는 밤마다 戰時(전시) 비축물자로 저장해 둔 군용 조명탄을 아낌없이 쏘아댔다. 
  
  •   국회 국방위 자료 가운데 기관별 조명탄 소모 현황을 보면 현재까지 세월호 사고 현장에서 사용된 조명탄은 1만3204발이라고 한다(이중 882발은 불발). 사용예산만 198억600만 원을 하늘에 퍼부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당장 욕을 듣지 않아도 좋을 사람들 일부만 만족했을 것이다. 당장 선거에 도움이 될성싶은 사람들만 만족했을 것이다. 수심 30m가 넘으면 햇빛도 투과되지 않아 별무소용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설명하지 않았다. 솔직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한 법인데 정치인들 중 누구도 그런 용기를 갖지 못했다. 그로써 조명탄이 수놓은 밤하늘 장면을 두고 블로거들은 “잠수도 안하면서 조명탄 쏘는 쇼를 한다”고 비아냥거렸다. 별 도움 안 되는 조명탄으로 밤을 밝힌 세월호의 해역은 그렇게 해서 제복을 입은 것 자체가 죄인이 되는 해역이었다. 
      
      현재는 더 이상 조명탄을 사용하지 않는 대신 밤이 되면 채낚기 어선 10여대가 해역을 둘러싼 채 잠실벌의 야구장처럼 등불을 켠다. 10명의 실종자 시신 수색을 위해 군용 함정과 민간 어선 등 100여 척이 매일 밤 동원되며 이 모든 경비가 매일 밤 대략 5억 5000여 만 원의 세금으로 바다에 퍼부어지는 중이다. 언제 끝날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