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내전(內戰)이다

    가을의 초입에서 전쟁을 되씹다
    이 덕 기 / 자유기고가

      “이범균 판사를 찾아내서 죽일 거야”
      이른바 ‘국정원 댓글 사건’으로 재판에 넘겨진 전(前)국정원장에 대한
    1심 법원의 판결이 끝나자 나왔다는 ‘진보 성향’ 방청객들의 말이란다.
    모 조간신문 기사에는 (진보 성향 방청객들이)“보수 성향 방청객과 충돌도” 등의
    중간제목도 보인다.
    그 기사를 쓴 기자도 한심스럽다.
    그 공판 방청객들을 ‘진보’·‘보수’로 구분하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내전(內戰)이란 “일반적으로 하나의 국가 영역 내에서의 합법정부와 반란단체 또는 혁명·독립의 운동단체(때로는 반란단체) 간에 그 국가의 지배권력 또는 분리 독립을 둘러싸고 일어난 무력분쟁을 가리킨다”고 정의한단다.
    수년전부터 흔히 봐 온 그림이지만, 위의 공판 기사를 접하고 나니,
    문득 이제 본격적인 내전(內戰)이구나 하는 확신이 든다.
    물론 아직 ‘무력분쟁(武力紛爭)’은 아니지 라고 자위(自慰)도 해 보지만,
    ‘무력(武力)’보다 더한 것도 무기로 하여 싸워오고 있지 않는가.

  • ‘개혁적 보수’, ‘합리적 진보’라는 말은 이미 쓰레기통에서 냄새만을 풍기고 있을 뿐이다.
    단지 1948년 8월 15일 건국된 자유 대한민국 및 그 세력을 한편으로 하고,
    각계각층에 침투한 반(反)대한민국세력, 즉 북한 세습독재 정권의 지원을 받아
    그를 추종하고 또는 그에 굴복하여 대한민국 존립을 치명적으로 위협하는 무리들,
    그리고 그를 보호·응원하는 정치집단을 또 다른 한편으로 하는 전쟁이 진행되고 있을 뿐이다.

    그 중간에 소위 ‘중립’을 표방하는 기회주의자들이 엄청 많지만,
    그들은 결국 반(反)대한민국 세력의 역량(力量) 차용(借用) 대상,
    통일전선의 먹잇감이기 십상일 뿐이다.

      근간에 법(法)을 가지고 지적(知的) 유희(遊戱)를 즐기는 ‘쓸모있는 얼간이’들이
    일각에서 자유 대한민국을 희롱(戱弄)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법부는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를 지키는 최후의 심판자이자 파수꾼이다.
    그래서 좀 불편한 점이 있어도 믿고 기대는 것이다.
    그런데 판결의 결과가 자신들 패거리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해당 판사에 대해 “끝까지 쫓아가서 암살할 것”이라고 공공연히 소리치고,
    그것을 들은 공권력은 아무런 법적 제재를 가할 수 없다면
    바로 이 상태가 내전(內戰) 아닌가.

  •   본격적인 가을로 접어드는 9월은 전쟁을 떠올리게 하는 달이다.
    9년 전 이즈음의 묵은 신문을 들척이면,
    “15일 인천상륙작전이 55주년을 맞은 가운데 맥아더 동상 철거 논란을 둘러싼
    우리사회의 이념갈등이 위험수위를 넘고 있다... 이번 논란의 발단은
    지난 7월17일 우리민족연방제통일추진회의 등 일부 좌익단체가 맥아더 장군 동상이 있는 인천 북성동 자유공원에서 동상 철거집회를 개최하면서 시작됐다.
    이들은 『맥아더는 우리나라를 분단시킨 점령군 사령관』
    『국민들이 양키에게 속아서 거짓된 현대사를 배우고 가르쳐 왔다』 등의 주장을 펼쳤다.
    재향군인회·이북5도민연합회 등 우익단체 회원들은 이들을 ‘빨갱이’로 규정하며
    진출을 가로막았다...(매일경제 2005. 9. 15)”는 기사가 나온다.

  •   물론 거슬러 올라가 1950년 9월 15일은 동족 수백만을 희생시킨 남침전쟁이 발발한 지
    80여 일만에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날이다.
    그로부터 13일 만인 9월 28일, 적(敵)에게 내줬던 서울이 수복된다.
    하지만 현재 자유 대한민국 세력을 자처하는 이들 중에
    이 일들을 기억·기념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하지만 천추(千秋)의 한(恨)을 품고 맥아더를 이른바 ‘조국해방전쟁을 그르친 원흉(元兇)’으로
    기억하는 세력이 있다.

      결국 내전(內戰)은 6월의 남침전쟁, 그리고 그해 9월의 의미를 잊어 가고 있는 이들과
    ‘천추(千秋)의 한(恨)을 품은’ 전범(戰犯)의 후예들 및 그 언저리 세력 간의 전쟁이다.
    ‘잊는 자’와 ‘기억하는 자’, 과연 누가 이길까?

      1950년 6월 북한 공산집단의 남침전쟁으로 우리는 3일 만에 서울을 잃었다.
    6월 28일 적(敵)에게 점령당할 당시 서울 시민 144만 6천여 명 중 40만여 명이 서울을 떠났다고 한다. 대부분이 공무원·경찰 및 가족, 군인 가족(군인들은 전쟁터에 나가 있었다),
    그리고 김일성 치하를 피해 월남(越南)했던 이북(以北) 출신들 이었다.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에 이어 국군과 유엔군의 진격으로 통일을 눈앞에 두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서울을 적(敵)에게 내주게 된다.
    1·4후퇴다. 이때는 서울 시민 126만 7천여 명이 서울을 떠났고,
    노약자와 환자 그리고 ‘바닥 빨갱이’를 포함한 20만 명 정도만 잔류했다고 한다.
    적(敵) 치하 90일 간의 사정이 어떠했는지를 웅변(雄辯)하는 것이다.
    이때의 정황을 어떤 이는 이렇게 표현했다.

      “...인민군 점령하의 3개월은 북한 체제의 현실을 깨닫게 한 값비싼 체험이 되었다.
    경찰의 몽둥이로도, 부모의 눈물로도 어쩔 수 없던 ‘좌익소아병’에서 수많은 지식인·젊은이들이 이때 벗어났다...”

      악명 높은 나치의 아우슈비츠(Auschwitz) 수용소 벽(壁)에는 유대인들이 피로 쓴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된다”는 글이 남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의 1950년 9월 이야기는 역사도 아니다.
    그 시절을 겪은 이들이 아직도 많이 생존해 있다. 현실인 것이다.
    현실의 체험조차도 잊어버린다면 무슨 미래의 희망이 있겠는가.
    물론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는 싸움에서의 결과도 바로 답이 나온다.

      우리도 ‘천추(千秋)의 한(恨)’을 품어야 한다.
    자유통일을 눈앞에서 날려버린 1951년의 한(恨)을 가슴에 옹골차게 품어야 한다.
    그래야 그나마 현재의 내전(內戰)에서 이길 수 있거나, 아니면 게임이라도 되지 않겠는가.
    <더  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