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적(利敵)단체 범민련의 국내-해외 '조직체계'

    범민련 해외본부는 1992년 1월 베를린에서 동경으로 조직을 이전

    김필재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利敵단체)은 국보법 철폐, 주한미군철수, 연방제 통일 등 북한의 對南노선을 추종해온 단체이다. 
  
  범민련은 1990년 5월 김일성이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을 통해 “연방제 통일을 위한 전 민족 통일전선을 형성하라”고 지시한데 따라 결성됐다.
  
  이후 범민련은 1990년 8월15일 개최된 제1차 범민족대회 당시 남한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던 소설가 H씨가 기조보고를 통해 범민족대회를 계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상설기구의 설치를 제안하고, 이를 곽동의와 XXX이 지지하는 형식으로 기구결성에 합의해 발족됐다.
  
  제1차 범민족대회 이후 범민족대회(남·북·해외) 공동위원회는 1990년 8월19일 평양 고려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여기서 범민련 결성과 구체적인 조직구성 내용을 발표했다. 
  
  북한의 <중앙방송> 및 <평양방송>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당시 기자회견에서 첫 발언자로 나섰던 XXX은 범민련이 자신의 제안과 해외 대표인 곽동의의 재청 및 북쪽 윤기복 범민족대회 준비위원장의 동의로 결성되게 되었다고 밝혔다.
  
  당시 기자회견에서는 각 기구의 책임자 명단도 발표됐다. 
  
  공동의장에 허담, 윤기복, 장철, 여연구, 정규명, 곽동의, 김성, 이철재, 서만술, 이행우(해외 측) 등이, 중앙위원에는 윤기복, 염태준, 전금철, 등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우원회(조평통), 조국통일전선(조국전선)을 비롯한 북한의 對南공작 기관 산하조직 간부들과 민주민족통일해외한국인연합(한민련),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 등 해외 親北조직 관계자들이 선출됐다. 
  
  범민련 해외본부는 1990년 12월16일 독일의 베를린에서 발족됐으며 在獨(재독)음악가 윤이상이 초대 의장을 맡았다. 윤이상은 동양의 정신을 서양의 악기로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20세기 5대 작곡가로 꼽혔던 인물이다. 
  
  그러나 윤이상은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동백림 사건은 당시 유럽에 유학했던 유학생 등을 중심으로 동백림(동베를린) 주재 북한대사관과 북한을 왕래하며 벌어진 공안사건이었다. 윤이상은 동백림 사건 이후에도 1995년 11월 사망 시까지 북한을 계속 오가며 활동했다. 민건회(민주사회 건설협의회) 회장, 한민련(민족민주통일해외한국인연합) 구주본부의장, 한국학술연구원(KOFO) 원장, 유럽민협(재유럽민족민주운동협의회) 고문 등 직함도 다양했다. 
  
  범민련 해외본부는 1992년 1월 베를린에서 동경으로 조직을 이전시킨다. 
  
  이유는 한국 내 정보가 빠르고 지리적으로 가까운 일본에서 한통련 등을 활용해 보다 적극적인 반체제 활동을 벌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범민련 해외본부가 일본으로 옮겨진 1992년 이후 남한의 일부 정치인을 비롯한 반체제 세력의 일본 내왕이 잦아졌다. 
   
  남한에서는 1991년 1월23일 범민련 남측본부 결성준비위가 서울 향린교회에서 개최됐다. 
  
  당시 결성준비위에는 XXX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공동의장, XXX 서울민협 의장, XXX 신부 등 준비위원 50여명이 참석했으며, 여기서 준비위원장(문익환)과 집행위원장이 선출됐다. 
  
  준비위는 발족선언문을 통해 남한본부를 조속히 결성, 그해 6월과 8월에 서울에서 각각 열리는 아시아-한반도의 평화와 비핵지대화를 위한 국제회의와 1991년 서울범민족대회를 차질없이 치르기로 했다. 그러나 경찰은 이날 전경 1개 소대를 보내 준비위 발족식에 참석하려던 문익환 목사를 자택 연금했다. 
  
  경찰은 또 준비위 간부 XXX과 XXX, XXX, XXX 등 4명에 대해 국보법 위반(이적단체 구성 및 회합)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을 발부받아 이창복과 김희택을 구속수감했다. 
  
  이후 범민련 남측본부 준비위 집행위원 홍근수와 준비위원 XXX과 XXX, 그리고 준비위 부위원장 XXX도 구석되거나 영장이 발부됐다. 
  
  이듬해 2월과 3월에는 남측본부 준비위의 실행위원 XXX와 XXX이 구속됐다. XXX과 XXX은 나중에 징역 2년6월을 선고받았다. 당시 정부가 이처럼 강경책으로 나간 것은 범민족대회 추진본부가 임시기구인데 반해 범민련 남측본부는 20~40명의 의장단과 120명의 중앙위원, 정책실 사무국 등 방대한 조직과 체계를 가진 상설기구로 결성할 예정이어서 이를 방치할 경우 상당한 파급력을 가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범민련 남측본부 구성이 공안당국에 봉쇄되고 있는 동안 북한은 1991년 1월25일 黨비서 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부위원장인 윤기복을 의장으로, 백인준(문예총 위원장), 여연구(조국전선 의장), 김영호(사민당부위원장), 전금철(조평통 부위원장), 한시해(조평통 서기국장), 백남준(조국전선 서기국장) 등 12명을 부위원장으로, 그리고 강영섭(기독교도연맹위원장) 등 40명을 중앙위원으로 선출, 범민련 북측본부를 구성했다. 
  
  범민련 북측본부는 결성5주년을 맞은 1996년 1월25일 평양에서 중앙위원회 총회를 열고 남한의 국가보안법 철폐투쟁 등 1996년도 5대 투쟁과업을 제시하고 일부 의장단과 중앙위원을 補選(보선)했다. 
  
  현재 범민련의 중앙조직은 북한의 통일전선부에서 직접 관장하는 범민련 북측본부를 중심으로 남측본부 및 해외본부가 연결되어 있고, 각 본부 간 연락을 담당하고 범민련을 대변하는 기구로서 범민련 공동사무국이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동사무국의 실제 운영은 조총련계 인사인 朴勇(박용)이 맡고 있다. 박용은 1972년 조총련에 가입 후 1983년 북한의 지령을 받아 대남공작을 전담 수행하는 부서인 조총련 중앙본부 정치국 지도원으로 발탁된 후 1983년부터 범민련 해외본부 사무차장, 1999년부터 범민련 공동사무국 사무부총장 등으로 활동하며 남·북·해외 3자간 통신연락을 전담했다.
  
  김필재(조갑제닷컴) spooner1@hanmail.net
  
  범민련, 김정일 사망에 "슬픈마음 금할 수 없어(?)"
  2011년 12월20일자 보도
  
   이적(利敵)단체 ‘범민련남측본부’(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는 19일 김정일 사망과 관련, 조전(弔電)의 형태를 빌어 “서거하셨다는 비보를 접하고 슬픈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라며 북한 동포 3백만을 굶겨 죽인 독재자에게 극도의 예우를 갖춰 애도(?)를 표명했다.
  
  단체는 “오매불망 통일을 갈망하며 품어 온 동포애를 모두 모아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김정은 부위원장을 위시한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북측본부, 북녘조국의 인민들에게 삼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말했다. 
  
  단체는 독재자 김정일에 대해 “김일성 주석께서 민족자주정신과 민족애로 마련해 주신 조국통일3대헌장을 크게 빛내어주시고 우리 민족끼리 기치로 6.15통일시대를 활짝 열어 7천만 겨레의 전도에 크나 큰 업적을 남기셨습니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그 통일의 희망으로 사는 우리들로서는 이렇게 갑작스럽게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거소식을 접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덧붙였다. 단체는 이어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는 6.15공동선언, 10.4선언에 진감했던 남녘 우리 통일애국 민중의 이름으로 재차 큰 슬픔 담아 삼가 애도를 표합니다”라고 했다. 
  
  김필재(조갑제닷컴) spooner1@hanmail.net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