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장경제신문 71호 / 인보길의 역사 올레길<59>

    아내의 배신? 이승만 가출, YMCA 다락방으로...日에 쫓겨 ‘결별’

    이승만, 6년만의 금의환향(2)

    “저년을 네 여편네로 안다면 내자식 아니다” 아버지 선언
    며느리-시아버지 불화...온갖 소문에 ‘손자 병사’ 후유증도
    日총독부의 검거 선풍...아내에게 복숭아밭 사주고 망명길

  • ▲ 1904년 11월 미국에 밀사로 떠나기전 가족사진. 오른쪽부터 박씨 부인, 이승만, 아들 태산, 아버지 이경선 옹 (뒤에 서있는 소년은 조카).
    ▲ 1904년 11월 미국에 밀사로 떠나기전 가족사진. 오른쪽부터 박씨 부인, 이승만, 아들 태산, 아버지 이경선 옹 (뒤에 서있는 소년은 조카).

머나 먼 타향살이 6년만에 귀국길,
미국인들도 부러워하는 최고명문대학 박사학위를 받은
이승만이 서울에 돌아왔건만 그리던 아내는 어찌 되었는가.
남대문 정거장에서 기차를 내린 그를 마중 나온 것은 아버지 이경선옹 혼자 뿐,
당시 풍습대로 여자라서 못 나왔는가, 그것만은 아니었다.
그날 밤 이승만은 아버지로부터 얼마쯤 예상했던 폭탄선언을 들어야했다.

▶“네가 저 년을 여편네로 생각한다면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
역시 그렇구나! 그동안 미국에서도 간간이 들려오던 이상한 소문들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가 험하다느니,
부인이 생활방편으로 하숙을 치는데 외간남자와 눈이 맞았다느니,
그래서 시아버지를 더 구박한다느니--
믿고 싶지도 않았고 뜬 소문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이승만이 집에 가보니, 아버지와 아내는 동대문 밖(창신동) 낙산(駱山) 성벽 아래
법륜사(法輪寺) 밑동네에서 ‘박간난이’라는 하녀와 살고 있었다.
집 뒤의 골짜기엔 복숭아 밭이 이어져있었다.

산비탈 작은 집에 여장을 푼 이승만은 아버지와 지난 6년간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들은 미국 이야기, 아버지는 정세 변화와 집안 이야기,
특히 며느리 이야기를 봇물처럼 털어놓았다.

성격이 괄괄하고 당찬 아내, 박씨 부인은
공터에 채소도 심고 복숭아도 따다 팔면서 시아버지를 모시고 생활을 꾸려왔다지만,
74세 노령의 완고한 아버지와 사사건건 충돌할 것은 진작 예상했던 일이었다.
더구나 4년전 7대독자인 손자 태산(8세)을 시아버지 허락도 없이
미국 남편에게 보내어, 디프테리아로 죽게 만들었으니
후손이 끊어질 판에 며느리를 사람 취급할 리가 없었다. 
아내는 아내대로 쌓인 불만과 설움을 남편에게 터트리며 통곡하는 것이었다.

몇 날 몇 밤을 아버지와 아내 사이에서 시달리던 이승만은 마침내 집을 나오고 말았다.
조국 땅도 남의 땅이요, 그리던 집도 내 집이 아니었다. 갈 곳은 YMCA 회관뿐이었다.
벽돌건물3층 다락방에 세를 얻었다. 타향도 아닌 고향에서 또 독신생활이 시작된 것.
  • ▲ 1908년 종로에 신축된 서울YMCA 회관. 3층 벽돌건물 앞에 학생들이 줄지어 서있다.
    ▲ 1908년 종로에 신축된 서울YMCA 회관. 3층 벽돌건물 앞에 학생들이 줄지어 서있다.

  • ▶이승만이 결혼한 것은 16세때, 아버지의 주선에 따라
    한동네 살고 있는 동갑내기 처녀를 아내로 맞았다.
    6대독자 아들에게 운명을 건 아버지는 점을 쳐보니
    “장님한테 장가들어야 출세한다”는 점괘가 나왔다.
    상심하던 아버지는 오른쪽 눈가에 푸른 점이 박힌 이웃 박씨 처녀를 점찍었다.
    차마 눈먼 장님을 며느리로 맞을 수는 없기에 반점으로 ‘장님 점괘’를 때우려 했던 것. 
    총각 이승만은 점괘와 혼담을 듣자 너무 놀랐다.
    정말 장님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어 날마다 처녀 집 근처에 잠복했다고 한다.
    활달한 처녀는 일부러 얼씬도 안하다가 ‘볼 테면 보라지’ 물동이를 이고 우물로 나가자
    이웃 총각 이승만이 얼굴을 확인하고 도망치는 것이었다.

    ▶이승만이 아들을 낳은 것은 18세때, 환갑을 앞둔 이경선옹은 동네 잔치를 벌였다.
    다음해 배재학당에 들어간 뒤로 이승만은 아이를 두지 못했다.
     새로운 서양세계에 눈을 뜬 뒤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버린 이승만,
    협성회 토론, 독립협회 독립신문, 만민공동회, 일간신문을 2개나 창간,
    국가개조와 독립운동에 올인한 20대청년 혁명가는 아내를 만나는 시간도 아까웠던가.
  • ▲ 사형수 24세 이승만,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한성감옥에서 복역할때 모습.
    ▲ 사형수 24세 이승만,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한성감옥에서 복역할때 모습.
  • 급기야 대역죄로 투옥되어 사형 소문이 나자 부인 박씨는 남편의 구명운동에 나섰다.
    직접 상소문을 써 들고 경운궁 인화문(仁化門: 당시 정문)앞에 엎드려 꼬박 이틀동안 통곡했다. 황성신문은 “부인이 남편을 위하야 상소하는 뜻은 뉘 장하다 아니하리오”라고 보도했다.
    왕궁 경찰이 안쓰럽다는 듯 부인을 달랬다.
    “여기서 백날 그래봤자 소용없소. 중추원으로 가시오.”
    고종황제에게 상소할 수 없자 부인은 법부(法部)에 “남편을 조속히 재판하여 달라”고 청원하고, 중추원에 “조속 판결 석방해 달라”고 탄원서를 올렸으나 그마저 거부당했다.

    ▶부인의 구명운동 덕분일까, 재판에서 이승만은 사형을 면하고 종신형을 언도받았다.
    한성감옥에 감옥학교, 감옥 교회, 감옥도서관, 신문논설 집필, 영한사전 편찬, 외국도서 번역등등 눈코 뜰 새 없이 보냈던 이승만은 일찍이 천재적 문재로 한시(漢詩)도 많이 남겼는데,
    아버지와 아들을 그리는 작품과 아내를 연모하는 <임생각(懷人)>도 애절하게 써 놓았다.

    당신 그리워(懷人)

    규방의 세월일랑 빨리 흐르게 하지마라
    짝 잃은 새는 잠 못 이루어 달 밝은 밤인데
    먼 고향의 가을 싣고 돌아가는 기러기
    늘 그립고 괴로울때 채련곡을 노래하고
    몇 번인가 버들 잎 새로운 누각에 올랐다가 시름만 더해
    물어보노라 타향살이는 이렇게 초라한 것인가
    이별의 한이란 사람으로 거두어들이지 못할 어려움.
    [이승만 한시선漢詩選]--배재대학 출판부, 이수웅 번역 2007--

    암팡진 성격의 아내였지만 이승만이 미국유학 갈 때까지는 금슬이 좋았던 모양이다.
    박씨 부인은 언젠가 “우리 내외는 혼인 후에 한번도 싸운 적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 ▲ 1900년 경인선 철도의 종착역 ‘남대문 정거장’의 옛 모습. 위치는 남대문과 서대문 사이, 이화여고 신관 정문 앞쯤이다. 1900년 한강철교 개통에 따라 용산역과 남대문역이 설치되었고, 1905년 경부선 개통때 지금의 서울역을 건축하고, 남대문 역은 몇 년후 철거되었다.
    ▲ 1900년 경인선 철도의 종착역 ‘남대문 정거장’의 옛 모습. 위치는 남대문과 서대문 사이, 이화여고 신관 정문 앞쯤이다. 1900년 한강철교 개통에 따라 용산역과 남대문역이 설치되었고, 1905년 경부선 개통때 지금의 서울역을 건축하고, 남대문 역은 몇 년후 철거되었다.

  • ▶드디어 또 이별의 시간이 닥쳐왔다.
    이것이 아버지와도 아내와도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일본 총독지배 직후부터 기독교운동에 헌신했던 이승만은
    <총독 암살음모>라는 조작극을 내세운 총독부의 검거선풍에 주모자로 걸려들었다.

    이른바 ‘105인 사건’이다.
    YMCA국제위원회의 주선으로 황급히 출국해야 했던 이승만은
    고종사촌한테서 200원을 받아 부인에게 복숭아밭을 사주었다.
    사실상의 이혼이 된 셈이다(이때 법적이혼제도는 없었다).
    "6개월뒤 돌아오마"고 6개월짜리 여권을 받은 이승만이 남대문역을 떠난 것이
    1912년 3월26일, 서른 일골살 생일날이었다.
    이후 59세에 25살 아래 프란체스카와 결혼할 때까지
    22년간 이승만은 독신으로 독립투쟁에 몸을 던진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