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규 선생 '일제의 침략성 폭로, 대한인의 자주독립 의지 만천하에 알려'
  • ▲ 강우규 선생의 동상.ⓒ보훈처
    ▲ 강우규 선생의 동상.ⓒ보훈처

    국가보훈처는 '왈우(曰愚) 강우규의사 의거 95주년 기념식'이 9월 2일 오전 11시 구 서울역 광장에서 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회장 강인섭) 주관으로 열린다고 밝혔다.

    강우규의사는 1919년 9월 2일, 당시 남대문 정거장이었던 구 서울역 광장에서 제3대 총독으로 부임하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일행을 향해 폭탄을 투척해 일제의 침략성을 폭로하고 대한인의 자주독립 의지를 만천하에 알린 독립유공자이다.

    이날 행사는 안중현 서울지방보훈청장, 기념사업회원, 시민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사업회장의 인사말 및 경과보고, 서울지방보훈청장을 비롯한 참석 내빈의 기념사 순으로 진행된다. 

    강우규 의사

    선생은 평남 덕천에서 출생했으며, 1910년 경술국치 후 북간도 두도구(頭道溝), 길림, 시베리아, 연해주 등지를 떠돌다 길림성 요하현(遼河縣)에 광동(光東)학교를 설립해 민족교육을 통한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1919년 3ㆍ1 독립운동에 호응해 만주, 노령 등지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고, 그 해 5월 노령의 노인동맹단(老人同盟團)에 참여해 조선 총독을 폭살시킬 계획을 품고 폭탄을 구입, 허형(許炯)과 같이 원산을 거쳐 8월 5일 목적지인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 안국동 김종호(金鍾鎬)의 집에서 숙식하면서 신임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의 사진과 부임 정보를 입수하고, 9월 2일 남대문정거장에 나가 신임 총독 일행이 마차를 타려는 순간 폭탄을 투척했다. 일경 스에히로(末弘又三郞)가 사망하는 등 37명이 부상했으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신임 총독 폭살에는 실패했다.

    비록 의거는 실패했으나 이는 을사늑약이 우리 민족이 원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세계 여론을 기만하던 일제의 흉계를 전 세계에 폭로하고 대한인의 자주독립 의지를 천명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9월 17일 사직동에서 일제의 앞잡이 김태석(金泰錫)에게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았다.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될 때, 일제 검사가 “감상이 어떠냐?”고 묻자 “단두대상 유재춘풍 유신무국 기무감상(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 단두대 위에 홀로 서니 봄바람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어도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라 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정부는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