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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학사 발행, 고교 한국사 교과서 표지.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언제 건국되었다는 말인가
역사학계의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다고 하는 데는 대한민국이 1948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1919년 상해에서 세워졌다는 생각이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았나 한다. 그러한 생각은 ‘1919년 건국설’로 불릴 수 있는 독특한 역사 해석에서 오는 것으로 보는 데, 그것을 주장한다고 생각되는 몇몇 역사가들의 글을 읽어 보면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분명하게 주장하는 것 같지는 않다.
무리가 따르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이 아닌 임시정부, 광복운동과 관련된 단체들의 세미나 행사 가운데는 “대한민국은 1919년에 건국되었다”는 대담한 제목들이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1919년 건국설’이 있어서 역사교육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면,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하게 된다.
대한민국이 1919년에 상해에서 건국되었다면 나라가 세워졌는데 독립운동은 왜 필요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토·국민·주권과 국제적 승인도 없는 임시정부의 출현을 건국으로 본다면 도대체 국가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것들 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대한민국이란 국호(國號)에 관한 것이다. 1948년 7월에 제헌국회에서 정해진 대한민국이란 국호는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한민국이란 국호와 전혀 다른 근거에서 붙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1948년 당시 국회 헌법기초위원회는 임시정부의 국호를 그대로 갖다가 쓴 것이 아니라 몇 가지 명칭을 놓고 논란을 벌이다가 투표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투표 결과는 대한민국 17표, 고려공화국 7표, 조선공화국 2표, 한국 1표였다.
따라서 그 당시 대한민국의 국호는 임시정부의 대한민국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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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중경에 남아있는 임시정부 청사. 고층아파트와 주택가에 끼여있다.
국가의 정체성 혼란을 가중시킨
1987년의 개정헌법 전문(前文)
이와 같은 불합리한 주장이 사회적으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데는 1987년 ‘6·29선언’의 여파로 이루어진 제9차 헌법 개정과 관련이 있다. 1948년에서 1987년에 이르는 사이에 대한민국 헌법의 전문(前文)은 다음과 같이 바뀌었는 데, 그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1948년의 건국헌법 전문>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 . . .”
<1987년의 현행헌법 전문>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 . . . ”
위에서 보는 것처럼 대한민국은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한 데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국가적 성격을 크게 바꿀 수 있는 중대한 변화였다. 왜냐하면 중경 임시정부는 김구의 우파와 김원봉의 좌파로 이루어진 좌우합작(左右合作) 정부이므로 그것을 계승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좌우합작 국가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금지한 국가보안법(國家保安法)도 폐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수게 된다.
실제로 그러한 위험성은 벌써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해방 직후 목숨을 바쳐 건국에 헌신했던 서북청년회 등의 건국 세력들에게는 건국공로 훈장이 주어지지 않았지만, 임시정부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공산주의 성향의 사람들이 건국공로자로 예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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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년 모스크바 공산대학 유학시절의 공산주의자 박헌영과 주세죽 부부. 대한민국 노무현 정부는 지난 2007년 3월 88주년 3·1절을 맞아 주세죽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1987년의 헌법 개정 당시 그와 같은 위험성을 인식하지 못한 몇몇 주요 인사들의 행동은 유감이었다. 당시 헌법 개정 대표위원회는 민정당의 노태우 대표를 위원장으로, 민정당의 이종찬 의원을 여당대표로, 신민당의 이중재 의원을 야당대표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그들을 그러한 방향으로 설득한 역사가는 김준엽 전(前) 고려대 총장이었다.
<김준엽, 『석린 민필호 전』(나남출판, 1995) p.39>
민족주의와 남북협상의 명분이
대한민국을 위기에 몰아넣고 있다
이러한 사태가 일어나게 된 것은 민족주의의 명분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왔기 때문이다.
일제시대에는 독립의 과업, 해방 후에는 통일의 과업이 지상과제가 되다 보니, 사회가 온통 민족지상주의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그것은 좌익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다. ‘민족’과 ‘민족주의’를 내세우게 되면 구태여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말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 말 속에는 북한인과 그들의 전체주의(全體主義) 체제가 자동적으로 포함되기 때문이다. 피해는 고스란히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그동안 “국가와 민족”에 대한 충성이란 구호를 너무 무책임하게 사용해 왔다. 그 말에는 북한인과 북한국가에 대한 충성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국가와 그 국민을 의미하는 “국가와 국민”으로 바꾸어 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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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8년 5월 31일 대한민국 국회 개원식 날 국회 의사당 앞에서 소련군 철수 촉구 집회를 벌이는 서북청년회원들
<한국사>교과서는 국민주의 사관에서
교육부가 펴내는 국정(國定)이 되어야
이러한 이념적 혼란 속에서 우리에게 분명히 남아 있는 실체는 대한민국의 국가주의(國家主義)와 국민주의(國民主義)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국민교육은 그것을 토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역사교육은 추상적인 민족주의 사관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에 남북협상·통일·좌우합작과 같은 비현실적인 구호들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2014년 3월부터 고등학교에 배포된 8종의 새로운 <한국사 교과서> 가운데서 유일하게 교학사(敎學社)의 <한국사>만이 대한민국의 국가적 정체성을 보다 더 뚜렷이 표명했지만, 그 교과서는 일선 고등학교에서 채택되는 데 실패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역사전쟁(歷史戰爭)에서 대한민국을 지킬 세력은 정부, 즉 교육부뿐이다. 대한민국의 역사교육을 검인정제도라는 이름으로 필자들이나 출판사들의 자의적인 해석에 맡기는 것은 적군이 쳐들어오는 데도 정부와 군대는 중립을 지킨다고 가만있으면서 의병(義兵)보고 막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교육부가 직접 나서서 단 하나의 통일된 <한국사 교과서>를 제작하는 국정(國定) 제도로 되돌아가야 한다. <한국사> 교과서는 단순한 교과목의 하나가 아니라 국민의식을 일깨우고 애국심을 고취하는 국민교육(國民敎育) 수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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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1) 이주영, “역사전쟁에서 우군을 갖지 못한 대한민국”, <자유의 위기>(조갑제닷컴, 2012); (2) <대한민국 교과서가 아니다>(조갑제닷컴,2014); (3) 이주영,<대한민국의 건국과정>(건국이념보급회,2013); (4) 이주영 엮음,《대한민국은 왜 건국을 기념하지 않는가》(뉴데일리, 2011); (5) 김길자·김효선 엮음, <건국을 기념하지 않는 나라 대한민국> (옥계출판사, 2013).
<월간 [충호] 2014년 8월호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