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창석(金昌石, 21년생, 서귀포시 안덕면 감산리)
    2012. 11. 13.  증언

    김창석은 4년제 안덕초교를 13살 때 졸업(4회)했다. 그의 아버지 김수생은 그가 갓 났을 때 일본으로 갔다가 6살 때 잠시 귀국 후 일본으로 다시 갔고 북해도에서 3년여 징용하다 해방 후 귀국했다. 그에게는 행운일까 일제 때 경방단원이 됐고 1면당 1명을 뽑는 농업요원으로 선발됐다.

    당시 남자는 징용이나 징병을 갔으나 그는 남자의 빈자리를 채우는 농업요원이 된 것. 소를 가지고 가 밭을 갈아주고 씨를 뿌려 주는 농업지도원 역할도 했다. 대가는 하루 밭갈이를 해주면 여자가 3일간 김을 매주거나 수확을 도와주는 식이다.

    그래서 그는 징용도 징병도 면제받았다.

    안덕면의 47년 3‧ 1절 행사는 창천의 장진봉, 화순의 고만규, 박갑길, 감산의 김인하(26) 등이 주도했다. 후일 폭도로 입산한 동동네 강상호(26), 강완호(21) 등 감산 청년 10여 명이 참가했었고 그도 참석했었다.

    300여 가구의 감산리는 청년이 30여명이 넘었다. 일제 때는 감산리 독서회가 조직되어 항일 의지를 심었었다. 김창석도 독서회 회원이었었다. 김인하 등이 그에게 남로당 가입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김인하의 작은 아버지 김보순(전 대정지서 주임 등)은 경찰 간부이고 김보순의 동생 김보근도 경찰관이었다. 조카와 삼촌사이 사상이 너무 달랐다.

    김인하는 경찰 간부인 작은 아버지까지 설득하려든 골수 남로당원이었다. 그러나 김창석은 김인하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가 거부하게 된 것은 해방 후 얼마 없어 이북으로 간 독서회의 지도자였던 임00가 “공산주의는 잘못됐다. 나쁜 것이다. 우리나라는 덴마크 같은 나라가 돼야 한다”고 일깨워 준 탓이다.

    임00는 안덕면사무소 임시 서기도 했다. 김창석은 “1살 망아지의 갈기가 어느 쪽(좌우)으로 눕느냐는 아무도 모른다. 남로당의 이상이란 말들은 모두가 거짓말 같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남로당에 가입 안 한 이유를 강조했다.

    감산리에서는 4‧ 3이전 임00를 비롯 월북한 청년이 많다. 강00(23), 강00(20), 고00, 강00의 아들 형제, 양00(일명 00, 35), 양00(일명 00, 23) 형제 등 8명에 이른다. 일시에 간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간 것으로 알고 있다. 4‧ 3 희생자 명단에 오른 임00, 강00, 강00와, 양00, 양00 형제는 4‧ 3과 무관한 인물이다. 고00(16)의 경우도 4‧ 3전에 일본에 가 고향에 온 적이 없다. 고00도 4‧ 3과 관계가 없다.

    양00은 한학에 조예가 깊어 서당의 사장도 하다 의대를 나와 의학박사가 됐다. 이후 제주에 온 적은 없고 동생 양00는 제주에 살다 형이 살고 있는 서울로 갔다가 함께 월북했다.

    김창석은 안덕지서에 7차례나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경찰은 정보를 캐러 몽둥이세례를 퍼부었다. 경찰로부터 조사가 잦자 산 쪽에서도 그들의 정체가 드러날 까 우려해 접근하지 않았다. 49년 가을께는 모슬포의 2연대 본부로 끌려갔다. 귀순자수용소에는 대정, 한림, 안덕 일대 주민 100여명으로 감산리는 폭도인 강00(25), 한00(19), 한00 모친 등이 수용돼 있었다. 군인들은 줄기차게 3주간이나 ‘남로당 가입여부’, ‘남로당에게 무엇을 협조했나’ 등을 집중 추궁했다.

    얼굴 턱이 무너지고 다리를 못 쓸 정도의 고문을 받았으나 젊었었기에 회복됐다. 김창석은 결국 결백이 증명돼 석방됐다. 이때 매 맞을 각오로 석방증을 달라고 요구, 받아냈다. 이것이 후일 그의 신분을 보장하는 증명서가 돼 예비검속을 무사히 넘기게 됐다.

    김창석의 결백 주장에는 7살 밑 그의 동생 김창길도 한 몫을 했다. 48년 12월 폭도들이 감산리를 습격했을 때 동생은 마을에서 유지였던 양별감의 아들인 양00(29)과 함께 납치돼 산으로 끌려갔다. 그들 폭도 아지트에는 9연대 이등상사로 있다 탈영하여 입산한 양승옥이 우두머리였다. 함께 끌려간 바로 양00의 동생이었다. 그래서 무사했다.

    어느 날 폭도들은 동생 김창길에게 동광에서 메밀쌀을 갖고 오도록 지시했다. 김창길은 산으로 그대로 갈 것인지, 집으로 탈출할 지를 고민하다 탈출을 결심했다. 안덕지서에 바로 가 신고했고 토벌대는 이튿날 새벽 김창길의 안내로 폭도의 아지트를 습격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남아 있던 형 양00은 동생을 따라 ‘슬픈 폭도’가 되었고 애월에서 죽었다. 김창석의 표현 ‘슬픈 폭도’란 말은 기발하고 기막힌 단어이다.

    6‧ 25가 나자 김창석도 동생 김창길과 같이 50년 8월 모슬포에서 한 달간 훈련을 받고 제주읍 주정공장에 집결, 내일이면 출정케 됐다. ‘사정이 있는 사람’은 사정을 말하도록 했다. 김창석은 할아버지, 부친을 모셔야 하는데 형제가 함께 가면 집안을 돌볼 사람이 없다고 호소했다. 호소가 받아들여져 동생만 참전했고 동생은 11사단 20연대 소속으로 51년 양양의 설악산 전투 때 전사했다. 

    김창석은 61~62년 마을 이장을, 이후 노인회장도 지냈다. 나이는 92세이나 귀도 전혀 이상 없이 온전하고 소주 한잔이 낙이라고 밝힐 정도로 노익장을 과시했다. 

    김창석은 “감산리는 5‧ 10선거를 치렀다. 4‧ 3의 주동자는 모두 도망가고 중간 사람만 죽었다.”며 “경찰도 마을의 지도자급이기에 이들을 무시하지 못하고 골치가 아프니 이들의 탈출을 협조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