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생포하라" 경복궁 전쟁...황제는 끝내 '나라 양도' 선포...강대국 이용의 천재 이승만의 리더십이 그리운 신냉전시대
  • [인보길의 역사 올레길] 대한민국의 8월...광복절과 국치일...건국과 망국의 산책

    창피한 8월! 건국절-건국자도 없는 나라
  • ▲ 1948년 8월15일 중앙청 앞에서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선서를 하는 이승만.
    ▲ 1948년 8월15일 중앙청 앞에서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선서를 하는 이승만.
“창피해...창피해...내가 창피해...”
이승만은 얼굴을 떨며 세 번이나 ‘창피해’를 연발했다.
1960년 4월26일 아침 경무대, 대통령 하야 소식을 들은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 장군등이 달려와 사퇴를 번복하라고 만류했을 때
이승만은 이미 하야성명서 작성을 끝낸 참이었다.
“어떻게 백성을 죽일 수가 있어? 어떻게 젊은 아이들을 죽인단 말이야.
 내가 그만둬야지...내가 그만 두면 더 안 죽겠지? 더 다치지 않겠지?..."
4,19 데모대에 경찰 발포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뒤,
뒤늦게 사태를 알게 된 85세 대통령 이승만은
서울대 병원으로 달려가 부상학생들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암 그래야지, 불의를 보고도 일어나지 않는 백성은 백성이 아니지,
우리 청년들이 장하다...장하다...” 
그의 눈엔 20대시절 고종황제를 상대로 유혈데모를 했던 자신이 거기 누워있었다.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어떻게 지킨 나라인데...
특히 일본에게 창피하고 미국에게 창피하고
6.25때 싸워준 연합국들에게는 또 얼마나 창피한 나라인가.
자유세계를 이끌어온 자유민권 지도자 이승만에게 ‘국민 살해’는 곧 민주주의 살해,
전쟁 중에도 선거를 빼놓지 않고 민주교육을 시켜왔던 국민들 앞에 가장 창피했던 것이다.
이화장으로 돌아간 이승만에게 시민들이 몰려들어 눈물을 뿌렸다.
 “자유당 죽일 놈들, 건국의 아버지를 망쳐놨어!”
  • ▲ 서울대 병원을 방문, 부상한 데모학생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는 이승만 대통령.
    ▲ 서울대 병원을 방문, 부상한 데모학생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는 이승만 대통령.

  • ▶그의 하야로부터 54년, 
    해마다 8월이 오면 대한민국도 창피하다. 
    8월15일 광복절이 창피하다. 원래 '국권 회복' 건국을 기념하는 광복절이건만
    남의 힘으로 주어진 ‘해방’만 광복이고  ‘독립’과 ‘건국’은 까맣게 잊은 나라,
    지도층도 국민도 교과서도 학자도 '광복'의 뜻조차 모르게 된 나라,
    아니 강제로 ‘건국’을 지워버리고 ‘해방 기념’만 고집하는 나라,
    건국절도 없고 건국의 아버지도 중상모략 누명 씌워 버려버린 채,
    '건국'을 부정하는 이상한 정치집단-적대세력의 협박에 농락당하는 나라,
    각국에서 보낸 ‘Anniversary of Independence(독립기념)’ 축하서한을 받으면
    우리 정부는 뭐라고 답장을 쓰고 있는가?
    생일도 아버지도 없는 나라는 정말 창피하다. 
    선진국은커녕 국제 미아가 안되면 다행이겠다.

    ▶8월29일 국치일은 순종황제가 “나라를 일본 천황에 맡긴다”고 발표한 날,
    사실은 이보다 일주일 먼저 ‘한일합방’ 조약에 서명한 22일이 국치일 아닐까.
    아니다, 그 3년 전 ‘정미7조약’에 굴복한 날,
    아니면 5년 전 ‘을사보호조약’에 황제도장 찍은 날,
    아니 러일전쟁 뒤 미국과 일본이 비밀거래로 나눠먹은 날(태프트-가쓰라 밀약),
    아니 그 10년전 고종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한 날(아관파천),
    아니 명성황후가 일본 칼에 난도질당한 날(을미사변),
    아니 청일전쟁에 국권과 국토가 쑥대밭이 된 그때...
    그날 그날이 모두 국치일이요 망국일(亡國日) 아니던가.

    망국보다 더 창피한 것은 망국을 침략자 탓만 하는 역사 무식, 망각,
    명나라 청나라 의지하듯 미국만 믿고 나몰라라 흥청망청,
    망국을 빚어낸 당파싸움을 되풀이 난리치는 망동이들이다.
    아니다, 망동이들 앞에 법과 공권력을 내던져 버리고
    망동(妄動)을 구경만 하는 정부-여당의 망동이 더더욱 창피하다.

  • ▲ 청일전쟁 개념도와 전투날짜.(자료사진)
    ▲ 청일전쟁 개념도와 전투날짜.(자료사진)

    ▶8월1일은 일본이 청나라에 선전포고 한 날,
    올해 120주년인 청일전쟁은 선전포고 일주일전 7월25일 시작,
    일본함대가 내 고향 당진(唐津) 앞바다 아산만 입구 풍도(豊島)에서 
    청 함대를 기습 격침, 청군을 평양까지 밀어내고서야 선전포고를 했다.
    조선 파병 자체를 ‘청일전쟁 개시’로 장기간 준비해 온 일본의 번개작전 앞에
    청국은 조선을 내주고 조선은 국토와 국민을 약탈 학살에 내맡겼다. 
    ▶그 이틀 전 7월23일 또 하나의 전쟁 ‘경복궁 전쟁’을 한국 역사는 가르치지 않는다.
    청국 축출 개전(開戰)에 앞선 일본의 비밀전쟁, 조선 제압 시나리오
    <전투를 통한 왕궁 점령, 국왕 생포, 현정부 타도, 대원군 정부 수립> 작전은 전광석화였다.
    이날 새벽2시 용산에서 출발한 일본군 2개대대는 전화선을 절단하고 경복궁을 기습한다.
    건춘문과 춘생문에서 몇 차례 총격전으로 조선군 77명이 쓰러졌고
    문을 열어젖힌 것은 오전 5시, “고종을 생포하라” 들이닥친 적군은
    왕을 연금시키고 대원군을 앞세워 민씨 내각을 해산, 예정했던 친일내각을 만든다.
    청국에 핑계댄 '내정개혁안'을 미리 준비, 일본식 '갑오경장'을 밀어붙였다.
    대원군은 다음해 가을 민비살해 때도 역도들에 끌려나와 앞장서는 역을 맡는다.

  • ▲ 일본 보도화가의 '경복궁 전쟁' 상상도. 일본공사가 대원군을 호위하여 궁문으로 쳐들어가는 장면. 1894.7.23. (도서출판 어문학사, 청일-러일전쟁에서)
    ▲ 일본 보도화가의 '경복궁 전쟁' 상상도. 일본공사가 대원군을 호위하여 궁문으로 쳐들어가는 장면. 1894.7.23. (도서출판 어문학사, 청일-러일전쟁에서)


    25일 대원군 앞에서 외무독판이 ‘조선 독립을 위해 청군철퇴를 일본에 요청한다’는
    원조의뢰서를 작성케 한 뒤, 일본군은 동시에 청 함대를 기습하였다.
    어디까지나 조선의 요청을 받아 청국을 몰아낸다는 식의 국제법적 명분 갖추기는
    그후 모든 침략음모에 선행시켰고, 총칼과 뇌물에 15년간 끌려다닌 조선 정부는
    마침내 “합방도 조선의 요청”이란 쇼까지 황제가 들러리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