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간 중국 동양화 독학 후 화가로 데뷔, 오는 11월 중국금일미술관 전시회 초대

  • 지금의 30대라면 크고 작은 작품 속에서 잔잔하고, 톡톡 튀는 연기를 보여 주던 그녀를 기억할 것이다.

과거의 그녀는 연기 잘하고 예쁜 연예인이었지만 화가가 된 그녀는 눈가에 작은 주름이 정답게 느껴질 정도로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6년간의 공백을 깨고 돌아온 김현정이 배우가 아닌 어엿한 동양화가로 변신했다.

지난 1년간 세계일보 미술칼럼도 연재했고, 7월 18일까지 진행한 첫 개인전 [묘사와 연기]도 성황리에 마친 후였다.

최근에는 자신이 연재한 칼럼을 엮은 [랄라의 외출]를 출간했다. 책 속에는 그림을 통한 그녀의 치유와 사색이 잔잔하게 녹아 있다.

“연기를 중단하고 6년간 동양화를 공부했어요. 그림을 그리는 것뿐만 아니라 고미술품을 직접 구입하며 미술품 감정 공부도 하고,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미술 이론과 실기에 매달렸어요”

미술감정전문가 이동천 교수의 조언을 바탕으로 작품 활동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고, 중국의 스승인 펑펑 교수(북경예술대학 주임교수, 2011 베니스 비엔날레 중국관 총감독) 등에게 동양화에 대한 집중적인 가르침을 받았다. 

연예인의 고상한 취미가 아닌 진짜 동양화가의 길을 걷고자 한 것이다.


  • 내면의 아이 [랄라]

    그녀의 그림은 재밌고 독특하다. 잔잔한 동양화에 만화 속에서나 툭 튀어나올 법한 토끼 인형이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있다.

    얼핏 보면 가볍게 느껴지는 작품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녀 나름의 특별하고 복잡한 기법과 숨은 내공이 느껴진다.

    “전시회를 진행할 때 재미있는 반응들이 많았어요. 동양화에 웬 토끼가 있으니 [웃기다, 재밌다, 독특하다]고 한 사람들부터, [내면아이가 뭐야?] 하면서 관심을 보이거나, 어린 자녀를 데리고 와서 작품을 보는 어머니들도 있었어요.”

    전시에는 30~40대 관객이 많았다. 내면아이에 대해 낯설어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이를 통해 이해와 아이디어를 얻어가는 이들도 있었으면 했다. 

    작품 속 토끼 인형은 다름 아닌 김현정 작가의 내면아이 [랄라]이기 때문이다.


  • (좌) 랄라독립도 (우) 바게트 십자가

  • 언뜻 보면 김현정의 그림은 중국 대륙에서 유행하는 신(新) 공필화와도 비슷하지만, 
    북미지역에서 유행하는 팝초현실주의와도 비슷하다. 
    하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작품들을 찬찬히 뜯어 보니, 
    결코 이 두 현대미술 트렌드에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예술가의 개인적 경험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나는 알게 됐다. 
    김현정의 그림은 매우 특별한 사례로, 그녀의 마음속 세계로 들어가지 않고는
    작품들의 의미를 읽어낼 수 없다.
    - 펑펑, 북경대학 예술학과 주임교수


    몇 년 전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그녀도 많은 인기를 얻었다. 

    그러다 우연히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다룬 연극 [나비]를 보고 감명을 받았고, 연극 무대에 올랐다.

    3년간 나비의 배우로 활동한 그녀는 현실 속에서도 고통이 느껴졌다. 반복적으로 할머니들의 감정과 고통을 떠올리며 연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시기에는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 보다는 고통스러운 것들이 눈에 보였다.

    우울함이 커지던 중 [가톨릭상담봉사자과정]의 교육과정으로 90시간 이상 심리상담을 받았고, 인형치료법을 통해 자신의 내면아이 [랄라(lala)]를 만났다. 

    “어느 날 제가 화내는 법을 모른다는 걸 깨달았어요. 화내는 연기를 하는데 짜증을 내고 있던 거에요. 중성적인 성격에다가 여자들의 감성과 표현도 어려웠어요. 그런데 상담을 받으면서 장녀인 제가 늘 동생에게 양보만 했었고 한 번도 인형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걸 알았어요. 난 괜찮아, 난 됐어 하면서 늘 모든 것을 양보했어요. 그리고 내려진 처방이 [자신에게 인형을 선물]하는 것이었고, 지금의 [랄라]를 만났어요”

    치열한 20대를 살아온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인형을 선물하기로 했다. 인형가게에서 첫눈에 들어온 랄라는 이후 그녀의 작품 곳곳에서 그녀를 대변했다. 랄라는 그림을 통해 세상에 처음 인사했고, 김현정 작가는 또 다른 모습으로 세상에 인사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치유]이기도 했다. 랄라를 만난 이후의 삶은 그녀의 책속에도 잘 나타나 있다. 

    랄라를 사랑하면서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느낌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이어졌다. 
    랄라에게 말하는 것처럼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도 친절하게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랄라의 존재를 알기 전, 나는 내 안에 작은 현정이에게 휘둘렸다. 
    이제 나는 내면아이 랄라를 가슴에 끌어안고 생각하고 상상하고 꿈꾼다. 
    내 안에 작은 현정이는 랄라를 통해 수줍지만 사랑스럽게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 오는 11월, 중국 대륙에 인사하는 랄라

    지난 개인전 이후 지속적인 콜렉터가 생기고, 앞으로 지켜보겠다며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배우 김현정을 기억하고 지방에서 올라온 팬들도 있었고, 그림만 보고 인사없이 조용히 돌아간 팬들도 있었다. 연기를 잠시 중단한 상태인데 과분하면서도 고마운 일이었다.

    전시회도 마무리되고 짧은 휴식을 가진 후 그녀는 11월 중국 금일미술관에서 열리는 <한국현대미술-삼인행> 전시 준비에 매진할 계획이다.

    이번 중국 전시회는 故 백남준 화백, 이왈종 화백과 그녀의 작품이 전시된다. 

    이제 갓 데뷔한 화가 치고는 성대한 해외 진출이다.

    “중국 시장까지 진출 가능한 작가를 추천받아 선정됐는데, 제 그림이 중국 시장에 잘 맞는다는 평을 들었어요. 총 15점을 전시하는데 이것저것 준비할 것이 많네요”

    중국 동양화를 바탕으로 한 그녀의 그림세계는 직접 특허낸 [화주수보(畵主繡補)] 화법을 통해 극대화된다.

    화주수보 기법은 비단에 자수를 섞어 볼륨감을 살린 기법으로 물감이 표현해내지 못하는 새로운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 그림의 어느 부분을 강조하거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그녀만의 기법이다. 

    또한 비단에 그림을 그리는 [쌍층(雙層)] 화법, 사의화를 공필화로 구현한 [출사입공(出寫入工)] 화법도 구사한다. 

    아직은 공개하기 힘들지만 또 다른 기법도 특허로 낼 계획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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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면의 아이를 위해 모든 걸 멈추고 바라보기

    내면의 랄라를 만난 후, 어쩌면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그녀는 요즘 여성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이야기했다.

    “저는 어린 조카를 보면서도 영감을 얻어요. 어린 아이는 내 안에서 칭얼대는 내면과도 비슷해요. 아이가 우는 것은 욕구 때문인데, 어느새 욕구를 채워 주면 정말 작은 것에도 기뻐해요. 그런 것들이 나의 내면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육아전쟁을 치루는 엄마들, 일상이 바쁜 20~30대 젊은 여성들. 그녀는 자신이 그러한 과정을 지나오거나, 옆에서 지켜보고 있기에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다.

    “요즘 여성들은 너무 바쁘고 빨라요. 그러다 보니 나를 돌아볼 시간이 너무 없어요. 잠시라도 모든 걸 딱 끓고 자신만의 시간을 가져 보세요. 혼자 미술관, 도서관을 가도 좋고 아니면 정말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쉬는 거 에요. 내안에 어린 아이를 위해 휴식이 필요해요”

    인간은 끊임없이 탐구하고 사색하며, [나 자신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한다. 

    그래서 인간은 [예술]을 만들고, [예술]을 하는지도 모른다. 예술을 통해 또 다른 나와 만나는 것이다. 

    펑펑 교수는 그녀를 두고 “예술로 심리적 질병을 치유한 경우는 새롭지 않다 하더라도, 이 때문에 환자가 예술가가 된 사례는 아직도 흔치 않다. 예술이론을 연구하는 나로서는 김현정의 사례에 매우 흥미를 가지고 있어, 앞으로도 그녀와 그녀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고대하고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김현정 작가는 그렇게 내면의 끌어내는 것을 그림을 통해 이루어냈고 현재진행 중이다. 
     
    한때 나는 남을 탓하며 살았다. 
    상실감과 열등감에 빠져 남을 질투하며 하루하루 허송세월을 보냈다.
    나는 내면아이 랄라를 만나고 나서야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 
    그동안 나는 예술이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는 믿음에 예술을 사랑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세상은 원래 아름다운 곳이었다. 내가 몰랐던 것이다.

    [사진 = 러브즈뷰티 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