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르트르를 논하는데 웬 플로베르인가?
    흔히 알려진 대로는 사르트르는 문학과 작가의 사회적 책무를 외친 20세기 참여문학의 기수이고, 한 사람은 문학을 통한 개인의 구원에만 열을 올린 19세기 작가인데 말이다.
    게다가 마르크시즘에 경도하던 시절의 사르트르 자신이 플로베르를 ‘파리 코뮌(1871)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불러온 책임자’라고까지 깎아내리지 않았던가?

이 사르트르를 플로베르와 연결할 단서를 저자는
사르트르 만년의 저작 『집안의 백치(L’Idiot de la famille)』(전 3권, 1971-72)에서 찾는다.


  • 장르를 결정짓기 모호한 책이었다.
    플로베르의 일생을 꼼꼼히 추적한 전기이기도 하고, 플로베르의 문학 비평 혹은 미학이론의 소개서인가 하면, 한편으로는 플로베르가 살았던 19세기의 사회상과 당시 작가들의 정신적 비평을 보여 주는 방대한 책이었다. 사르트르 자신의 온갖 사상이 녹아 있는, 한마디로 플로베르에 관한 모든 것이고, 동시에 사르트르의 모든 것이었다. (6-7쪽)

    그런데 왜 잉여인가?
    병원장을 하는 부르주아 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나, 반강제로 법과대학에 들어가 사법시험에 번번이 떨어지며 집안의 천덕꾸러기로 지내던 플로베르가 스물세 살에 느닷없는 뇌전증(간질)에까지 시달리다가, 아버지의 죽음 후 거짓말같이 병이 낫고는 순식간에 19세기 문단의 총아로 떠오른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책은 시작된다(서장, ‘퐁 레베크의 발작’).
    플로베르의 일생은 아버지에 의해 미리 결정된 삶이나 다름없었다는 점에서 잉여의 삶이었다.
    젊은 시절의 무능은 억압하는 아버지에 대한 살부(殺父) 충동의 위장된 표출이었고,
    그 아버지가 죽음으로써 거짓말같이 아들은 인간이 된다.
  • ▲ '보바리 부인'의 작가 플로베르.
    ▲ '보바리 부인'의 작가 플로베르.
    사르트르로 말하자면, 유복자로 사르트르를 낳은 어머니가 평생 재혼하지 않은 까닭에
    스스로의 존재가 정당화되지 않는 잉여인간이라는 자의식을 평생 달고 다녔음을 고백한 바 있다. 어린 사르트르가 문학에 처음 눈을 뜬 계기가 하필 플로베르 『보바리 부인』의, 남편 샤를 보바리가 죽는 대목을 접하면서였다. ‘아비 없는 철학자’는 평생 이 ‘아비를 죽인 철학자’의 그늘을 벗어 던질 수 없었다.
    결국 『잉여의 미학』의 단서가 된 『집안의 백치』는 잉여인간 사르트르의,
    다른 잉여인간 플로베르에 대한 ‘자전적 평전’이라는 것이 저자의 시각이다.

    이제까지 알던 사르트르는 파편들이다

    당신은 사르트르를 누구로 기억하는가?
    『존재와 무』의 실존철학자, 『지식인을 위한 변명』의 진보 논객, 상상의 미학자(『상상력』 『상상계』), 소설 『구토』로 노벨문학상을 받게 됐으나 거부한 작가, 시몬 드 보부아르의 연인…. 이 모두가 사르트르이지만, 그 어느 하나도 사르트르의 진면목이 아닌 파편에 불과하다고 저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잉여의 미학』은 그중 예술과 미를 바라보는 사르트르의 시각의 추이를, 만년의 『집안의 백치』로부터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듯 다시 재조명한 역작이다.
  • ▲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사르트르의 문학 인생은 다음과 같은 세 단계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사르트르가 글 읽기를 막 배우고 난 직후에 의미도 모르면서 『보바리 부인』을
    수없이 반복해 읽던 어린 시절부터 『상상계』, 『구토』 등을 쓰던 30대 중반까지의 시기이다.

    그러나 1939년 2차 대전 발발과 함께 사르트르의 문학관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급선회하게 된다. 마르크시즘에 몰두했고, 문학의 효용성을 주장했으며, 당연히 순수문학의 작가인 플로베르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온 세계의 일반 독자들, 특히 한국의 독자들은 이 두 번째 단계의 사르트르만을 기억한다.
    문학의 현실 참여를 주장하고 극렬한 혁명사상을 고취한 이 극좌 지식인에게
    플로베르를 흠모하던 창백한 문학청년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그러나 일반 독자들이 더욱 더 모르고 있는 것은 이 좌익 사상의 지도자가 일생을 결산하는 방대한 저술 『집안의 백치』를 통해 다시 플로베르에게 되돌아왔다는 사실이다. (371-73쪽 발췌)

    작가이자 미학자로서 사르트르의 여정은 결국 ‘순수에서 참여로, 다시 순수로’로 특징지어진다. 한눈에도 『집안의 백치』는 사르트르의 ‘전향’ 선언에 다름아니었으리라. 당대 프랑스 지성계가 발칵 뒤집어졌을 것을, 당연히 뒤따랐을 갖가지 해석과 열띤 논쟁의 궤적을 저자는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살핀다. 알고보면 더욱 기가 막힐 일은, 이 문제작이 만년의 어느날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구상되고 준비되고 진행된 끝에 나온 역작이라는 사실.
    드골 대통령의 하야까지 불러 온 1968년의 68항쟁 기간, 트럭 짐칸에 숨어 노동자들의 시위 현장에 출근하다시피 하고 지면으로는 참여를 소리 높여 외치던 이 ‘참여의 아이콘’이 밤에는 책상 앞에 앉아 플로베르론(論)을 쓰고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까?
  • ▲ 사르트르와 보부아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