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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9회 이승만포럼
    2014. 5. 15(목) 오후2:30~4:30 정동제일교회 아펜셀러홀


    국회 프락치사건 다시 보기

    양동안(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삼정회 회장)


    1. 남로당의 국회의원 포섭

    남로당은 5·10선거 때는 한편으로는 선거파탄투쟁을 전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회 내에 동조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장차 포섭될 가능성이 보이는 후보자들을 개별 선거구별로 지원했다(박갑동의 증언). 이문원은 5·10선거 때 남로당의 지원을 받았다.

    남로당은 대한민국이 건국된 직후인 1948년 9월 「반동 프락치부」라는 특수공작부를 설치하여 국회의원 포섭공작에 나섰다. 이부서의 책임자는 도상익(별명: 조동룡, 조만), 부원으로는 김사복(별명: 이삼혁, 하사복), 이재남, 정해근, 김우진, 유진원, 이병석 등이 활동했다. 그 중 김사복, 이재남, 정해근이 국회의원 포섭공작을 담당했다. 그들은 선량한 기업인으로 위장하여 활동했으며, 서울 중구 충무로 2가, 4가, 종로 4가 등지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활동했다.

    이재남은 일제시기 같이 신문기자로 활동했던 인연을 이용하여 48년 11월 중순부터 전북 순창 출신인 노일환을 포섭하려 했다. 남로당은 국회 프락치 공작을 김사복이 전담하기로 결정하여 노일환 포섭 공작을 김사복에게 넘겼다. 김사복은 이삼혁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노일환에 접근했다. 이삼혁은 자신을 부산에서 어업을 해서 돈을 번 사업가로 자처하면서 48년 12월 하순부터 노일환에 접근했다. 이삼혁의 유도로김사복은 전북 익산 출신의 이문원도 포섭했다. 이문원에 대한 포섭공작을 전개할 때는 하사복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하사복의 이문원 포섭에는 이문원의 보통학교 동창생이며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남로당 비밀당원 오관이 동원되었다. 오관은 49년 1월 이문원과 하사복을 자기 집에 초대하여 두 사람을 연결시켜주었고, 그 후 하사복이 이문원을 적극 공략, 포섭하여 남로당 비밀당원으로 만들었다. 정해근은 이구수 황윤호 최태규 등을 포섭하려 하다가 국회의원 포섭공작이 김사복으로 일원화되는 바람에 손을 뗐다.

    김사복은 노일환과 이문원을 포섭하면서도 완전히 별도로 관리하여 상호간에 남로당에 포섭된 사실을 알지 못하게 하였으며, 이들에게 국회 내 동조자 포섭을 위해 매달 2백~3백만 원의 공작금을 제공했다. 당시 요정에서 국회의원 20명이 하룻밤 연회를 하는데 20만 원 정도가 소요되었으므로 월 2~3백만 원이면 꽤 큰돈이었다. 노일환과 이문원은 김사복이라는 동일인물에 의해 포섭되었으면서도 그런 사실을 당국에 체포될 때까지 전연 몰랐다.

    노일환과 이문원은 국회의원들 가운데서 이승만 대통령에 반대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 주로 젊은 사람들(소장파 의원들)을 중심으로 동조자들을 포섭했다. 두 사람이 포섭한 주요 동조자들은 다음과 같다.

    김옥주(전남 광양), 이구수(경남 고성), 김병회(전남 진도), 배중혁(경북 봉화), 신성균(전북 전주), 강욱중(경남 함안), 최태규(강원 정선), 황윤호(경남 진양), 박윤원(경남 남해), 김약수(경남 동래), 서용길(충남 아산), 차경모, 김봉두 등.

    2. 남로당 프락치 및 그 동조자들의 활동

    노일환과 이문원 등은 남로당에 포섭되기 전부터 대한민국에 해를 끼치는 활동을 전개했다. 그들이 남로당의 프락치로 포섭되기 전후에 전개한 반국가적 활동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국가보안법 제정 저지투쟁
    48년 10월 20일 전남 여수에 주둔 중이던 국군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제14연대 반란이 일어난 후 국회는 반란 방지를 위한 법률을 제정하려 했다. 11월 16일 국회 법사위는 「국가보안법」 초안을 본회의에 상정했다. 국보법 초안이 상정되자 노일환·이문원과 그 동조자들은 국보법 제정 저지를 위해 안간힘을 다 썼다. 법사위의 초안이 상정되는 것과 동시에 국보법을 심의하지 말고 폐기하자는 동의안을 발의했다. 이 동의안은 김옥주 외 47명이 서명하여 제출했다.

    폐기안을 제안한 의원들은 번갈아가며 자기들의 주장을 개진했고, 국회부의장으로서 사회를 맡은 김약수는 의사를 편파적으로 진행하면서 폐기 주장 의원들을 지원했다. 그들이 내세운 폐기 이유는 ▲일제시대의 치안유지법과 같은 반민주적 국보법을 민주주의 기관인 국회가 제정한다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좌익을 막으려면 민주주의적 입법을 해서 민족정기를 살려야 하며 이런 법률로는 좌익을 막을 수 없다, ▲사상에는 사상으로 대항해야지 권력으로 막을 수는 없다, ▲행정부가 할 일을 국회가 할 필요가 없다, ▲이 법으로는 공산당은 못 잡고 공산당의 모략에 넘어간 사람이나 애국자들과 통일운동가들만 다치게 할 우려가 있다 등이었다.

    국보법 제정을 찬성하는 의원들은 ▲공산당이 국가를 뒤엎으려 하는데, 그들이 기존 형법(일제시대 형법을 미군정에서 약간 수정한 것)을 위반하지 않는 한 그들을 검거할 수 없으니 특별법이 필요하다, ▲좌익이 사방에서 반란을 음모하고 있는 판국에 그들의 반란으로부터 국가를 지키려는 법을 제정하지 말자는 것은 그들의 폭동 반란을 지원하는 것이다, ▲공산당이 대한민국을 파괴하려 하고 있는데 민주주의를 이유로 국보법을 만들지 말고 공산당이 대한민국 파괴를 자진 포기할 때까지 기다리자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공산당이 국보법 폐기를 선동하고 있는데 국보법을 폐기하는 것은 그들을 돕는 것이다, ▲국회가 본회의에서 법사위에 초안을 만들어 오라 해놓고서는 법사위가 제출한 초안을 토론도 안 해보고 폐기하자는 것은 국회법 위반이다 등의 이유를 내세워 폐기동의에 반대했다.

    폐기동의안을 채택할 것인지 여부를 놓고 표결이 행해졌다. 표결 결과 재석 122 중 찬성 37, 반대 69로 부결되었다. 당초 폐기동의안 발의에 참여했던 47명 중 10명이 토론과정에서 드러난 폐기선도 의원들의 사상에 의심을 품고 폐기안 지지를 철회했다.

    11월 18일 법사위의 초안에 대한 심의가 개시되었다. 국보법 폐기를 추진하다가 실패한 의원들은 축조심의 단계에서 국보법을 유명무실한 법률로 만들려는 노력을 전개했다. 그들은 축조심의가 시작되자마자 국보법 제1조를 삭제하자는 수정안을 제출했다. 제1조 삭제안은 표결에서 찬성 20, 반대 74로 부결되었다. 

    제2조 심의에 들어가자, 반대파 의원들은 제2조의 수정을 구두로 제의했다. 당시 국회법에는 법안의 수정제의는 축조심의 개시 전에 문서로 제의할 수 있으며, 심의도중 구두로 수정을 제의하려면 20청(請)이 이루어져야 하도록 되어있었다. 노일환이 수정을 제의한 후 7청이요 하는 사람까지만 있고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동조의원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든 것이다. 제2조 수정제의는 성립되지 못했고, 지지자가 크게 줄자 반대파 의원들은 입법방해를 포기했다. 

    국보법은 최종표결에서 재석 121 중 찬성 84, 반대 3의 압도적 찬성으로 가결되었다.

    2) 반미투쟁

    a. <미군철수 촉구 투쟁>

    노일환·이문원과 그의 동조자들은 48년 10월 13일 박종남 외 45인의 서명을 받아 외군(미군)철퇴 결의안을 본회의에 상정시켰다. 이 결의안이 상정되자 미군철수에 반대하는 다수의 의원들이 결의안의 제안 설명도 하지 못하도록 의사진행을 방해하여 심의가 보류되었다.

    이문원은 49년 1월 15일 미군철수를 위해 유엔한국위원회가 노력해줄 것을 촉구하는 유엔한국위원회에 보내는 메시지를 국회 본회의에서 낭독하려 하다가 미군철수에 반대하는 다수의 의원들이 실력으로 저지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그들은 49년 2월 4일 미소양군을 철수시켜 평화통일을 이룩하자는 내용을 담은 《평화통일안》을 김병회 등 71인의 서명을 받아 국회 본회의에 상정했다. 3일 후 표결에 붙인 결과 재석 159 중 찬성 37, 반대 95로 부결되었다. 제안에 서명했던 71명 중 34명은 찬성투표를 하지 않은 기현상을 나타냈다. 이는 그 34명의 의원들이 프락치 및 동조자들의 회유에 넘어가 제안서에는 서명을 했으나 표결에서는 찬성투표를 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국회에서 미군철수 촉구를 결의하려는 노력이 좌절되자 그들은 유엔한국위원회에 외군철수와 철수를 위해 유엔한국위원단이 노력해줄 것을 촉구하는 서한(진언서)를 유엔한국위원단에 보내기로 작정했다. 그들은 3월초부터 유엔한국위원단에 보내는 진언서에 서명할 동조의원들의 포섭작업에 들어갔다. 당초 1백 명의 서명을 목표로 삼았으나 62명의 서명만 받게 되었다. 김약수, 이문원, 노일환 등이 이끄는 서명파의 대표들은 49년 3월 19일 덕수궁에 있는 유엔한국위원회 사무국을 방문하여 유엔한국위원회가 외군철수를 위해 노력해 줄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진언서를 제출했다.

    주한미군이 군사고문단만을 남겨두고 49년 6월말까지 전원 철수할 것으로 알려지자 그들은 또 군사고문단 설치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그들은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이문원, 이구수, 최태규가 검거된 뒤인 49년 6월 17일 유엔한국위원단을 방문하여 외군이 철수한 후 군사고문단을 설치하는 것을 유엔한국위원단이 저지해줄 것을 촉구하는 서한을 제출했다. 이 서한에도 62명의 의원이 서명한 것으로 되었는데, 서명자 명단은 3월 19일 서한의 서명자 명단을 도용한 것이었다. 그 이벤트에는 김약수, 노일환, 박윤원, 김병회, 김옥주, 강욱중 등 6인이 참여했다.

    남로당 프락치 및 동조자들이 이런 짓을 자행하자 그에 분노한 국회의원들은 6월 21일 142명의 의원들이 서명한 미군사고문단 설치 환영 성명을 발표하고, 이를 유엔한국위원단과 주한미국대사에게 보냈다.

    b.<한미협정 반대투쟁>

    48년 9월 18일 한미 재정 및 재산에 관한 협정 동의안이 국회에 상정되자 이문원·노일환 등과 그 동조자들은 이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한미 양국이 상대국에서 필요에 따라 동산이나 부동산을 매입하려 할 때 상호 용인해줄 것을 취지로 하는 이 협정을 놓고 그들은 국토를 미국에 팔아먹는 매국적인 행위라고 비난했다. 이문원과 노일환은 이 협정을 을사조약의 재판이며, 이 협정 작성자는 이완용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회의장에서 퇴장했다. 국회는 이 동의안을 압도적 다수의 찬성으로 가결했다. 이 동의안이 가결된 후 이문원은 이 결의에 반대하는 성명을 개별적으로 발표했다. 

    48년 12월 11일 한미원조협정 동의안이 국회에 상정되었을 때도 이문원과 노일환 등은 그에 격렬히 반대했다. 미국이 한국에 베푸는 것을 골자로 하는 이 협정을 그들은 한국에 불리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비난했다. 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회는 압도적 지지로 이 동의안을 가결했다.

    훗날의 수사결과에 의하면, 위의 활동 가운데 국회에 외군철수촉구결의안을 상정한 것과 유엔한국위원회에 진언서를 제출한 것은 남로당 공작원 김사복의 지령에 따른 것으로 밝혀졌다.

    3. 국회 프락치 검거와 처벌

    대한민국의 대공수사기관들은 국회에서 반국가적 활동을 일삼는 국회의원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다가 1949년 3월부터 그들에 대한 관찰을 수사로 발전시켰다. 그때부터 서울시경 사찰과와 검찰의 대공수사관들, 그리고 군방첩대 수사관들은 국회부의장 김약수를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소장파’ 국회의원들의 배후를 추적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수사진의 추적대상에 오른 사람들은 김약수 노일환 이문원 김옥주 등 4명이었으며, 일당의 핵심인물로 김약수를 추정했다. 그 이후 서울시경 사찰과 형사들은 그들 4명을 미행하기 시작했고, 미행결과 당초 예상과는 달리 노일환과 이문원이 핵심인물이며 그들이 남로당원들과 접촉하고 있는 사실을 포착했다.

    서울시경 사찰과 수사진은 49년 4월 초 노일환·이문원과 접촉하고 있는 남로당 공작원들이 들락거리는 충무로 2가의 한 사무실을 급습했다. 그곳에서 남로당 공작원들이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포섭공작 및 정치공작을 전개한 문서자료들을 확보했다. 당국은 이 문서자료를 토대로 수사하여 5월 17일 남로당이 포섭한 국회프락치 혐의로 이구수 최태규 의원을 체포하고, 다음날에 이문원 의원을 체포했다.

    수사기관은 6월 중순 남로당 중앙 월북문건부 연락원 정재한(여, 42)을 개성에서 체포하여 그가 휴대하고 있던 문서에서 남로당의 국회공작 관련 문건을 발견했다. 이 문건은 국회프락치사건을 수사하는 대공기관들의 자신감을 강화했다. 수사당국은 6월 21일 남로당 국회프락치 혐의로 노일환 강욱중 김옥주 김병회 박윤원 황윤호 의원들을 체포했고, 4일 후에는 국회 부의장 김약수를 체포했다.

    당국의 수사는 더욱 확대되어 8월 10일 원장길 배중혁 김영기 김익로 차경모 의원들에 대해 구속영장이 발부되었고, 배중혁과 차경모는 구속되었다. 8월 14일에는 서용길 신성균 김봉두 의원이 추가 구속되었다.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이문원 등이 1차로 구속된 직후 국회의 프락치 동조 의원들은 국회의원의 면책특권을 주장하며 구속의원 석방투쟁을 전개했다. 이런 석방투쟁에는 프락치 동조자라 할 수 없는 이재형 김장렬 조국현 김인식 이원홍 김수선 의원 등도 동참했다. 구속의원 석방 결의안은 재석 184 중 찬성 88, 반대 95, 기권 1로 부결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좌익분자들은 비좌익인사들의 얄팍한 동정심을 악용하여 이런 일을 자주 자행한다.

    4차에 걸쳐 구속된 국회의원은 총 15명이었다. 이중 죄질이 가벼운 차경모와 김봉두는 불기소 처리되고 13명이 국가보안법 등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49년 11월 17일부터 50년 3월 15일까지 진행된 1심 재판결과, 노일환 이문원 징역 10년, 김약수 박윤원 징역 8년, 김옥주 강욱중 김병회 황윤호 징역 6년, 최태규 이구수 서용길 신성균 배중혁 징역 3년이 각각 선고되었다. 피고인들은 모두 1심판결에 불복하여 항고했다.  

    4. 평  가

    1) 연루자들의 행적에 비추어 본 국회프락치사건

    국회프락치사건이 어느 정도 사실과 부합한 것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프락치로 검거된 인사들의 행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회프락치사건 관련자들은 1심 판결에 불복 항고, 2심 계류 중 6·25전쟁을 맞이하여 수감 중이던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옥했다. 서용길을 제외한 나머지 12명은 북한군의 점령기간 중 그들에 협조하다가 일부는 북한군이 패퇴하기 전에 월북하고 일부는 북한군이 패퇴할 때 같이 월북(또는 납북)했다. 서용길은 경기도 고양의 농가에 숨어지내다가 수복 후 당국에 자진 출두했다.

    노일환 이문원 김약수 강욱중 김옥주 배중혁 이구수 최태규 등 8명은 월북 후 북한에서 평화통일협의회의 상무위원으로 활동하다가 58년 말 ~ 59년 초 남로당계 숙청시기에 함께 숙청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병회 박윤원 신성균 황윤호 등 4명은 납북(?)된 후 행방불명되었다. 이러한 행적에 비추어볼 때 남로당프락치로 검거되었던 국회의원들이 친북의식을 가지고 활동했던 사람들인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2) 관계자 증언·진술에 비추어 본 국회프락치사건

    a.<신익희의 증언>

    국회의장 신익희는 49년 6월 30일 헌병사령부로 찾아가 국회부의장인 김약수를 면회했다. 이 자리에서 김약수는 “국회 안에 확실히 악질분자가 있다는 것을 자기도 이 곳에 들어와서 몸소 보고 알았다. 부의장직을 사임하겠다”고 말했다.

    b.<이문원의 법정진술과 신문조서>

    내가 한 행동은 민족주의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념적으로 부르짖은 것이 남로당에 이용당한 것이다. 공작원 하사복으로부터 지시를 받고 이런 저런 행동을 했으며, 김사복이 만약 배반적 행동을 할 때는 생명을 해치겠다고 협박하여 부끄러운 말이나 생명이 아까와 계속 지령대로 움직인 것이 오늘의 불행을 초래한 큰 동기다. 나는 과거의 죄과를 후회한다.

    c.<김약수의 신문조서>

    노일환 등 소장파는 평소 국회에서 발언한 것이나 이번 유엔한위에 제출한 진언서 문구로 볼 때 좌익의 의심을 갖게 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일반이 그자들의 사상이 불순하다고 평을 하는 것이고 그자들 중 김병회는 모 주점에서 좌익적 언사를 토로한바 있다.

    d.<박윤원의 신문조서>

    김구가 나에게 남북화평통일과 외군철퇴 주장을 하라고 말한 바 있고 나는 자주독립과 민족진영의 일치 단결을 위해 외군철퇴를 주장했다. 검거당한 후 보니까 결과적으로 남로당의 일을 해준 것이 됐고 나는 김구 노선을 지지했고, 이문원 노일환은 이를 이용했으며 나의 외군철퇴 주장은 좌익에 호응한 것이 됐다.

    이상과 같은 관계자들의 진술에 비춰볼 때 국회프락치사건은 조작이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3) 수사과정에서 고문이 있었는가?

    당시의 저급한 수사기술 및 대공수사기관의 행태로 보아 고문이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국회의원이었기 때문에 고문이 있었다 하더라고 심각한 수준의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본다. 더구나 신문조서의 진술내용이 남로당 공작원들이 작성한 문서와 체포 후 전향한 남로당 공작부원들의 증언으로 충분히 뒷받침될 수 있는 것이어서 고문의 필요는 거의 없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4) 현재의 한국정계에 던지는 시사점

    (a) 예나 지금이나 남한 좌익의 당면 투쟁대상은 국가보안법 폐지와 주한미군철수/한미동맹관계 해제라는 점을 일깨워 준다.

    (b) 현재 국회에는 프락치가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혁명조직’의 지도자와 간부들이 들어가 있다. 이들은 포섭된 프락치가 아니다. 문제의 심각성이 훨씬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