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8일자 오피니언면 '태평로'에 이 신문 이선민 논설위원이 쓴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으론 안 된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고교 한국근현대사 교육을 둘러싼 '이념 전쟁'이 한창이다. 10년 만에 정권을 되찾은 보수우파는 자라나는 2세들의 역사관을 비뚤어지게 만든 역사 교육을 바로잡는 것을 다음 과제로 설정했다. 좌(左)편향 교과서의 수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빗발치고, 교육계·학계 인사들은 일선 고교를 찾아가 강연을 열 예정이다. 정부는 문제가 된 교과서 내용을 내년 초까지 수정할 방침이다.

    이렇게 수정이 되면 우리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짊어질 청소년에게 안심하고 읽힐 수 있는 교과서를 갖게 될까? 안타깝게도 그 답은 부정적이다. 한국근현대사를 배우는 학생의 절반 이상이 사용하는 금성출판사 교과서의 문제는 특정 사건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사관(史觀) 자체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이 교과서는 그동안 여러 곳의 서술을 고쳤지만 기본 성격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번에도 집필진의 사관과 충돌하는 요구는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사관'은 역사를 보는 눈이다. 금성출판사 교과서의 현대사 부분을 관통하는 사관은 '반제(反帝) 민족해방'이다. 역사를 '반(反)외세 자주독립'이라는 외눈으로 바라보는 이 사관은 1980년대 좌파 민족주의에서 시작됐다. 여기서 '외세'는 세계자본주의 체제를 주도하는 미국이다. 따라서 미국과 미국의 동맹국 남한에는 비판적이고, 그 대척에 선 소련과 북한에는 우호적이다. 당연히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미국과 관계를 맺으며 세계가 놀라는 성공을 거둔 대한민국의 역사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책을 읽다 보면 곳곳에서 균형 잃은 서술을 만나게 된다. 광복 후 미국은 '점령군', 소련은 '해방군'이었음을 암시하며 미국에 대한 적대감을 부추긴다. 남한 정부의 수립과 발전은 비판적으로, 김일성의 집권과 북한 정권은 우호적으로 서술한다.

    이 책의 필자와 일부 학자들은 적법한 검정 절차를 거쳤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친북(親北)·반미(反美)의 색채가 짙은 교과서가 대한민국의 검정 절차를 통과한 것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집권기라는 시대적 상황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뿐이다. 한 중진 학자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중시하는 관점에 섰다면 금성출판사 교과서는 검정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진보좌파는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개편을 주도하는 교과서포럼을 역공하면서 국면 전환을 꾀한다. 일제 통치하에서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근대문명을 학습했다는 '식민지근대화론(論)'이나 이승만·박정희를 너무 찬양하는 데 대한 많은 사람의 거부감에 올라타려는 것이다. 자유가 없던 시대에 '자유주의 사관'을 적용하려는 교과서포럼의 시도는 분명 무리가 있다. 역사적·총체적 관점이 아쉬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좌파계열 교과서의 문제점에 대한 이들의 지적이 힘을 잃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아들딸에게 선조들이 오늘의 번영을 만들어낸 피땀 어린 기억을 어떻게 전해줄지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빈 마음과 맑은 눈으로 문제의 교과서를 찬찬히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2004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느낀 것은 답답함과 분노였다. "21세기 아이들을 1980년대 시각으로 가르치다니…. 지구화·정보화 시대의 주역을 위정척사파로 만들자는 것인가."

    금성출판사 교과서의 문제는 부분적인 땜질로 해결되지 않는다. 잘못된 기둥과 대들보를 송두리째 들어내고 그 자리에 새 역사 인식을 집어넣어야 한다. 그것은 시대착오적인 '민족해방 사관'도, 비역사적인 '자유주의 사관'도 아니다. 우리가 지난 한 세기 걸어온 근대국가 건설의 길을 세계사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개방적 근대화 사관'이다. 이런 작업을 종래의 교과서 필자들이 해내지 못한다면 새로운 사관으로 무장한 새 필자들이 새 교과서를 쓰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