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死守해야 할 陣地를 버린 세월호 선장과
    한국을 위해 목숨을 버린 미국의 엘리트들

    趙甲濟    

  •   
    세월호 침몰 사건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장면은 위기에 빠진 선박과 乘船者 구조를 지휘해야 할 船長, 기관장, 갑판장 등 지휘부가 승객들에겐 "움직이지 말고 가만 있으라" 해놓고는 먼저 탈출했다는 점이다.
    전형적인 후진국 型 사고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누리는 자유는 체제 곳곳에 포진한 책임자들이 職務에 충실하고 특히 위기 때 책임의 의무를 다해야 유지된다. 체제 유지의 최종 책임자들은 선출된 정치인들이다.

    세월호의 지휘부가 보여준 행태는 대한민국호의 지휘부,
    특히 국회의원들의 모습과 자꾸 겹친다. 
      
       워싱턴의 한국전 기념물엔 이런 銘文이 있다.
       <미국은 알지도 못하는 나라의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키라는
    국가의 부름에 응한 우리의 딸과 아들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 부름에 응하였던 延180만 명의 미군들 중 5만4000여 명이 죽고, 10만 명이 부상하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휘하는 정부는 이들의 희생에 대한 고마움을 묵살하는 정도를 넘어서 은혜를 원수로 갚는 식의 배은망덕한 記述을 한 좌편향 국사 교과서(고교)를 배포, 열심히 反대한민국 교육에 매진하고 있다.
     
       美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1950년 12월23일 지금의 서울시 도봉구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그는 지프차를 타고 아들이 근무하는 부대로 가던중 맞은 편에서 들이닥친 한국군 스리 쿼터에 받혀 죽었다. 당시 61세였다. 그는 대한민국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 무서운 집념과 용기로써 낙동강 교두보를 死守, 우리를 공산당의 마수로부터 지켜낸 지휘관이다. 그가 "죽을 때까지 싸운다"면서 낙동강 방어선을 유지하는 동안 맥아더 사령관은 仁川상륙작전을 준비할 수 있었다.
      
       워커 중장이 하필 한국군 운전병이 모는 트럭의 과속走行으로 죽은 것은 우리로선 미안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李승만 대통령은 운전병을 극형으로 엄벌하라고 호통을 쳤으나 옆에 있던 미군 고문관이 말렸다고 한다. 운전병은 징역 3년형을 살고 나왔다.
      
       일본에 주둔하던 美8군 가운데 가장 먼저 한국전선에 투입된 것은 24사단이었다.
    예하 연대장 마틴 대령은 천안에서 직접 바주카포를 들고 북괴군의 탱크와 대결하다가 탱크의
    직사포를 맞고 散華하였다. 24 사단장 딘 소장은 대전 전투를 지휘하던 끝에 부대가 흩어지면서 낙오하여 한국인 民家에 숨었다. 아무도 그를 오래 보호해주지 않았다. 끝내는 두 한국인이 그를 북괴군에 넘기고 5달러씩 받아먹었다.
      
       9군단장 무어 소장은 1951년 초 반격작전 중 탑승한 헬기가 고압선에 걸려 추락하면서 후유증으로 죽었다.
      
       밴플리트 8군 사령관의 아들은 조종사였는데, 북한지역을 폭격하다가 실종, 戰死로 처리되었다. 미국 CIA 부장의 아들은 프린스턴 대학 재학중 해병대에 지원, 한국전선에서 머리에 총상을 맞고 불구가 되었다.
      
       하버드 대학 졸업생중 17명이 한국전선에서 戰死하였다. 휴전협정을 맺을 때 유엔군 사령관이던 클라크 장군의 아들은 2사단 소속 중대장으로 斷腸(단장)의 능선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미국으로 후송되었는데 이게 세번째 부상이었다.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 장성들의 아들 숫자는 142명이나 된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도 참전하였다. 이들중 戰死-부상자가 25%인 35명이다. 일반 사병들의 戰死傷率보다 두 배나 높다. 이들이 위험한 一線 근무를 자원한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李 대통령에게 사고 운전병에 대한 선처를 부탁하였던 미군 대위 짐 하우스맨은 회고록에서
    이런 뼈아픈 지적을 했다.
      
       〈하버드 대학의 古風어린 교내 예배당 벽에는 한국전에 목숨을 바친 하버드 출신 병사들 이름이 銅板으로 새겨져 있다. 미국은 한 도시에서 한 사람이 나올까 말까 한 '미국의 희망'들을 한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내보냈다. 교수들도 참전해 더러 전사했다.
    한국에서도 많은 학도병들이 戰死했다. 한국에선, 존경하는 소대장님, 용감한 대대장님, 그리고 생명을 던져 陣地를 지켜낸 병사들의 얘기는 입으로만 전해질 뿐 그들을 기릴 수 있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한국은 戰後 팔을 잃은 국회의원, 눈이 날아간 국방장관을 갖지 못했다.
    행사장이나 연회장 같은 데서 한국전 戰傷者들을 만나 본 적도 없다.〉.
      
       많은 한국인들은 5만4000명의 미군 戰死者, 10만 명의 미군 부상자가 흘린 피 위에서 지금도 安保무임승차를 즐기면서 웰빙에 注力한다.
    은혜를 모르는 한국인, 자기를 지키기 위한 싸움도 부끄럽게 생각하는 한국인.
    천안함 爆沈이 북한소행이란 사실을 부정하는 국민들이 30%나 되는 나라는 망하는 게 정상이다. 그런 나라가 아직 망하지 않은 것도 美軍 덕분이다.
    '살찐 돼지'처럼 사는 국민이란 욕을 먹지 않으려면 내가 死守해야 할 陣地는 어디인지부터 알아놓아야 한다. 세월호 선장은 자신의 陣地를 버린 사람이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