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7일 오전 세월호에 대한 구조작업이 재개됐다. ⓒ연합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17일 오전 세월호에 대한 구조작업이 재개됐다. ⓒ연합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58분, 해경은 “여객선이 침몰하고 있다”는 신고를 접수했다.
    사고 현장은 전남 진도군 병풍도 인근 해상,
    사고 선박은 청해진 해운 소속으로 인천에서 제주로 가던 카페리 ‘세월호’였다.

    길이 146미터, 폭 22미터, 6,835톤 무게의 거대한 여객선은 순식간에 기울기 시작했다.
    구조작업을 시작한 지 24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475명의 승객들 중
    9명(학생 5명)은 숨진 채로 발견됐고, 175명(학생 75명)은 구조됐다.
    하지만 291명은 여전히 ‘실종 상태’다.
    이 가운데 대부분(245명)은 제주로 수학여행을 가던 안산 단원고 학생들이다.

    이 사고를 본 국민들은
    1993년 10월 10일 오전 10시 10분 전북 부안군 위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서해페리호’ 사고를 떠올렸다.


    비교되는 ‘세월호’와 ‘서해페리호’


    세월호는 국내선 여객선 중 손에 꼽힐 만큼 커다란 배다.
    승객 정원 921명, 150대의 승용차와 60대의 5톤 트럭을 싣고
    매주 4번 인천과 제주를 오가는 페리호다.

    육지와 가까운 바다에서는 웬만한 풍랑에도 크게 요동치지도 않을 크기다.

    실종 또는 사상자 수에서 비교될 수 있는
    서해페리호는 110톤에 불과한 배였다.

    사실 여객선이라고 부르기도 초라한 작은 배였다.
    여기에 정원 221명보다 141명을 초과한 승객들을 태우고
    풍랑이 거친 바다를 운항하다 사고를 당했다.

    두 사고 모두 엄청난 인명피해를 낸 점에서는 비슷하다.
    하지만 승무원, 특히 선장의 태도는 전혀 달랐다.

    서해페리호 사고 직후 주요 언론들은
    “선장과 승무원들은 무사히 도망갔다”는 오보를 냈다.

    이 때문에 경찰이 승무원을 지명수배하고,
    언론은 선장과 승무원들을 비난했지만,
    나중에 선장을 포함한 승무원 7명 전원의 시신이 배 안에서 발견됐다.

    이후 “승무원들은 승객들의 탈출이 먼저라며
    배가 침몰하는 순간까지 남아 있었다”는 생존자들의 증언이 나와
    언론들이 국민들로부터 큰 비난을 받았다.

  • ▲ 1993년 인양되는 서해페리호. 이 배 선장과 승무원은 세월호의 그들과는 달랐다. [사진: 당시 신문보도 캡쳐]
    ▲ 1993년 인양되는 서해페리호. 이 배 선장과 승무원은 세월호의 그들과는 달랐다. [사진: 당시 신문보도 캡쳐]

    반면 21년 만에 일어난 세월호 침몰 사고에서
    선장과 승무원들의 태도는 정반대였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배가 왼쪽으로 기울고 있음에도
    선장과 승무원들은 “구명장비를 입고 선실에서 대기하라”는 방송만 해댔다.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배가 급속히 기울어지며 침몰할 때도
    “선실에서 대기하라”는 방송은 이어졌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가장 먼저 배를 버리고 도망갔다.

    30여 명의 승무원 가운데 방송요원이었던 故박지영 씨(여, 22)만이
    유일하게 승객들의 탈출을 돕다 숨졌다.

    박 씨는 선실 곳곳을 돌며 흩어져 있는 구명조끼 등을 거둬
    자신은 입지 않고 승객들에게 나눠주며 “빨리 대피하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2012년 입학했던 충남의 한 대학을 휴학하고
    배에 탔던 故박지영 씨는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수십여 명을 구했다.

  • ▲ 수십여 명의 승객을 구하고 숨진 故박지영 씨. [사진: 청해진 해운]
    ▲ 수십여 명의 승객을 구하고 숨진 故박지영 씨. [사진: 청해진 해운]

    그가 구조한 한 학생은
    “언니는 왜 구명조끼 안 입느냐고 물어보니까
    ‘선원들은 맨 마지막이다.
    너희 친구들 다 구해주고 나중에 난 나갈게’라고 답했다”
    며 울었다.

    한편 배에서 가장 먼저 탈출한 것으로 알려진 세월호 선장은
    언론과 인터뷰를 하면서 젖은 돈을 말리는 등
    아무런 책임감도 느끼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국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 ▲ 해경이 세월호에 탄 사람들을 구조하는 모습. 세월호 선장은 가장 먼저 구조됐다고 목포해경이 밝혔다. ⓒ연합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해경이 세월호에 탄 사람들을 구조하는 모습. 세월호 선장은 가장 먼저 구조됐다고 목포해경이 밝혔다. ⓒ연합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세월호 사건, 만약 이탈리아였다면?


    전 세계 ‘뱃사람’에게 배는 자신의 생명줄이다.
    그 중에서도 선장은 사고를 당할 경우 끝까지 남아
    승객과 승무원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게
    일종의 전통이자 자존심처럼 여겨지고 있다.

    1912년 4월 15일 새벽, 대서양으로 떠내려 온 북극해 빙산과 부딪혀
    1,513명이 사망한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당시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은 마지막까지 승객 탈출을 지휘한 뒤 숨졌다.

    스미스 선장의 고향인
    영국 리치필드에는 그의 동상이 서 있다.
    동상 아래 동판에는
    ‘영국인답게 행동하라(Be British)’는 그의 마지막 말이 새겨져 있다.

    사고 이후 타이타닉 호의 주인이었던
    브루스 이스메이 화이트 스타라인 회장은
    구명정을 타고 살아남았다.

    당시 언론들은 브루스 이스메이 회장이
    배가 빙산과 충돌한 뒤에도 선장에게 속도를 올리라고 압박,
    참사를 일으켰다고 비난했다.

  • ▲ 1912년 4월 15일 새벽, 빙산과 부딪혀 침몰한 타이타닉호. [자료사진]
    ▲ 1912년 4월 15일 새벽, 빙산과 부딪혀 침몰한 타이타닉호. [자료사진]

    배에서 승무원들이 승객을 제쳐두고 먼저 탈출하는 것은
    일종의 범죄로 취급당하기도 한다.

    2012년 1월 이탈리아에서 승객 4,229명을 태운
    호화 유람선 코스타 콩코르디아호가 암초에 부딪혀 좌초됐다.
    이 사고로 승객 32명이 사망했다.

    사고 직후 승객보다 먼저 탈출한 선장 셰티노에 대해
    이탈리아 검찰은 과실치사 등의 혐의와 함께
    300여 명의 남은 승객을 ‘버리고 도망친’ 데 대해 직무유기죄를 적용,
    승객 1인당 8년형씩 총 2,697년의 징역형을 구형했다.
    이 사건은 지금도 재판을 진행 중이라고 한다.

  • ▲ 좌초된 유람선 코스타 콩코르디아호. [사진: 외신보도 캡쳐]
    ▲ 좌초된 유람선 코스타 콩코르디아호. [사진: 외신보도 캡쳐]

    반면 서구사회와 다른 생각을 가진 곳에서는
    세월호 선장이나 승무원과 같은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2006년 2월, 사우디아라비아를 출발해
    이집트로 향하던 페리호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싣고 있던 트럭에서 발생한 화재가 원인이었다고 한다.

    이 사고로 1,400여 명의 승객과 승무원 중 1,000여 명이 죽거나 실종됐다.

    문제는 이번 세월호 침몰 사고와 비슷한
    당시 페리호 선장과 승무원들의 행동이었다.

    승객들이 화재 사실을 승무원들에게 알렸지만
    승무원들은 “걱정할 것 없다. 괜찮을 것”이라고 말하며
    구명조끼까지 벗으라고 했다고 한다.

    승무원들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화재를 진압하려 했지만
    불길이 더욱 번지자 승객을 버리고
    선장과 함께 구명보트를 타고 탈출했다고 한다.

  • ▲ 2006년 2월 이집트 해안에서 일어난 페리호 화재 모습. [사진: 당시 알 아라비야 보도화면 캡쳐]
    ▲ 2006년 2월 이집트 해안에서 일어난 페리호 화재 모습. [사진: 당시 알 아라비야 보도화면 캡쳐]

    세월호 침몰이 참사가 된 가장 큰 원인, 책임감 결여


    세월호 침몰 사고를 보노라면
    타이타닉호나 서해페리호 사고 보다는
    이집트행 페리호 사고와 너무 비슷하게 느껴진다.

    사고 자체 보다 ‘배를 책임진 사람들’의 행동들 때문이다.

    1993년 서해페리호 사고 당시 선장 등 7명의 승무원들은
    행락객들이 귀가하지 못할 것을 우려해
    정원을 초과해 태우고 출항하는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사고 직후 자신들의 목숨을 바쳐가며 ‘의무’를 다 했다.

    1912년 타이타닉호 사고 당시에는 선장 등 승무원은 물론
    남성 승객 대부분이 사망했다.

    당시 “타이타닉호는 침몰하지 않는 배”라는 자만 때문에
    구명장비를 소수만 배치해서다.

    이때 1등석 승객 중 어린이 전원과 여성 144명 중 139명,
    2등석 승객 중 여성 80%가 목숨을 건졌다.

    반면 1등석 승객 중 남성 70%, 2등석 승객 중 남성 90%가 사망했다.
    숨진 승객 가운데는 당시 미국 최고의 부자로 불렸던
    존 제이콥 애스터, 벤자민 구겐하임 등도 있었다.

    반면 살아남은 타이타닉호의 소유주 브루스 이스메이는
    “캄캄한 밤중의 바다에서 끔찍한 죽음을 맞는 건 바닷사람의 의무이고,
    군중과 함께 도망치는 건 船主(선주)의 고귀한 권리인가?”
    라는
    영국 사회의 조롱과 언론의 비난을 받고 상류사회에서 매장 당했다.

    이번 세월호 침몰 사고와 도망친 선장, 승무원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마음도 
    브루스 이스메이를 비난했던 영국 언론, 사회의 그것과 비슷하다.

    국민들의 마음을 더욱 참담하게 만드는 것은
    선장과 승무원들이 맨 처음 탈출했다는 것뿐만이 아니다.

  • ▲ 경찰에 소환되는 세월호 선장과 승무원들. [16일 방송 보도화면 캡쳐]
    ▲ 경찰에 소환되는 세월호 선장과 승무원들. [16일 방송 보도화면 캡쳐]

    첫 신고자가 세월호 선장이나 승무원이 아니라
    “배가 가라앉고 있다”는 학생의 연락을 받은 학부모였다는 점,
    침몰 신고가 있기 1시간 30분 전부터 배가 제대로 운항을 하지 못했음에도
    선장이나 승무원들이 승객들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점,
    배가 가라앉기 시작했는데도 승객들이 탈출하도록 돕지 않았다는 점 등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분노를 넘어 허탈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현재 언론들은 세월호 침몰 사고의 원인으로
    수많은 화물을 실은 채 고정을 허술하게 한채 급격히 방향을 선회,
    무게중심을 잃은 것 때문이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이번 세월호 침몰 사고에서
    수백 명 이상의 실종․사상자를 만들어 낸 주범은
    ‘무게중심을 잃은 화물’이 아니라,
    사고 발생 당시 빠른 대처를 하지 않고
    책임감과 양심을 배와 함께 바닷물 속에 던져버린
    ‘선장과 승무원’이 아닌가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