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런던·옥스퍼드=연합뉴스)  "세금을 더 걷지 않고 복지국가를 만든다고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세금을 더 걷어도 이유와 쓰임새를 투명하게 밝히면 조세저항을 줄일 수 있습니다."

    영국의 세계적 명문 옥스퍼드대에서 사회정책학을 가르치는 마틴 실렙-카이저 교수와 프란 베넷 선임연구원은 지난 7일(현지시간) 한국여기자협회 프로그램을 통해 영국 복지개혁 취재에 나선 한국 기자들에게 "증세 없는 복지국가 실현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실렙-카이저 교수는 각국의 복지유형을 설명하면서 스웨덴과 독일 등 성공한 유럽 복지국가들이 세금을 충분히 걷은 것과 달리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의 국가에서는 복지수준보다 세금을 덜 걷음으로써 오늘날 사회적 비용 대비 높은 빈곤율이 초래됐다고 지적했다.

    한국 정부의 '증세 없는 복지 확대' 기조에 대해서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실렙-카이저 교수는 "한국이 복지국가 실현을 목표로 한다면 증세는 불가피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 등과 비슷한 함정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또 경제성장이나 정부 재정운용의 효율성을 끌어올리는 것으로 증세 대체효과를 낼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추가 세수 확보 없는 복지 확대는 성립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실렙-카이저 교수는 "경제성장은 무한정 계속될 수 없고 재정운용 효율화에도 한계가 있다"며 "증세 없는 복지국가를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한국은 상당수 국민이 세금을 내지 않는 등 일본과 유사한 문제를 안고 있다. 특히 고소득층일수록 이런 경향이 심하고 탈세해도 처벌을 받지 않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버락 오바마 정권의 '부자증세'와 정부가 연기금에 손댈 수 없게 한 미국의 사례를 참고할만하다고 언급했다.

    영국의 최근 복지개혁 내용을 소개한 베넷 선임연구원은 영국 국민들이 세금 자체에는 거부감을 느끼더라도 국민보험(NI)이나 국민건강보험(NHS) 등에 드는 '구체적인 복지 비용'에는 반발이 적다고 설명했다. 세금을 낸 만큼 복지로 돌려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베넷 선임연구원은 "몇년 전 복지에서 왜 세금이 금기시 되는지를 연구한 적이 있는데 정부가 무슨 이유로 세금이 더 필요하고 어떻게, 얼마나 걷을 것인지를 명확히 밝히면 오히려 국민으로부터 긍정적 반응을 얻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반면 납세자들의 의식하지 못하도록 간접세 등 '몰래 떼는 세금'(stealth tax)을 부과할 경우 국민들이 곧 알아채고 '속았다'는 느낌을 가지는 등 조세 저항이 더 커지게 된다는 지적이다.

    베넷 선임연구원은 "낮은 세금이 적은 복지비용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세금은 덜 내더라도 개인의 부담이 커져 복지비용은 더 많아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영국인들은 보수당 연립정부 들어 가속화하고 있는 복지 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자국 복지제도에 대해 여전히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비영리 연구기관 데모스(DEMOS)의 여론조사 결과 영국 복지제도를 '자랑스럽다'고 생각하는 응답자는 2000년 이후 꾸준히 50%를 웃도는 것으로 집계됐다. 다만 노년층과 중·장년층의 지지도가 젊은층보다 높게 나타나는 등 세대별 차이는 있었다.

    또다른 연구기관 IPPR 조사에서는 상위 15% 고소득층에 대한 아동수당 삭감과 복지수당 상한제 등 개혁안에 찬성하는 의견이 70% 이상으로 높게 나타났으나, NHS나 연금 등 현행 제도에 대한 지지 역시 확고했다고 소개했다.

    영국은 1942년 '베버리지 보고서'를 기반으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보장하는 사회복지체제를 구축한 국가로 2013∼2014년 복지 예산이 3천880억파운드(675조원 가량)로 전체 정부 예산의 53.9%에 이른다. 무상의료 제도인 NHS에 드는 예산만도 전체의 19%인 1천370억파운드(238조원)다.

    이때문에 영국은 최근 6개 복지수당과 다양한 공제제도를 하나로 합친 '통합수당'(유니버설 크레딧)을 도입하고 NHS 구조를 간소화하는 등 개혁에 나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