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거 결과에 대한 국민의 분노 폭발

       선거 당일인 3월 15일에는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 그것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7명이 사망했다.
       이와 같이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이승만과 이기붕의 당선이 선포되었다. 
       이승만은 유력한 야당 후보가 없는 상태에서 유효투표의 97%를 얻었다. 
       그러나 이기붕이 76%의 득표로 당선되었다는 발표가 있자, 여론은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뒤이어 부정선거의 증거가 폭로되면서 국민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이때 마산에서 또다시 심각한 사건이 일어났다. 4월 11일, 이전의 시위 때 행방불명되었던 한 중학생의 시신이 바다 위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것을 계기로 시위는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정부는 시위 배후에 공산주의자들이 개입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는 사이에 시위의 중심은 서울로 바뀌었다. 4월 18일의 고려대 학생들의 시위로 시작된 서울 시위는 4월 19일에 절정을 이루었다.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대규모로 시위에 참가한 것이다. 학생 시위대는 “부정선거 다시 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경무대를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그것을 저지하려는 경찰의 발포로 180여 명 이상이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사태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
    
  당황한 정부는 선거를 다시 하겠다고 발표했지만, 학생시위는 그치지 않았다. 
  미국도 한국 정부의 강경 진압을 비판했다.   
  게엄령이 선포로 군대가 출동했지만, 계엄사령관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은 평화적 시위는 보장한다는 말로 시위대에 동정을 표시했다. 
   그 때문에 시위대가 군대 차량에 올라가 시위를 하는 모습도 보였다. 
   여기에 덧붙여 4월 25일에는 미국대사관의 격려를 받은 대학교수단이 학생들을 지지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피의 값에 보답하라”는 현수막을 들고 시위에 참가했다.

  높은 나이로 국민 대중과 직접 소통이 별로 없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6일에 가서야 유혈 사태가 일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상황을 어느 정도 정확히 파악하게 된 이승만은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것”이라고 말하면서 시위에 동정을 표시했다. 
   그는 청년 시절에 독립협회 행동대원으로서 조선왕조의 부패에 대항해 시위를 주도했던 자신의 모습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병원을 직접 찾아가 부상당한 학생들을 찾아갔다. 
   그는 학생들의 처참한 상태를 보고, “학생들이 왜 이렇게 되었어? 부정을 왜 해?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이 젊은 학생들은 참으로 장하다!”는 말로 위로를 했다.
  
  • ▲ 서울대 병원으로 부상학생들을 위문하며 눈물을 흘리는 이승만 대통령.
    ▲ 서울대 병원으로 부상학생들을 위문하며 눈물을 흘리는 이승만 대통령.
  •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겠다"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하야(下野)하겠다.”   
       4월 27일 이승만은 이와 같은 성명을 발표하고 사임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자 경무대에 피신해 있던 이기붕 가족이 자살했다. 그에 따라 자유당 정권의 핵심 세력이 흩어지게 되었다. 

       이승만이 대통령직을 물러나게 만드는 데는 자신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첬다는 몇 사람들의 주장이 있다. 
       그러나 당시 국방장관으로 마지막까지 대통령 곁을 지켰던 김정렬(金貞烈) 장군은 그의 회고록 <항공의 경종>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누구의 압력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스스로 하야 결단을 내렸다고 증언하고 있다. 

       따라서 이승만은 혁명으로 타도된 독재자로 보는 시각은 크게 수정해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김정렬 국방장관의 진술에 따르면, 4월 19일에 대대적인 학생 데모가 일어난 이후 국무위원들은 줄곧 중앙청내 국무위원실에서 침식을 같이하며 사태 수습에 몰두하고 있었다. 
      4월 26일 아침 9시 시위대가 시청 앞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그는 경무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상 계엄령의 시한이 닥아와 기간을 연장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중앙청을 나서려고 하는 데, 매카나기 미국대사로부터 대통령을 만나게 해달라는 전화가 왔다. 경무대 비서실로 수차례 연락했으나 회답이 없다는 것이었다. 
      경무대에 도착해 대통령에게 어제 이기붕 국회의장 집이 습격을 당한 것등을 포함해 상황을 간략히 보고했다.
       대통령은 보고를 듣고는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그래. 오늘은 한 사람도 다치게 해서는 안 되네.”라는 짤막한 대답을 했다. 
       그리고 나서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하는 질문을 여러 차례 해왔다.
    그리고는 “내가 그만두면 한 사람도 안 다치겠지?”하고 묻고는 대답을 독촉했다. 
       그러자 김정렬 국방장관은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무의식 중에,
    “각하, 저희들이 보좌를 잘못하여 이렇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대통령은, “그래, 그렇게 하지. 이것을 속히 사람들에게 알리지.” 하고는 박찬일 비서관을 불렀다.
  • ▲ 서울대 병원으로 부상학생들을 위문하며 눈물을 흘리는 이승만 대통령.
    물러나는 순간까지 공산주의를 경계

       그리고는, “내가 부를 터이니 받아 쓰게.”하고는,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돌아와서 우리 여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냈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원한이 없다. . . . 공산주의에 대하여서는 부단한 주의를 하라.” 
    는 요지의 성명서를 구술했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인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성명서였던 것이다. 

       김정렬 장관은 중앙청에 있는 최치환 공보실장을 전화로 불러, 잠시 후에 중대한 성명이 나갈테니 미리 예고 방송을 해 놓으라고 전달했다. 
       그리고는 정리된 하야 성명서를 가지고 새로 외무부 장관이 된 허정과 함께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가 내용을 확인받았다. 
       그리고 대통령의 하야 성명은 전파를 통해서 전국에 퍼져 나갔다. 
       잠시후 계엄사령관 송요찬 장군이 대학생 대표들을 데리고 경무대로 들어 왔다. 
       이와 거의 동시에 매카나기 대사가 미8군사령관 매그루더 장군과 함께 경무대에 도착하였다. 
       이윽고 대통령이 학생들과의 회견을 마치고 응접실로 들어오자, 매카나기 대사는 “대통령 각하께서는 한국의 조지 워싱턴 이십니다.”라고 찬사를 올렸다. 
       그러자 대통령은 우리말로 “저 사람 무슨 잠꼬대야?‘라고 혼자 말을 했다.  
    이미 하야 성명이 나간 후였기 때문에, 미국대사는 완전히 무색해져서 별 대화도 없이 잠시 앉아 있다가 돌아가고 말았다. 

       하야 성명서가 발표되자, 데모대의 대부분은 만세를 부르고 해산했다.   
       대통령의 결단은 누가 권고해서 한 것이 아니고, 대통령 스스로의 판단에 의한 독자적인 것이었다. 이승만이 아니었다면 결코 당시에 하야 성명이 나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김정렬 국방장관은 회고하고 있다.      

    이승만의 지지자인 허정이 과도내각을 이끌다

       이승만은 대통령직을 사임하는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공산주의의 위협을 경고하는 당부를 한 바 있었다.  
       1960년 4월 27일 이승만은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 사저로 갔다. 
       가는 길 옆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노(老) 애국자를 환송했다. 잘못이 있다면 여러 해 전에 대통령 자리를 물러나지 못한 것이 잘못이었다.   
  • ▲ 이승만이 돌아온 이화장 벽에는 시민들이 '만수무강'을 비는 벽도들을 붙여 환영했다.
    ▲ 이승만이 돌아온 이화장 벽에는 시민들이 '만수무강'을 비는 벽도들을 붙여 환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