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싸운 남성 도운 여성 독립투사 있었다"
  • 이승만포럼이 열리는 서울 중구 정동 제일교회 아펜젤러홀 입구ⓒ윤희성 뉴데일리 기자
    ▲ 이승만포럼이 열리는 서울 중구 정동 제일교회 아펜젤러홀 입구ⓒ윤희성 뉴데일리 기자


    부패한 관리들에 대한 반감으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 훗날 의병의 기초가 됐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를 시작으로 의병들은 항일 성격을 띄게 됐고 고종이 실질적 통치권을 잃게 된 1905년 을사조약에도 1910년 한일병탄조약에도 일본에 맞선 의병은 일어났다. 그리고 1945년 해방까지 의병들은 해외에서 무장 투쟁을 지속했다. 

    해외에서 투쟁한 독립운동가들을 도운 사람들은 많지만 우리 국사학자들은 '여성'을 중심으로 연구하지는 않았다.  지난 10일 서울 중구 정동 정동제일감리교회 아펜젤러홀에서 열린 제38회 '이승만포럼'에 발표자로 나선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 소장은 독립운동을 도운 하와이 이민 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 소장ⓒ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 소장ⓒ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1919년 3월15일 대한부인구제회를 결성한 하와이 여성들은
독립운동으로 부상 당한 사람을 도왔다. 

대한부인구제회는 발족 후 첫 사업으로 350달러를 모금해
'대한독립선언서' 컬러포스터를 3,000장 인쇄해 팔았고 2,000달러의 순이익금을 냈다. 

이 중 800달러는 상해임시정부에 보냈고 남은 1,200달러에 300달러를 더 보태
3.1운동 당시 사상당한 애국지사들을 위한 구제금을 고국에 보냈다. 

대한부인구제회는 1921년에도 기금을 모아 만주에 있던
대한군정서와 대한독립군 총사령부에 출정군인 구호금 명목으로 보냈다.
중경의 한국광복군 편성 후원금으로도 보냈다"

   - 이덕희 소장


  • 대한부인구제회는 발족 후 첫 사업으로 350달러를 모금해 '대한독립선언서' 컬러포스터를 3,000장 인쇄해 팔았고 2,000달러의 순이익금을 냈다. 이 중 800달러는 상해임시정부에 보냈고 남은 1,200달러에 300달러를 더 보태 3.1운동 당시 사상당한 애국지사들을 위한 구제금을 고국에 보냈다(사진=이덕희 소장 제공)
    ▲ 대한부인구제회는 발족 후 첫 사업으로 350달러를 모금해 '대한독립선언서' 컬러포스터를 3,000장 인쇄해 팔았고 2,000달러의 순이익금을 냈다. 이 중 800달러는 상해임시정부에 보냈고 남은 1,200달러에 300달러를 더 보태 3.1운동 당시 사상당한 애국지사들을 위한 구제금을 고국에 보냈다(사진=이덕희 소장 제공)

  •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의 노동자로 한인들이 이민을 떠난 건 대한제국 시절인 1903년이었다. 사탕수수농장 이민이 끝난 1905년 8월 집계에 따르면 성인남자가 6,200 여명, 부녀자가 640명, 어린아이가 550명이었다. 1910년 하와이 한인 인구조사에 따르면  미국 본토로 옮겨간 2,000 여명, 환국한 1,000 여명을 제외하고 4,533명의 한인이 하와이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 중 부녀자들은 400 여명이었다. 
    1910년부터 1924년까지 하와이로 이민 온 사람들은 859명이었다. 그 중 여성이 800명이었다. 여성이 많았던 이유는 이민 조건이 노동자가 아니라 독신 남성들과 결혼할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하와이 이민자들은 일본 식민지로 전락한 고국을 돌아보며 타향에서 무엇을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1903년 하와이로 들어온 한인들은 1919년 3.1운동 소식에 자극을 받았다. 그리고 본격적인 구국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들은 기금을 보내 독립운동을 하는 단체를 도왔다. 기금을 만든 멤버가 여성들이었다. 1903년부터 1905년까지 사탕수수농장 노동자로 하와이에 이민간 남성들은 1919년에는 40대에 이르렀다. 비록 압도적으로 남성들이 많았지만 노동력에서 여성들을 따라오지 못했다. 여성들은 1910년부터 1924년까지 800 여명의 젊은 여성들이 하와이로 향했고 자연스럽게 1천여명을 조금 넘는 소수의 여성들이 경제활동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여성들이 생업에 많이 종사했고 이들이 낸 기금이 독립운동가들에게 지급됐다. 


  • 대한부인구제회는 발족 후 꾸준한 수익 사업을 진행했다. 사진은 연극을 한 대한부인구제회 멤버들의 모습이다(사진=이덕희 소장 제공)
    ▲ 대한부인구제회는 발족 후 꾸준한 수익 사업을 진행했다. 사진은 연극을 한 대한부인구제회 멤버들의 모습이다(사진=이덕희 소장 제공)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 소장은 1941년 평양에서 출생해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 졸업했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에서 사회학 석사와 남가주대학교에서 도시계획과 석사학위를 받은 그녀는 하와이에서 30 여년간 환경계획가로 활동하면서 40 여편의 환경계획 보고서와 환경영향평가서를 발표했다. 

  • 하와이 한인 이민사 연구에 몰두한 이덕희 소장은 <이승만과 하와이 감리교회, 그리고 갈등:1913-1918>, <하와이 감리교회의 초기 교인들>, <하와이의 한글 언론, 1904~1970>, <하와이 한인들이 하와이 감리교회에 끼친 영향:1903~1952>, <하와이 한인 여성단체들의 활동, 1903~1945>, <초기 하와이 한인들에 대한 견해>등의 논문을 발표했고 <하와이 이민 100년, 그들은 어떻게 살았나>(2003), <한인기독교회·한인기독학원·대한동지회>(2008)를 발간했다.

    대한민국 건국 과정을 알리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업적을 연구하는 (사)건국이념보급회가 주최하는 '이승만포럼'은 38번째를 맞았다. 대한민국 바로세우기에 앞장서는 언론사 <뉴데일리>와 대한민국사랑회(회장 김길자)가 후원한다. 

    [뉴데일리=윤희성 기자 ndy@new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