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평등 주장한 이승만, 하와이 한인학교서 남녀공학제 최초 도입
  •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38살부터 하와이에서 25년을 보냈다. 조지워싱턴大 학사, 하버드大 정치학 석사, 프린스턴大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대한제국으로 돌아갔던 이승만은 1913년 하와이行을 결심하고 대한제국을 떠나 그해 2월3일 하와이에 도착했다.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육영사업에 매진했다. 25년을 머물면서 20년 이상을  '한인' 학교의 교장으로 일했다. 이승만은 남녀평등을 주장하며 실천했다.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여성을 위한 학교를 만들었고 남녀공학제를 최초로 도입하는 교육실험도 하와이에서 했다.

    지난 10일 서울 중구 정동 정동제일감리교회 아펜젤러홀에서 열린 제38회 '이승만포럼'에 발표자로 나선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 소장은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거주했던 25년간의 일들 중 교육사업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1913년 2월3일, 
    38살의 이승만을 '대한인국민회'가 하와이로 초청했다. 

    기독교인 이승만은 <한국교회핍박>이라는 책을 하와이에서 발행했고 
    하와이 이민자들의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지도했다.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는 신앙심이 깊고 
    미국의 조지워싱턴大 학사, 하버드大 정치학 석사, 프린스턴大 정치학 박사 학위를 딴 
    이승만을 '한인기숙학교' 교장으로 임명(1913년 8월26일)했다"

       - 이덕희 소장




  •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 소장ⓒ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 소장ⓒ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대한제국의 대한人이 미국 하와이로 이민을 간 건 1903년 1월13일이다. 미국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해외 이민자들을 받았고 대한제국은 1905년 8월까지 7,400 여명의 한인들의 이민을 윤허했다. 이민은 국가간의 협약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1882년 조선이 미국과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에 의해 1885년 미국의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왔고 1903에서 1905년까지 하와이로 이민자를 보낼 수 있었다.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이미 해외에서 이민 노동자를 받아들였다. 대한제국의 한인들의 이민이 필요했던 이유는 일본 이민 노동자 비율이 높아 집단 파업을 할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이민 노동자들을 같은 민족끼리 함께 생활했다. 대한제국에서 이민간 한인들도 한 마을에 정착했고 마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동회(洞會)를 조직하고 동장을 두었다. 1903년 8월 최초의 조직인 '신민회'를 만든 한인들은 다양한 조직을 꾸준히 결성했다. 1907년에 이르러서는 24개의 조직이 생겼고 이들 조직을 총망라하는 '한인합성협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1909년 '대한인국민회'로 재결성했다. 

    하와이에 거주하는 인구는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하는 백인과 노동자인 일본인, 한인 등이 주를 이뤘다. 하와이 이민 한인들은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한인학교 건립을 갈망했고 하와이 감리교회의 도움으로 1906년  9월 '한인기숙학교'를 개교했다. 하와이로 이민간 한인들은 대부분 교인들이 됐었다. 감리교회가 한인들의 교육사업에 자금을 내고 도움을 준 것은 한인들이 교회에 우호적이었기 때문이다. 

    '한인기숙학교'는 남자 학교로 여성은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초등 1학년부터 중등 2학년까지 8개 학급에 등록한 65명의 남학생들과 미국인 교사 3명과 한국인 교사 2명으로 '한인기숙학교'는 시작했다.  학비는 무료였고 기숙사 비용만 받았다.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가 교육에 관한 모든 비용을 댔지만 한인 노동자들도 '한인기숙학교'의 학생들을 위해 장학금을 모아 주었고 기숙사 수리비도 기부하곤 했다. 

    1913년 2월3일, 38살의 이승만을 '대한인국민회'가 하와이로 초청했다. 기독교인 이승만은 <한국교회핍박>이라는 책을 하와이에서 발행했고 하와이 이민자들의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지도했다.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는 신앙심이 깊고 미국의 조지워싱턴大 학사, 하버드大 정치학 석사, 프린스턴大 정치학 박사 학위를 딴 이승만을 '한인기숙학교' 교장으로 임명(1913년 8월26일)했다. 

    2월에 하와이에 도착해 교장이 된 8월까지 이승만은 하와이 곳곳을 돌아보며 여자 아이들이 학교에 나오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학교에 입학하도록 권유했다. 또 교육의 중요성을 잘 알았던 이승만은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다녔다. 그 결과 9월 학기가 시작되자 5명의 여학생이 입학했고 지난해에 비해 남학생 수가 3배 증가했다. 여학생들은 기숙사가 없었기에 임시로 감리교본부 여선교회가 운영하던 웨슬리홈에 머물렀다. 

    '한인기숙학교' 여학생은 1914년 9월 학기에 24명으로 늘었고 이승만은 더 이상 감리교본부 여선교회의 웨슬리홈에 신세를 지기 힘들었다. 다행히 한인들의 성금으로 학교 근처에 조그마한 집을 빌려 임시 기숙사를 사용할 수 있었다. 1915년 여학생 교육 수요는 더 늘었고 '한인기숙학교'에서 더 이상 학생을 수용하기는 힘들었다. 이승만은 한인들의 도움을 받아 여학생들을 위한 '한인여학원'을 개교했다. 이승만은 '한인기숙학교' 교장에 물러났고 '한인여학원' 교장으로 보직을 옮겼다. 1918년에 이르러서는 '한인여학원'을 '한인기독학원'으로 개명하고 남녀공학 8년제 학교로 만들었다. 

    '한인기독학원'은 1947년까지 존속됐다. 1953년 '한인기독학원' 부지를 판매한 금액으로 인천의 '인'과 하와이의 '하'를 따서 인하대학교를 건설했다. 25년간 하와이에서 생활한 이승만의 교육자로서의 삶도 그렇게 마감됐다. 이승만은 남녀공학을 최초로 도입한 교육자였다. 또 여성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당시로써는 상당히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젊은이었다. 이승만은 교육 사업을 하면서도 단 한번도 급여를 받지 않았다. 1913년부터 1915년까지 '한인기숙학원'의 교장, 1915년부터 1918년가지 '한인여학원'의 교장, 1918년부터 1939년 워싱턴으로 떠나기 전까지 '한인기독학원'의 교장으로 20 여년간 육영사업에 종사했다.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 소장은 1941년 평양에서 출생해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 졸업했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에서 사회학 석사와 남가주대학교에서 도시계획과 석사학위를 받은 그녀는 하와이에서 30 여년간 환경계획가로 활동하면서 40 여편의 환경계획 보고서와 환경영향평가서를 발표했다. 

    하와이 한인 이민사 연구에 몰두한 이덕희 소장은 <이승만과 하와이 감리교회, 그리고 갈등:1913-1918>, <하와이 감리교회의 초기 교인들>, <하와이의 한글 언론, 1904~1970>, <하와이 한인들이 하와이 감리교회에 끼친 영향:1903~1952>, <하와이 한인 여성단체들의 활동, 1903~1945>, <초기 하와이 한인들에 대한 견해>등의 논문을 발표했고 <하와이 이민 100년, 그들은 어떻게 살았나>(2003), <한인기독교회·한인기독학원·대한동지회>(2008)를 발간했다.

    대한민국 건국 과정을 알리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업적을 연구하는 (사)건국이념보급회가 주최하는 '이승만포럼'은 38번째를 맞았다. 대한민국 바로세우기에 앞장서는 언론사 <뉴데일리>와 대한민국사랑회(회장 김길자)가 후원한다. 


    [뉴데일리=윤희성 기자 ndy@new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