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탄신 139주년, 거대한 人格 李承晩을 말한다

좌담: 人間 李承晩의 크기와 깊이
(1995년 2월호 월간조선)

이동욱
   
   東西洋을 하나의 人格 속에 통합
   
   『대한민국을 들어엎기 위해 李承晩을 매도하는 親北세력이 역사교육을 망치고 있다』
   
   ●『주께서 너희를 자유케 하셨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쓰지 말라』라는 말을 애용한 巨人 
   ●東洋으로 西洋을 포용한 世界人 李承晩의 自由精神과 獨立精神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그는 自由민주주의 革命家였다
   ●해방후 『우리가 못나서 친일파 만들었다』면서 전체 민족을 통합하려 했다
     
   참석자: 徐廷柱 詩人
   許文道 前 통일원 장관
   李仁秀 명지대 敎授(李承晩 養子)
   李東昱 자유기고가(사회)
   사진: 李明元 朝鮮日報 출판사진부 記者
   
    동양이 서양을 포용한 미스터리
   
   해방이나 전쟁을 겪지 않았고, 4.19가 일어난 해에 태어난 필자와 같은 삼십대에게
李承晩이란 인물은 한낱 老欲의 독재자로 교육되어 왔다.
 그러나 사실을 확인해 본 필자가 느끼는 감정은 충격을 넘어선 분노였다.
그 분노란 그릇된 지식을 전해주고도 대접을 받고 있는 이 땅의 지식인들을 향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祖上이 惡人이었다고 믿지 않는다.
 어떤 족보도 始祖를 惡人으로 기록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祖上은 훌륭하다고 믿으며,모든 족보가 그 始祖를 찬양하기에 게으르지 않다. 그래야만 오늘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존재가치가 성립되고, 이들에게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는 근거가 되어준다. 

   그러나 한 나라를 세운 어른에게 半百年이 지난 동안 우리는 무수한 돌팔매질을 해 왔다.

그 無知의 세월을 지나는 동안 제대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未堂 徐廷柱 선생의 「雩南 李承晩傳」이 재출간됐다. 역사는 고맙게도 우리에게 대한민국의 始祖를 재인식할 기회를 허락한 셈이다.   未堂 선생의 「雩南 李承晩傳」은 李承晩 박사의 구술을 받아 1947년에 출간된 것으로 1945년까지의 雩南의 사생활과 독립운동사로 구성되어 있다.

 月刊朝鮮은 雩南을 직접 만나 본 徐廷柱 선생을 중심으로 許文道 전 통일원 장관과 雩南의 養子 李仁秀 박사를 모시고 未堂 선생의 사랑방에서 지난 3월10일 오후 2시부터 대담을 마련했다.
필자가 이 대담의 사회자 겸 정리자로 참석했다.

   司會: 이렇게 대담을 마련하게 된 이유는 雩南의 傳記를 읽고도 저같은 凡人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스무 살까지 漢學만을 한 분이 어떻게 서양문명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가 있었느냐 하는 부분과, 그러면서도 西歐쪽으로 기울지 않고 민족의 主體性과 自主性을 견지할 수 있었나 하는 점입니다.
   동양이 서양을 포용해 버린 미스터리와 雩南의 자주정신이 형성된 배경은 幼年시절에 그 열쇠가 있다고 봅니다. 직접 대면하셨고 전기 집필을 위해 생애 전반을 연구하셨던 未堂 선생님께 먼저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徐廷柱: 李承晩 어른은 主見이 철저했지. 어렸을 때 그 분은 어떤 개인으로부터의 영향을 받은 건 아니고, 주관성이 아주 강해서 이 나라에 내가 산다는 主見이 세워졌겠지. 그것이 이 분의 主見을 만들었고, 훗날 정치에 나타난 것이라고 봐요. 
   
   동․서양을 하나의 인격 속에 통합해 낸 인물
   
   許文道: 전통사회의 교육을 그 분은 본격적으로 다 받은 겁니다. 그 속에 忠도 있는데, 그것이 中國에 대한 忠이 아니고, 자기 나라의 임금에 대한 忠이지요. 그리고 四書三經 즉, 七書를 다 보았는데, 그 七書란 전통사회의 교양이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 동양 사회에서는 한평생 지도급 인사로 살아갈 수 있는 기본급 교양이 다 녹아 있는 겁니다. 그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李承晩 전시회에서나 올리버氏가 쓴 전기에도 雩南의 성격에 관해 「동양적인 교양과 서양적인 교양을 한 인격안에서 통합해 놓은 우리 世紀에 있어서의 특출한 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올리버氏가 그 전기를 쓸 때는 아직 아시아․태평양 時代란 말이 나오기 전입니다.
   지금까지 약 4백년 동안은 서양 중심의 세계였지요. 그런데 요즘은 세계 중심이 아시아․태평양으로 옮겨 온다고 모두가 예감하고 있습니다. 아시아․태평양 시대가 오면 雩南과 유사한 인격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결국 그렇게 되면 근대 서양의 합리주의가 한계에 부딪히고 동양의 老莊思想이나 華嚴經의 경구를 통해 그 한계를 극복해 보려고 할 것입니다. 바로 포스트 모더니즘이 그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雩南은 선구자입니다. 科擧를 본다는 것은 그 당시에 쌀 두어 말이라도 갖다 주어야 시험이라도 볼 수 있는, 그야말로 「빽」이라도 있어야 하는 시대인 셈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科擧를 여러 번 쳤다는 것은 동양적인 교양인으로서 지도자가 가져야 할 인격 교육을 철저히 다 받았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 서양적인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내었지요.

   司會: 웹스터 사전에는 통합성(integrity)이란 도덕적, 예술적, 종교적 가치에 대한 「타협하지 않는 가치」를 지닐 때 생긴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 이래로 많은 학자들이 인격의 통합성을 다뤄왔습니다. 비정상적인 사람을 다루다 보니 훌륭한 사람이란 어떤 심리상태를 가져야 하느냐에 초점이 모아진 결과였지요. 1985년 미국의 정신과 의사인 H․코흐트는 신념을 위해 始終一貫하는 사람에게는 내적인 힘과 존엄성 그리고 통합성이 있음을 발견하고 통합성이 있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임을 정의해 냅니다.
   동양의 理想的인 인간으로서의 君子가 서양에서는 통합성을 갖춘 사람(man of integrity)으로 대치됩니다. 雩南의 경우 어릴 때부터 이러한 싹이 보였다는 셈인데요.
   
   동양인으로서 완벽한 교양인
   
   徐廷柱: 이 분은 아마 보통 아이들이 가지기 어려운 자기 고집, 주견이있었던 것 같애.
호기심도 있었고, 어려움도 극복해 내는 강인성이 큰 분이었어.
   어렸을 때 雩南 어른은 마마손님에 걸렸거든. 그게 걸리면 그땐 죽기도해. 그런데 그 어린 아이가 혼자 투병을 하다 눈이 침침해서 안 보이는 거야. 나중에 자릿굽을 더듬어 만지다가 눈이 보이니까 기뻐했지. 눈이 안 보이기 시작한 지 달포만이었을 게야.

   李仁秀: 아버님이 여섯 살 때였지요. 눈이 멀어 겁에 질린 채 온 방안을 울며 기어다녔다고 합니다. 캄캄했겠지요. 그러다가 일본인 의사에게 가서 치료를 받고 사흘인가 있다가 집에서 눈을 뜨셨지요. 맨 처음에 보인 것이 방바닥에 깔린 자릿굽이었다고 합니다.

   徐廷柱: 그런데 그 일이 조그마한 일이기도 하지만, 잘 보면 그게 바로 主見의 확실성을 깨우친 거야. 사대주의니 하는 것은 主見이 없어 그런건데, 이 雩南 어른은 어렸을 때부터 主見이 확실하게 세워진 셈이지.
   이 主見의 확실성. 어렸을 때 겪은 「아하! 이거구나. 이게 자릿굽이구나」하는 事實확인의 경험이 아주 중요한 것 같아. 간단히 말하면, 어렸을 때부터 자기 주관의 확고함과 그래서 남이 뭐라 해도 고집을 꺾지 않는 것이 그 분의 특성이라 생각해. 이래서 민족의 獨立性이라든지 自主性을 찾는 것이라 생각해.

   司會: 그러니까 失明의 경험을 통해 주견의 확실성을 體化한 셈이군요. 전기를 보면 어렸을 때 雩南의 아버님은 항상 떠돌아 다니곤 해서 집을 비웠습니다. 아버지가 집에 없는 가정에서 雩南은 외롭게 자란 것도 같고, 한편으로는 지적 호기심이 왕성한 雩南에게 자유로운 공간을 열어준 것 같기도 합니다만….
   
   크레졸 냄새로 西洋을 만나다
   
   許文道: 家庭을 보면 외롭지만, 어린 친구들하고 어울려 놀았던 것은 오히려 자유분방해서 외롭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에 대한 뜨거운 확신이 자기주장이나 자기긍정을 강하게 만든 요인이 아닌가 싶은데, 더구나 雩南의 아버지 敬善 어른은 방랑벽이 있었지요.
   프로이트적으로 얘기하지 않더라도 완전히 어머니를 독차지하게 되고, 따라서 그런 唯我獨尊的인 성격이 강하게 됐을 겁니다. 여섯 살 때 눈병을 앓고 나서 다시 시력을 되찾자, 동네 어른들을 모아서 떡잔치를 합니다.
   또 골목골목을 다니면서 온갖 장난을 치고 놀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은 雩南의 마음에 애국심이 깃들게 된 기간이기도 합니다. 애국심이란 자기가 자랐던 동네의 「감나무에 달렸던 감에 대한 애착」의 형태로 출발합니다. 우리 전통 사회에서 아버지는 아이들의 행동을 제약하는 경우가 많은데, 雩南 선생은 아버지가 안계시는데다가 어릴 때부터 그렇게 발랄하게 자랄 수 있는 환경 속에 있었기에 열심히 뛰어 노는 가운데 애국심의 바탕이 생겨난 것입니다.
   雩南은 일단 동양인으로서 완벽하게 자기의 학문을 다 한 것이거든요. 움직일 수 없는 동양적, 한국적인 아이덴티티가 형성된 겁니다.

   司會: 그 무렵 일본은 명치유신을 하고 서양을 체화시켜갔는데 왜 우리는 병인, 신미양요를 통해 문을 더 굳게 닫아버렸느냐는 의문은 우리의 근대사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동양적, 조선적인 가치관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이질적인 가치관을 야만시하면서 배척했지요. 서양 문명을 힘의 실체라고 보기보다는 열등한 가치관의 한 형태로 인식하고 말았거든요.
   일본의 경우는 자기들보다 우월한 힘의 실체로 인식한 것이 우리와의 차이라면 차이입니다. 그런 차이는 강한 문화적 자존심이 있는 경우로, 다른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일종의 배타적인 選民의식 때문입니다. 반면 일본은 동양적인 자존심을 거의 갖지 못한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됐지요.
   그래서 雩南 선생의 경우에 의문이 드는 대목 중 하나는 서양 학문을 배우러 배재학당에 간다는 식의 반응이 어떻게 가능했나 하는 점입니다.

   許文道: 여섯 살 때 하나의 운명적인 계시로 거의 석달 동안 눈을 보지 못했어요. 천자문을 보고 세상물정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를 하기 시작할 때 엄청난 경험을 한 것인데, 아버지가 혜민성의 추천을 받아 일본 병원에 雩南을 업고 갑니다. 거기서 雩南은 크레졸 냄새를 맡는데, 그 자극의 결과가 光明을 얻는 것이었지요.
   달포 동안의 黑暗에서 깨어나 어떤 서양적인 것이 나에게 광명을 주더라는 경험을 겪은 것은 하늘이 조성한 체험일 겁니다.
   배재학당에서 여섯 달만에 영어선생이 될 정도로 집중적으로 공부하게 되는, 서양적인 것에의 수용성은 이 원초적 체험으로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동양의 七書를 모두 공부한 사람이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느냐 하는 것은, 그 어릴 때의 원초적 체험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합니다.

   徐廷柱: 맞아. 그 일로 해서 비로소 서양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서양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몸소 깨닫게 된 거지.
   
   『이런 순수한 조선인도 있었구나 하는 감동』
   
   許文道: 어릴 때 삼국지나 수호지같은 것을 많이 읽지요. 그래서 우리 전통 사회의 역사를 보는 눈을 키웠을 겁니다. 資治通鑑, 七書를 읽었다는 것을 우리는 한문이나 배운 것으로 아는데 그건 큰 잘못입니다.
   資治通鑑은 중국 3천년의 역사에서의 온갖 권력투쟁사, 여러 가지 保國安民의 실패, 성공사례 등을 모두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李承晩 선생은 동양의 社會科學을 망라한 분입니다. 가장 종합적인 사회과학이 歷史 아닙니까. 그것을 학문이나 한 것으로 아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그래서 동양과 서양의 지혜를 한 인격 속에서 갖는다는 그 엄청난 의미를 결코 간단히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퇴계만 해도 서른이 넘어서 科擧를 보았는데, 雩南은 열세 살부터 과거를 보니까, 20세 전에 과거를 몇 번씩 본다는 것은 엄청나게 반복하고 공부를 한 것입니다. 미국에서도 그렇게 공부를 했지만….

   司會: 그러니까 과거공부를 했던 힘이 미국에서도 상당히 도움이 된 것이군요.
   배재학당에 들어가는 과정을 보면 친구 중에 신긍호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이 분이 무려 두 달 동안 雩南을 설득합니다. 사회적으로 볼 때 雩南의 전환점은 이 분과의 友情 때문이었지요.

   許文道: 壬年軍亂때 서당 친구 범교네 집안이 피난갔을 때, 어버님과 어머니가 범교네 집을 지키는 대목이 未堂 선생님께서 쓰신 글에 나옵니다. 왜 자신은 피난 안 가고 범교네만 가는가 하는데서 貧富의 문제를 인식하게 됩니다. 어머니는 삯바느질을 하고 남의 집이나 지켜준다. 아버지는 꼬투리도 보이지 않는다 하는 현실 속에서 동양적 교양인으로서의 공부를 했습니다.

   徐廷柱: 이 나라의 민족정신을 맡을만 했고, 동양의 전통적 정신 가운데서 쓸 만한 것, 사대주의 같은 것 말고 동양철학의 근본정신도 가졌던 분이었어.

   許文道: 동양의 敎養 위에 서양정신의 기독교 신앙을 얹은 분입니다.
美 상원의 채플 목사인 해리슨氏도 『내가 일찍이 본 사람들 중에 가장 깊은 교양을 가진 기독교인』이라고 雩南을 표현했지요. 동양정신, 禮와 禁慾과 겸양의 바탕 위에 기독교적인 신앙과 교양이 있으니까 서양의 젠틀맨보다 훨씬 나은 분위기를 느꼈던 겁니다.

   徐廷柱: 덧붙일 것은 우리나라에서 단군 때부터 내려오는 神仙道인 國仙道가 있어. 하늘을 숭상하고 이 땅을 잘 가꾸어서 책임지고 거두고, 이렇게 해서 하늘과 땅 사이의 주인의식을 가지는 것이야. 이런 주권의식을 李朝 말기에 제일 많이 가졌던 분이 雩南 어른이야.
   그 분이 國仙에 대해서 얼마나 연구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독교도라도 이렇게 철저한 기독교도가 없거든. 그러니까 기독교인들이 놀란 거지. 기독교와 國仙道가 다 통해요.

   李仁秀: 1961년도에 찾아가서 처음으로 가까이서 뵈었을 때 『이런 순수한 한국인이 있었구나. 이런 분이 바로 우리나라 사람의 모습이구나』하고 느꼈습니다. 이 느낌은 제게 평생 계속되고 있는데 무척 자랑스러웠습니다.

   徐廷柱: 예술의 전당 李박사 전시장에 가보니 우리나라 무명 옷에다가 회색물을 들인 것이 걸려 있어. 단추가 달린 두루마기인데, 그게 대통령 취임식 때 입은 것이야. 내가 그 취임식에 참가했으니 잘 알지. 왜냐하면 대한민국 政府樹立紀念歌를 내가 지었거든. 
   그것 하나가 그 분의 유일한 유품으로 남아 있어. 남긴 것은 그 하나 뿐이었어. 돈 한푼 착복하지 않았어.

   李仁秀: 대통령 취임식에 그 옷을 입으셨다는 것이 바로 전통적인 한국인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徐廷柱: 3.15 부정선거를 직접 명령했다고 하지만 밑에 李起鵬하고,崔仁圭라는 지독한 꾀보 놈이 한 거야.

   李仁秀: 아버님께서 48년에 건국을 하고나서, 10월3일에 강화도의 마니산에서 단을 쌓고 예를 올렸습니다. 그게 얼마나 한국적인 겁니까.

   徐廷柱: 우리나라의 불교는 修道를 잘 해야 한다고 하면서 曹溪宗으로 그 분이 정하셨지. 그러면서 쓰신 것이 있어. 우리나라는 華嚴經을 주로 하거든. 그래서 華嚴世界로 진출하라는 것이 나온다고. 단순히 협소한 크리스찬만이 아니었어. 우리나라 정신의 역사적 발전을 도운 분이야.

   李仁秀: 그때 쓰신 글귀는 「백제, 신라 桑田碧海의 옛땅에 華嚴은 예와 같이 큰 강이 되어 흘러가네」였습니다.
   
   우리나라 精神의 역사적 발전을 도운 분
   
   許文道: 스님들이 경무대를 예방했을 때 쓰신 것이 아닌가 싶은데, 거기에 「百濟 新羅 桑海地 依舊華嚴 大江流」라고 쓰셨지요. 일본에서는 法華經경이 所依의 경전으로서 제일 으뜸이라고 하면 한국에서는 華嚴經이 으뜸이지요.
   그러니까 그건 단순한 휘호라도 한국불교에 대한 깊은 소양이 없이는 쓸 수가 없는 겁니다.
 그리고 華嚴經이 일체중생 실유불성, 모든 중생이 불성을 다 갖고 있다고 하거든요.
 우리가 민주주의를 할 때 만민평등이라 하는데 華嚴經이 그 기본적인 핵심을 갖고 있었고,
雩南 어른은 그런 교양까지 있었어요.

   일본의 대처승이라고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지만 왜색적인 불교의 형태를 띄고 있었어요. 그것이 식민지 권력을 업고 한국 불교를 깔고 앉아 있어서, 그것을 말소하는 차원에서 불교의 개혁을 雩南이 밀고 나간 거지요. 불교에 대해서 깊은 애정을 갖지 않고는, 그리고 현실적으로 상당한 반발이 있었는데, 雩南같은 깊은 확신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司會: 배재학당에서 8개월만에 영어교사까지 된 것은 어린시절의 失明 경험이 무의식적으로 열심히 공부하도록 작용했는가 하면, 동시에 생계의 절박감도 열정을 자극하는 데 작용했다고 봅니다.

   徐廷柱: 徐載弼 박사가 甲午更張 때 오셨거든. 요새 텔레비전을 보니까 甲申政變에 徐載弼을 다 빼 놓았어. 甲申政變으로 일가족이 몰살당하고 그 후에 미국에 가서 의학박사가 되고 1894년 甲午更張 때 정부 고문으로 오셨어. 그리고 대한독립협회의 초대 의장이 되고 배재고등, 배재중학교의 선생이었는데, 거기서 李承晩 박사가 영어를 배웠지. 월급을 받으면서.

   許文道: 歷史가 잘 되어 있어야 하는데…. 1894년에 청일전쟁이 났을 때만 해도 우리는 청나라가 이긴다고 생각했는데 평양이 함락되고, 일본이 압록강을 건넌 것이 洋歷으로 10, 11월 무렵입니다. 그때서야 청나라가 이기지 못한다는 현실을 확인한 겁니다.
   그때까지도 평양에 있는 청나라의 군대에다가 대원군과 고종과 민비가 각각 밀서를 보냅니다. 우리가 지금 할 수 없이 이러고 있지만 어쩌고 하면서 도와달라는 식의 내용이었지요.
그러다가 청나라가 가망없다 싶으니까 驚天動地할 충격을 받았어요. 「이젠 동양이 안되겠구나」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 이때였어요.
   일본인들은 훼리가 흑선을 타고 1854년에 동경만에 나타났을 때 「이제 세상이 달라지는구나」 했는데 우리는 그것을 청일전쟁을 통해 느낀겁니다. 雩南이 배재학당에 들어간 것도 크게는 그 흐름 속에 있습니다. 
   일본이 1879년 우리땅에 公使館을 세우고 일본병원을 세웠을 때 그래서 개화를 한다는 것은 잘못된 사람이나 하는 것으로 알았어요. 그런데 「개화를 하지 않으면 안되겠구나」하고 생각을 바꾸게 된 결정적인 것이 지금부터 1백년 전의 청일전쟁이었습니다. 그것이 분기점이었어요. 근대사를 배워도 그것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막연하게 연표만 외운 거죠.
   
   雩南에게 徐載弼은 세례 요한이었다
   
   徐廷柱: 李承晩 어른이 나한테만 얘기한 것인데, 徐載弼 선생이 나오셔서 고종의 고문으로 취임하시고, 독립협회 초대회장이 되고, 그 다음이 윤치호야. 윤치호가 애국가를 지었지.
雩南 어른이 내게 해준 말씀이 기억나. 내게 『자네는 徐載弼 선생이 어째서 미국으로 돌아갔는지 아는가, 월급이 적다고 그런거야』 하시더군.

   司會: 徐載弼은 李承晩에게 큰 영향을 끼친 분입니다. 동양과 서양을 잇는 橋梁역할을 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許文道: 徐載弼의 경우에 중요한 것은, 상당히 압축된 지식을 단기간에 雩南에게 줄 수 있었다는 겁니다. 서양이라는 것이 어떤 곳이다, 또 그 문명이 어떻다는 식의 내용을 다이제스트해서 가르쳐주었어요.   예수에게 세례 요한과 같은 역할을 徐載弼 박사가 한 겁니다.

「獨立精神」을 봐도 거기에 벌써 세계정세가 거의 나와 있습니다. 그걸 쓴 것이 27~28세 때인데,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한다고 데모하고 뛰어다니고 감옥에나 들어 앉아 있는데 무슨 책을 보겠습니다.

   李仁秀: 그때 배재학당의 교수진이 상당히 좋았습니다. 영어를 가르치는 법도 굉장히 좋았어요. 그리고 아버님이 여자 선생, 조지아나 화이트孃 한테는 우리말을 가르쳤는데, 그게 영어를 익히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許文道: 영어를 잘 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한문의 語順이 영어하고 같아서 입니다. 우랄 알타이어계의 언어를 쓰는 사람들에게는 영어의 어순 자체가 너무나 엉뚱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유학을 가는 것과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가는 것과는 너무 달라요.
   雩南정도 되면 한문은 그냥 줄줄 읽을 정도니까, 한문적인 두뇌회로가 형성되어서 영어를 우리보다는 더 빨리 익힌 겁니다. 그 전에 한문공부를 완전하게 다 했거든요.

   司會: 李承晩 박사가 배재학당 생활을 하시면서 비로소 연설을 할 기회를 가지시다가 나중에는 상당히 위대한 웅변가로 변하시거든요.

   徐廷柱: 周時經, 李商在 같은 선배들의 체계 안에서 거들어주는 식이었지.

   許文道: 여기서 역사적인 운명의 신의 계시같은 것은, 그때 주된 투쟁의 대상이 물론 정부였고, 개화를 잘 하라는 내용이었지만, 청년 李承晩의 주된 투쟁의 대상은 외세였던 러시아였어요.
나중에 일러전쟁이 나면서 일본의 그림자가 러시아보다 더 세구나 하고 감지하지만 「獨立精神」이라는 책을 봐도 일본을 비판하는 것은 별로 없어요.
   일본인들이 얼마나 영악하고 일찍 개화해서 엄청나게 성장해가는가 하는 내용을 썼지만, 일본의 半島침략 정책의 전모는 그때까지는 파악 못하고 있었어요. 러시아가 아관파천을 기회로 조선으로 진출하고 絶影島를 조차하려 하니까 雩南이 반대시위하고 논설을 쓰고 한 겁니다.

   徐廷柱: 고종이 러시아에 기울어 그네들 공사관에 가 있는 것을 두고는 「왕은 대궐로 돌아오셔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바로 雩南 어른이야. 러시아가 가지고 있던 森林權에도 반대했고, 러시아가 경상도의 絶影島와 鎭海灣을 軍港으로 쓰려는 걸 만민공동회를 이끌고 가서 반대해 무산시켰어. 그런 분이야.
   
   『인간 본성은 자유롭게 되길 원하는 것-공산주의를 해서는 안 된다』
   
   許文道: 해방후에 공산주의도 공산주의이지만 러시아의 후신인 소련이 한반도를 깔고 앉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雩南 선생이 가장 강하게 느끼고 저항했지요. 6세 때 失明경험이 미친 영향에 대해서 얘기했지만, 20대 중반에 러시아의 아관파천 이후 영향력 행사에 대해 투쟁했다는 것. 그것이 러시아가 한반도를 깔고 앉을 수 있다는 경각심, 경계심을 해방상황 속에서 누구보다 더 절실히 갖게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니까 국제정치적인 안목으로 본다면 일러전쟁이란 일본과 러시아가 한반도를 놓고 패권을 다툰 것이지요.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러시아가 일본에 이겼으므로 한반도에 욕심을 낼 것은 당연합니다. 거기다가 미국은 별스런 한반도 정책이 없는 채로 한반도에 왔던 것입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李承晩과 같은 전략적인 안목을 갖춘 지도자가 없었더라면 미국은 밀려나고 결국은 소련이 남북을 다 깔고 앉는 결과가 됐을지도 모릅니다.

   李仁秀: 아버님께서 1943년에 루스벨트를 만나 『일본이 한반도에서 물러나게 될 때 당신네들이 그 공백을 메워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 임시정부를 승인해서 공산화를 막아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미국의 힘을 이용하려고 무진 애를 쓰셨지요.

   司會: 李박사는 1933년 7월19일부터 20일까지 모스크바에 머물게 됩니다. 이 당시 스탈린의 전체주의를 몸소 체험하게 되는데, 이것이 훗날 反共정책의 신념을 갖게 한 요인도 된다고 봅니다.

   李仁秀: 그렇습니다. 아버님께서는 그때 소련을 보신 것이지요. 그리고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 張錫淪씨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원래가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는 인간 본성을 거역해가며 국민을 지배하는 정치는 결국엔 유지될 수 없다. 우리민족을 위해서는 저런 공산주의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냉전체제의 구도가 만들어지자 아버님은 미국의 힘을 이용했던 것이지요.

   徐廷柱: 옳아. 李承晩 박사가 모스크바에 갔었던 것이 1933년이었지. 그때는 완전히 反소련이었지. 그렇지만 해방 직후에 李承晩이 반대한 것은 소련만은 아니었어.

   許文道: 맞습니다. 그러나 해방 직후 우리가 가장 조심해야 할 적은 소련이었습니다. 1943년 美국무성에 건의서를 낼 때도 소련을 견제해야 한다고 집요하게 시도했는데, 이런 시각을 가진 독립운동가들이 없었습니다.
   근세 국가전략이란 측면에서 보면 大院君, 金玉均, 李承晩으로 이어지는 국가전략사상이 성장하고 있는데, 대원군의 경우는 우리가 아직 밖의 바람을 받아들일 수가 없으니 무조건 쇄국이 아니라 일단 막아놓고 점차적으로 풀어보자는 생각이었을 겁니다.
   
   韓國化된 자유민주주의의 始原
   
   司會: 마치 北韓의 방식과 흡사하군요.
   許文道: 그렇지요. 우리가 內實이 차서 國力도 어느 정도 견실해 지면 밖의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생각이었을 겁니다. 그것도 하나의 국가전략인데,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사람이 金玉均이었다고 봅니다. 전략적 주체로서 국가의 자주성에 대한 金玉均의 생각은 일본의 힘이라도 빌려서 어떻게 좀 해보자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雩南도 이러한 개화파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는데 다만 雩南은 외국에 무조건 기대서는 안된다고 본 것입니다.
雩南은 국민들 스스로가 깨어서 일어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본 것입니다.

   李承晩에 와서야 비로소 국가전략과 한국을 싸고 있는 국제정치상의 세력 배치 속에서 한국을 살려내야 하는 완벽한 방안들이 만들어진 것이지요. 이것은 동서양을 꿰뚫고서야 가능한 일입니다. 이 분은 서양사와 서양 정치사 및 외교사를 두루 공부했고 동양사도 모두 꿰었습니다.

   그러니 나라를 구하려면 무슨 결사 투쟁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국가간의 관계를 철저하게 연구하고 가늠해서 자기를 지켜야 한다는 현실인식이 만들어 진 것입니다. 힘의 정치(power politics)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되는 일이란 당시 우리의 지도자들에게는 아주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데에 李承晩의 특별한 점이 있습니다.

   司會: 李承晩 박사가 「독립정신」을 썼던 1904년 무렵의 이념적 좌표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였지요. 그런데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이른바 진보세력들은 그들의 정통성을 일제시대의 사회주의자들로부터 찾고 있습니다.
   이 부분도 바로 잡아야 할 우리 역사의 일부분이라고 보는데요. 李承晩 박사는 1897년 7월8일에 배재학당을 졸업하면서 졸업생 대표로 「한국의 독립」이란 연설을 영어로 합니다. 이후 1904년 옥중에서 「독립정신」이란 책을 탈고하기까지 그의 활동을 보면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자로서 정통성을 확립한 분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것도 한국화시킨 자유민주주의였다고 저는 생각됩니다만, 결국 李박사님이 당시엔 반체제 혁명가였지요. 그래서 대한민국 체제의 정통성은 1897년부터 싹트기 시작했다고 본다면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들의 생각은 확실한 오류가 아닐까 합니다만.

   徐廷柱: 자네 말이 맞어. 자유민주주의의 始原이었어. 그것도 주체성을 확립한 韓國化된 자유민주주의였어.
   
   운명에 대한 강한 확신
   
   司會: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을 남긴 스피노자였지만, 그가 과연 사과나무를 심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죽음의 경지 앞에서 李박사는 그러한 일을 해냈습니다.

   高宗 황제 퇴위운동을 주도하다 종국에는 사형수가 되어 옥중에 있으면서도 영어 단어를 외웠습니다. 같은 방에 수감된 사형수가 『곧 죽을 목숨인데 외워서 뭣하냐』고 할 때도 李박사는 『죽으면 못쓰더라도 산 동안은 할 건 해야지』라며 그 날의 삶에 충실했었지요.
인간이 극한 상황에 이르게 되면 그 사람의 진면목이 나타나는 법인데, 李박사의 인간됨은 죽음 앞에서도 삶의 중심을 잃지 않은 큰 인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許文道: 운명에 대한 확신을 강하게 가진 분입니다. 모든 지도자들에게는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운명에 대한 확신이 이 분에게도 있었던 겁니다. 李박사는 미국 생활 도중에 자동차를 과속으로 몰고 곳곳을 다니며 강연활동을 했었다고 프란체스카 여사著 「대통령의 건강」이란 책에 기록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 결코 죽지는 않을 것이란 확신없이는 그렇게 자신만만한 삶을 살 수가 없었을 겁니다. 그것은 바로 운명에 대한 강한 확신이었던 것이지요.

   徐廷柱: 그것은 딴 말로 하면 우리와 비슷한 소년기질이야.
   司會: 하긴 60세에 재혼을 하시고 신혼여행을 떠나실 정도였으니까 소년기질로 보아도 되겠군요. 그런데 프란체스카 여사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 雩南 선생은 스물 다섯 살 연하의 부인에게 상당히 한국적인 남편으로 존재했었지요.
   
   지구 반대편에서 만난 최고의 반려자
   
   徐廷柱: 내가 자료를 얻으러 가니 李박사가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사진 자료를 찾아 오라고 했어. 그런데 못 찾아 온 거야, 그러니까 사과를 먹고 있던 李박사가 화가 났는지 『겟 아웃!』(저리 가)하고 소릴 쳤어. 요즘 한국 사회에서도 남편에게 이런 소릴 들으면 가만 있을 여자가 어디 있을까 싶은데, 프란체스카 여사는 마치 당신이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아이처럼 움찔움찔하며 그 자리를 물러났어.

   司會: 李박사께서는 프란체스카 여사를 어떻게 韓國化시킨 것인지 궁금합니다.
   許文道: 그것은 강한 민족 정신을 가진 분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민족이 언젠가는 강해지고 위대해 질 수 있다는 자신감과 굳은 확신을 가진 사람이 타인을 그렇게 同化시킬 수 있는 겁니다. 그로써 타인을 감화시키는 것인데, 李박사가 바로 그런 분입니다.

   내가 감동받은 것 중에 하나는 「義重三從 安貧樂業」이라고 쓴 글을 프란체스카 여사께 드린 겁니다.
   三從이라면 한국적인 婦德을 잘 표현한 것이라 보는데요. 어렸을 때는 아버지를, 결혼해서는 남편을, 그리고 나중에는 아들을 따르라는 의미입니다. 이 글귀에 李박사께서는「프란체스카를 위하여」라고 써 두었지요.
   현대적으로 보더라도 납득하기 어려운 三從을 프란체스카 여사는 완전히 체화하려 노력한 분입니다.

   司會: 프란체스카 여사가 기억하는 安貧樂業의 뜻도 새롭습니다. 「어려운 나라 실정과 자기 분수에 맞는 검소한 생활을 즐기고, 일하는 것에서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고 기록에 남겨두고 있습니다.

   李仁秀: 어머님은 당시 아버님을 만날 무렵에 오스트리아 사람이었지만 영어를 아주 잘했고, 타자와 속기에도 능숙하셨지요. 아버님에 대한 건강관리도 최고였지요. 해방되고 난 다음에 어머님이 아버님을 모실 때에도 외교문서 등은 모두 아버님이 맡기셨어요. 더구나 6.25 사변이 났을 때 어머님의 역할 중에는 유엔군에 대한 외교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유엔군들은 「한국은 퍼스트 레이디가 白人이더라」는 말에 상당한 친근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환영하는 회합이나 만찬에 어머님이 꼭 나가셨고, 이것은 유엔군의 사기에 대단한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엔군이 한국전에 참전해서 성공한 배경엔 어머님의 노력도 컸던 것이지요.
   그 분께서 경무대에 계실 때에도 오스트리아에 살고 있는 친정 식구들을 한번도 들여보낸 적이 없어요. 결국 당신의 어머니한테도 한번 못 가 봤죠.
   
   오늘을 사는 지혜를 얻기 위해 역사를 배운다
   
   徐廷柱: 자유당 정부가 실패한 것은 李起鵬이 때문이었어. 일가족이 자살했잖아. 아들 강석이 보고 「네 애비, 애미를 쏘아라」 했어. 그것이 양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못해.
   李起鵬 그 사람은 李박사가 미국에 계실 때 늘 옆에서 비서하던 사람이야. 그 의지만 가지고 왔어. 촌놈이지. 순수하다면 순수함이었네마는, 이것이 사고였어. 그런데 대단한 꾀보 몇 놈이 끼어들어서 「부정선거해야 합니다」하고 부추겼어.
   방법도 제일 유치한 방법으로, 올빼미표다 피아노표다 그랬어. 결국 李박사가 물러나게 되더라고. 그때 마지막 담판에 4.19 혁명주체인 학생 다섯 명과 담판을 했어. 학생들이 『물러나십시오』했어. 그랬더니 『너희 학생 전부의 의사냐』 『그렇습니다』 그걸로 끝이야. 닷새만에 이화장으로 가셨어. 게다가 또 하와이로 가시지 않았나. 돈 한푼 있었나? 아무 것도 없었어. 아무 것도. 이것이 그 분이야. 재평가를 하자는 얘길세.

   許文道: 얼마전에 朝鮮日報에서 「李承晩과 나라세우기」 전시회를 했는데, 일부 반대하는 단체에서 역사왜곡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일단 우리가 우리 역사를 어떻게 봐야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李承晩 대통령도 이미 역사 속으로 들어가 버린 분인데, 역사를 왜 보아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 「오늘을 사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라는 말이 답일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왜 雩南을 봐야 되느냐는 것과 통합니다. 지금 우리가 대한민국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살고 있고, 사람들이 물을 마실 때 그 우물을 판 사람들의 수고를 생각해야 한다는 얘기도 있지만, 대한민국의 건국은 李承晩이라는 존재를 제외하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李承晩과 관련해서 말년의 독재, 4.19라는 그늘진 부분은 있지만 그의 빛날 부분은 그 모두가 오늘의 우리에게 지혜의 寶庫일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4.19세대인 40, 50대에게 민주주의가 뭐라는 것. 민주주의로 나라가 전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우리가 대한민국을 문닫지 않는 한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식의 근본에 관한 것을 李承晩 만큼 우리에게 얘기해 주는 존재가 없어요.

   李承晩이 친일파와 관련이 되어서 민족 정통성을 없앴다고 하는 것은 李承晩이라는 사람을 너무 단편적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통치 말년이 한일회담과 겹치는데, 미국이 세계 평화에 대한 전략으로 東北亞에 소련과 중공에 대한 방파제로서 한일간의 연대를 시키려 했습니다.
   그런데, 평화선을 긋는다든지 해서 회담을 늦추려고 했을 때 미국으로부터 강한 압력이 있었지만, 李承晩은 국민들이 지금까지 종주국이었던 일본 사람들에 대해서 독립심이 자라기를 기다린 겁니다. 그래서 회담을 늦추기 위한 고심에 찬 외교를 한 겁니다. 그걸 막연하게 친일파 정통성 운운하는 것은 너무나 천박한 얘깁니다.

   더 결정적으로는 남북 분단이 되다 보니까 대한민국의 국가적인 정통성을 깔아 뭉개야 하는 정치세력이 한반도 위에 있는 겁니다. 이 사람들은 고도로 세련된 이데올로기로 대한민국을 들어 엎기를 바라는 사람들인데, 그렇게 말할 수는 없으니까 李承晩을 비난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파괴하려 하고, 학문이다, 사상의 자유다 하는 식으로 둔갑을 하는게 지금 우리 세상인 것 같습니다.
   생각있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이 울타리 속에서 통일되길 바라고, 이 울타리 속에서 통일될 수 밖에 없는 역사적인 궤도는 깔려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친일파가 있게 된 것은 나같은 사람의 책임이 더 크다』
   
   李仁秀: 친일파 문제는 우선 친일파가 누구냐, 그것을 먼저 정의해야 합니다. 항상 그런 얘기를 합니다만 아버님이 한국에 돌아오셔서 『친일파가 아닌 사람 손들어 보라, 누가 세금을 안냈냐, 오랜 역사가 잠시 암흑 속에 갇혔던 것은 나와 같이 나이 많은 사람들의 책임이 크다』 그러셨어요.
   『나라을 잃었던 세대의 죄가 크다』는 이 말씀에 이 어른의 기독교적인 정신을 볼 수가 있어요. 그 책임은 내가 지겠다. 그 당시에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 분이었기 때문에 국가를 창조할 수 있었지요.
   그 때 중국에서 온 분들은 앞으로 신생국에서 장관을 할 사람은 독립운동을 직업적으로 10년 이상 한 사람이 아니면 안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 당시에 10년 이상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 얼마나 되었겠어요.

   司會: 選民思想에 의한 전체주의가 양산될 뻔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북한이 그러한 전체주의 국가인데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진정한 평등의 이념을 구축하고 열린사회로 가는 길을 개척한 李承晩 어른의 뜻이 제대로 알려지기란 참으로 至難한 일인가 봅니다.

   徐廷柱: 한마디 첨가한다면, 1945년 8.15에 미․소 양군이 들어온다 했어. 그래 나도 서울역에 나갔어. 오기는 쥐뿔이 와? 그 뒤에 미군이 군정청을 세웠지. 48년 8월15일까지 약 3년간 미군이 정치를 했어.
   그 뒤의 정책은 『친일파 너희들도 참회하고 돌아오너라. 다 포섭해 주마』 그랬어. 『길거리에 돌아다니면 부랑자가 되니까 일정 때 경찰해 본 친구들, 너희들도 독립국가에 헌신하고 싶으면 오너라, 군인도 괜찮다, 너희들이 정말 이 나라를 세울 자신이 있거든 오너라』란 식이였지.
   만주에 가서 만주군에 가담해 있던 丁一權, 白善燁을 국방경비대라는 것을 만들어서 불러 들였어.
   
   주눅든 민족을 감싸안은 「민족의 아버지」
   
   李仁秀: 원래는 국방경비대가 미군정 당시부터 있던 거지요. 해방 후 아버님이 보시기엔 그 사람들이 다 우리 국민입니다. 이 어른의 경우에는 일종의 열등감과 같은 것에 빠져있는 국민을 자존심부터 일으켜야 하니까 『죄는 나이 많이 먹은 사람들이 더 크다』고 하시며 감싸 안으신거죠.
   이 말씀은 1945년 10월16일에 돌아오셔서 그 이튿날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그래도 당신의 집권 동안에 한 사람의 친일파도 안 만드셨어요. 일본인 한 사람이 못들어 왔어요.

   許文道: 그 과정에서 더 중요한 일은 왜색불교를 제거하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왜색불교라고 종단에서 비방하고 난리가 났지요. 그러자 『이 일은 개과천선의 차원에서 해결해야지 보복의 차원에서 얘기해서는 안 된다』고 못박은 사실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담화로도 발표를 했어요. 이것은 「못난 부분도 내 일신의 한 부분」이라는 진짜 큰 마음이었습니다.
   편가르기의 발상으로 친일 문제를 이용하려는 자들이 있어요. 친일파는 우리 민족이 어두운 역사를 지나면서 우리 민족이라는 몸에 생긴 상처이지만 그것은 육신의 일부인 겁니다. 그나마 잘라내면 병신이 되니까 잘라내기 못한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데올로기적인 망상으로 만들어 정통성 운운하며 대한민국의 뿌리를 흔들고 있는 겁니다. 오늘날 친일파의 가장 큰 해악은 친일파 문제가 민족 내부를 가르는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李박사는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와 같은 말씀을 하신 겁니다. 숙연해지지요.

   司會: 보복의 차원과 개과천선의 차원은 상당히 다릅니다. 현 정부의 개혁바람, 사정바람을 만드는 분들이 참고할만한 역사적인 교훈이기도 하군요. 그런데 친일파를 어디까지 한정해야 하는지도 쉽지 않습니다만.

   許文道: 지금 친일파 문제로 떠드는 사람들도 일제 때 학교에 다니면서 皇國臣民誓詞를 외우고 동방요배를 할 수밖에 없었으니 그들도 친일파지요.

   徐廷柱: 그러니까 李承晩 박사는 내게 있어 민족의 아버지였다고 생각해.
그 분은 어떻게 하든 주눅 든 민족을 일으켜 세우려 했어.

   許文道: 만약 친일파를 썼다고 해서 문제라면 그 이후에 이 나라가 친일적인 국가가 되었어야 말이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李박사의 체제를 이어받은 그 이후 체제도 역시 마찬가지로 일본을 향해 가장 反日적인 국가로 남아 있고, 反日적인 교양을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고 있지 않느냐 말입니다. 이런 국가체제를 친일파로 인해 망해간다는 식으로 보면 안되는 것이죠.

   司會: 그런 측면에 반대되는 논리도 있습니다. 李承晩 박사가 당시 친일파를 등용했기 때문에 朴正熙 시대에와서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하게 됐고, 일본의 경제권에 종속되어 오늘날에도 반 식민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쓰지 말라」
   
   許文道: 그건 우리의 과제로 남아있는 겁니다. 李박사는 일본을 향해 잘못한 점을 따지고, 강력하게 보상을 요구하고, 대한해협에 평화선을 그어 그 선을 넘어 들어 온 일본 어부들을 무조건 잡아 가두는 등 강하게 어필했지요. 이 때문에 일본과 한국을 하나의 안보 블럭으로 만드려는 미국의 입장을 매우 곤란하게 만들어 결국 李박사의 실각에 큰 영향을 남겼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런데 李박사의 요구에 일본이 자꾸 양보해가는 과정에서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그들은 北送 카드를 꺼낸 겁니다. 북송 카드를 가지고 李박사의 의지를 좌절시키고, 한국 때문에 한일회담이 결렬되었다는 식의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겁니다.
   그러나 그랬기 때문에 朴正熙 정부가 들어서서 한일회담을 통해 그만큼의 청구를 받아내는데 성공한 것인데, 李仁秀 박사께 들은 얘기지만, 李박사께서 유언처럼 늘 말씀하신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으니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쓰지 말라」고 하셨지요.
   갈라디아書 5장 1절의 구절입니다.
한일회담의 성사를 위해 일본으로 떠나는 관리들에게 『내가 일본하고 악수하자고 보내는 것 아니다. 가서 어떻게 하는지나 잘 보고 오라』고 했지요. 당시 미국의 전략은 일본과 한국을 연대시켜 동북아 방파제로 삼으려 했지요. 그래서 아이크가 더 강하게 나왔고, 이 때문에 李박사와 아이크와의 관계는 엄청나게 나빠진 겁니다. 

   그런 식으로 일한 이유가 감옥에서 쓴 「獨立精神」을 읽어보면 우리 민족이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남에게 의존하려는 결점을 뼈아프게 지적하고 있는데서 잘 나타나고 있어요.
   그래서 6.25를 통해 다시 일어난 일본 경제가 우리에게 다시 다가오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되면 안그래도 의존심 많은 사람들이 또 다시 일본에게 기울 것이 아니냐고 염려한 겁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우리 민족이 제대로 된 자세, 정신의 자립을 갖출 때까지 李承晩은 시간을 끌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 당시 미국의 전략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 李박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일회담을 계속 막은 것은 갈라디아書 5장 1절, 노예의 멍에를 다시는 메지마라는 구절을 강조한 데에 있었지요. 이런 점을 모르고 친일파 운운한다는 건….

   徐廷柱: 내가 생각하건데 이 민족을 올바로 지켜 온 대표적 인물이야. 아마 이것을 알리는 데도 꽤 시간이 걸릴 거야….
   
   3.15운동에 대한 李承晩의 영향력
   
   司會: 오늘날 雩南 선생의 교훈인 「종의 멍에를 메지말라」는 가르침에 우리는 얼마나 가까워졌습니까?

   許文道: 작년 우리나라의 對日 무역적자는 1백10억 달러나 됐습니다. 이것은 朴대통령 시대에 만들어진 對日수교의 삼십 년 이후의 결과인 셈입니다. 당시 對日수교는 역사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면, 그 다음을 사는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무역적자 1백10억 달러란 한 마디로 기술종족을 의미합니다. 「종의 멍에를 메지마라」는 뜻을 생각했다면 한국경제가 이토록 對日종속화되진 않았을 것입니다. 雩南의 교훈은 아직도 달성되어야 할 가르침입니다.

   司會: 그런데도 이런 말을 하면 極右라고 하는데,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이 나라의 잘 되는 꼴을 못 보는 사람들입니다. 건국 대통령의 진면목조차 무조건 백안시해 놓고 이제와서 李承晩에 대한 자료를 모아 전시하니까 마치 「李承晩黨」이라도 만드는 줄 알고 시위를 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어떤 신문은 「李承晩展은 이미 내려진 역사적 평가를 부정하는 역사왜곡이다」고까지 경고합니다.
   이것은 보수라고 알려진 朝鮮日報와 이른바 진보세력간의 자리가 바뀐 느낌입니다. 그들이 만든 허구의 역사를 확고부동하게 지켜야 한다는 자세야 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수구적인 자세가 아닌가 합니다.

   許文道: 對日무역적자가 때로는 우리가 필요한 것이 있어 그렇게 됐다고 볼 수도 있지만 구조적으로 보면 우린 일본에 종속돼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雩南의 교훈은 아직까지 살아 있고 우린 그것을 실천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雩南의 정신으로 기업가들이, 학생들이 맡은 일을 성실히 한다면 자존심 있는 민족이 돼 갈 것입니다.

   司會: 3.1운동과 李박사와의 관련성을 아직은 학계에서도 명쾌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합니다만 그러나 그 직후 임시정부가 수립될 무렵에는 너도 나도 李承晩 박사를 초대 대통령으로 모시는 데 반대가 없었습니다.

   許文道: 3.1운동 당시 국내 지식인들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두 권의 책이 있었습니다.
한 권은 申采浩 의 「韓國痛史」이고, 또 한 권은 李承晩의 「獨立精神」이었지요. 이 책은 미국에서 출간되었는데 한국으로 흘러들어와 禁書였지만 숨어서 읽혀졌습니다.

   그리고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윌슨이 파리 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을 포함한 14개 조항을 발표하게 되었지요. 그때가 1918년 11월11일입니다. 그리고 약 넉 달 뒤에 한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윌슨의 사상을 국내로 재빨리 패스한 과정은 윌슨과의 돈독한 관계가 아니면 어려웠을 겁니다.

   또한 李박사께서는 3.1운동 당시에 하와이에 계셨습니다만, 한국에서 뿌려진 각종 유인물들을 전부 수집해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그분이 국내와 긴밀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었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올리버 박사는 그의 책에서 3.1운동이 비무장투쟁이 되도록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 바로 李박사라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 큰 영향력이 李承晩 박사로부터 나왔다는 증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연구되지 않은 점은 우리가 반성해야 할 부분입니다.

   설사 李박사가 역사에서 부정적인 인물이었다고 해도 우리는 연구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많은 정치학자와 역사학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3.1운동과 李承晩 박사의 관계가 밝혀지지 않은 것은 우리의 수치입니다. 우리 근대사에 한 개인으로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인데도 너무나 연구를 하지 않은 겁니다.

   司會: 雩南의 비폭력 노선 때문에 임시정부가 분열됐다고 평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만….
   
   『미국이 한국을 틀어쥐는 순간 미국은 중요한 협상수단을 잃게 될 것이다』
   
   徐廷柱: 李박사가 윌슨을 찾아가 『우리나라를 독립시켜 주어야 한다』고 하니까, 윌슨이 『인정하긴 하겠지만 독립은 어렵다』고 했어. 그래 李박사는 화를 벌컥 내고 나왔지. 그리고 파리 강화회의에 金奎植을 대표로 파견했지. 그런데 최근 근세 이후에 그렇게 우리 민족의 주권을 지켜준 이는 없었어. 나는 확신하고 있어.

   許文道: 세계전략 전체를 완전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분입니다.
 그 당시 무장투쟁을 할 수도 있었지요. 그래서 일본인들 몇 명을 죽일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엄청난 보복이 들어오면 수많은 국민들이 죽임을 당해야 되지요.
그래서 李박사는 비무장투쟁을 강조합니다.

   특히 국제정치에서 일본과 최강국인 미국, 영국이 언젠가는 싸울 날이 온다는 것을 간파했지요. 李박사는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린 겁니다.

   휴전이 성립된 뒤에 李박사는 미국에서 아이젠하워를 만납니다.
   이 무렵 李박사는 이런 말을 합니다. 『한국은 휴전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독자적인 행동을 취할 권리가 있다』 이것은 독자적으로라도 北進할 수도 있다는 뜻을 보인 것입니다. 미국에겐 대단히 곤혹스러운 말입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어서 빨리 전쟁을 멈추어 동북아시아를 안정시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요. 결국 아이크는 닉슨을 한국에 보냅니다. 그래 닉슨은 李박사에게 『절대로 전쟁은 안하겠다는 뜻의 글이라도 한 장 써 달라』고 부탁합니다.
李박사는 손수 타이프를 쳐서 답서를 전합니다만, 이때 한 말이 있습니다.

   『미국이 李承晩을 틀어쥐고 있다고 공산도배들이 확신하는 순간, 당신네 미국은 가장 유력한 협상수단 하나를 잃게 되고, 동시에 우리 한국인들은 모든 희망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北核 문제 앞에서 어떻게 되었는지 봅시다. 미국이 한국을 틀어쥐고 있는 셈이지요. 서울 불바다를 만들겠다고 해도 우리는 아무 대책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미국이 한국을 틀어쥐고 있다고 공산주의자들이 확신하는 순간, 미국은 협상수단을 잃게 된 겁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얻을 게 없는 상태가 되었지요. 이보다 더 절실한 얘기가 없습니다. 

   司會: 냉전이 종식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許장관님 같은 의견을 피력하면 냉전주의자란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지요. 냉전주의를 혐오하는 듯한 사람들이 사실상 냉전종식에 기여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냉전시대에 국내적으로는 반체제운동을 했고, 국제적으로는 지금은 망한 나라들의 이념을 좇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사회주의권이 붕괴되자 그들은 어느새 평화주의가 되어 있습니다. 희안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국내에서 평화 운운할 때는 원자력발전소와 미군의 핵무기를 철수하기 위한 데모를 할 때뿐이었습니다. 이때에도 그들은 애써 사회주의권이나 北韓과의 관계를 부정하려했지만, 그들은 소련의 핵무기나 북한의 남침 땅굴같은 것은 결코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탈냉전 시대를 맞았지만 오히려 한반도는 핵문제로 시끄러워졌습니다. 이번에는 북한이 핵을 가지고 전략적인 장난을 시작한 겁니다. 그러나 아주 희안하게도 국내의 반핵운동가는 모두 사라진 겁니다. 모두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숨어서 말합니다. 李承晩은 친일분자요, 분단의 주범이라고 말이지요.
   
   역대 지도자 중 가장 「私」가 없던 분
   
   許文道: 그만큼 우리가 못난 겁니다. 일본인들에게 천황은 「私」가 없는 사람이란 의미입니다. 우리 근세사에서 역대 지도자들 중 가장 私가 없는 분이 바로 雩南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공인으로 살아가신 분입니다. 이 정도의 私를 초극하는 삶이란 보통 사람으로서는 흉내내기도 힘든 일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수련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李仁秀: 한 인물에 관한 사실적 이해가 없다면 신격화 혹은 정 반대의 상황에 처하게 되지요. 우리 사회에서 인물이나 역사에 관한 이해 수준이 뒤떨어졌다는 것은 金日成과 李承晩의 차이만큼 현격합니다.
   해방 이후 세계정치무대에 올라선 인물들과 아버님과 비교를 해 봅시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정치학으로 박사학위를 따고 현장경험을 두루 겪은 아버님에 비하면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美 육군사관학교를 나왔고,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吉田 茂)는 東京帝大 출신입니다. 거기에 반해 스탈린은 디플리스 神學校 2학년 중퇴고, 毛澤東은 호남 사범학교 출신입니다. 물론 金日成은 중학교 중퇴고요. 단적으로 중학교 중퇴자와 박사와의 차이만큼이나 정치적 식견과 안목에는 質적인 거리가 있습니다.

   許文道: 우리의 선배 지도자 중에 이토록 지금 이 순간까지도 우리에게 필요한 말을 남긴 분이 드뭅니다. 이런 것이라도 배워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未堂 선생님의 뜻에 따라 이런 얘기를 하는 중에 몇 가지 교훈이라도 얻어야 의미가 있을 겁니다.

   司會: 늦었지만, 우리는 대한민국의 始祖에 대해 긍지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이 그토록 훌륭하신 분이었다면 앞으로도 우리 민족은 더 훌륭한 지도자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 귀한 말씀을 나눠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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